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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의 사절 미스코리아, 동토의 땅 녹였다

“언니, 정말 너무나 멋지고 훌륭한 공연이었어요.”(미스코리아 후보) “이쁘게 봐 주셔서 고맙습네다. 다음에 꼭 다시 오시라요.”(평양모란봉교예단 여성단원)

5월10일 오후 평양모란봉교예단의 공연이 끝난 금강산 문화회관안은 박수와 눈물, 그리고 남북의 젊은이들이 서로 뒤엉킨, 가슴 찡한 동포애의 한마당이었다.

커튼콜이 진행되는 순간 미스코리아 후보들은 박수를 치며 무대쪽으로 달려갔고 북측 공훈 배우들도 이례적으로 무대 앞쪽으로 나와 미스코리아들과 악수와 포옹을 나누며 서로를 격려했다.

남측 미의 사절과 북측 젊은 배우들이 낮선 북녘땅에서 하나가 되는 감격적인 장면이었다. 객석을 가득 메운 800여 남측 관람객은 일제히 일어나 뜨거운 눈물의 박수를 보내며 한동안 자리를 뜰 줄 몰랐다.

그순간 그자리에는 이념이나 사상, 분단 같은 한계가 있을 수 없었다. 오직 하나라는 동포애만이 가득히 넘쳐흘렀다.


북한중앙TV 대규모 취재단 파견

특히 이날 이례적으로 북한 국영방송인 중앙 TV가 대규모 취재단을 파견, 미스코리아 후보들과 남측 관람객의 공연 관람 장면을 상세히 촬영해 이목을 끌었다.

북한 중앙 TV는 본 공연이 펼쳐진 1시간30여분 동안 ENG 카메라 3대를 동원, 미스코리아의 일거수 일투족과 남측 관람객이 공연에 열광하는 생생한 장면을 그대로 카메라에 담았다. 이날 공연에는 평양에서 내려온 고위층 간부 상당수가 남측 관객과 함께 공연을 관람하는 모습도 보였다.

“이번 중앙 TV의 촬영이 남북 정상회담과 관계가 있는 것인가”라는 기자의 질문에 한 북한 관계자는 “알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현대아산측 한 관계자는 “중앙 TV에서 이처럼 남측 관객의 공연관람 장면을 촬영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라며 “남북 정상회담 때 사용할 홍보물용으로 제작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해 이번 미스코리아 방북 촬영이 6월 있을 남북 정상회담을 겨냥해 만들어진 것으로 보여진다.

대회 창설 44년만에 처음 있은 미스코리아 후보들의 금강산 방문은 5개월여에 걸친 치밀한 준비 작업을 거쳐 극비리에 추진된 깜짝 이벤트였다.

주최사인 ‘한국일보사’가 가장 우려한 것은 미스코리아에 대한 북측 태도가 과연 어떨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본래 북한에서는 남측의 미스코리아를 가장 전형적인 자본주의 산물의 하나로 인식하고 있다. 남녀를 동등한 노동 개체로 여기는 북한 사회에서 여성의 미를 다루는 미인대회를 곱게 볼 리 만무였다.

이런 이유로 주최사인 ‘한국일보사’와 주관 방송사인 MBC는 방북후 일정에 촉각을 곤두 세우고 있었다.

‘사상 첫 미스코리아 방문의 상징적 의미를 알리기 위해선 어떤 것을 할 수 있을까’하는 기초적인 질문에서 ‘혹 미스코리아 후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방북 자체가 취소되는 것이 아닐까’,‘촬영은 어느 선까지 허용될까’, ‘무사히 남쪽으로 귀환할 수 있을까’ 등등 갖가지 우려와 고민이 논의됐다.

‘한국일보사’와 현대측은 그동안 수차례에 걸친 사전 미팅을 통해 ‘상황 상황에 맞춰 대처하자. 대신 틈이 나면 준비한 이벤트를 강행하자’는 쪽으로 최종 결론을 내렸다.

사전에 북측의 양해를 구하려다 보면 오히려 감시만 강화돼 이벤트 자체를 시도 조차 못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는 현대측의 조언에 따른 것이었다.


이벤트 내내 긴장의 연속

주최사가 기획한 깜짝 이벤트는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 만물상이나 옥류동 계곡에서 준비해간 한복이나 드레스복을 입고 기념 촬영을 하는 것,

둘째 어디서든 후보자의 야외 수영복 촬영을 시도하는 것, 그리고 서커스 공연후 북측 배우들과 미스코리아 후보들이 함께 ‘우리의 소원’을 부르며 피날레를 장식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후보자들과 스탭 전원은 북한에선 일절 “미스코리아의 ‘미’자도 꺼내지 말자”라는 다짐과 함께 ‘미스코리아’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 가방과 옷의 글자도 모두 테이프로 가렸다.

이처럼 미스코리아 후보를 포함한 대회 관계자들은 마치 전투(?)를 나가는 군인의 심정으로 북녘 땅에 올랐다.

방북 첫날인 9일 미스코리아 후보들은 짙은 운무가 호위하는 금강산 만물상을 생활 한복 차림으로 등정에 나섰다.

당시 한복을 입는 문제도 북측 관리원과 밀고 당기는 논쟁 끝에 어렵게 얻어낸 것이었다. 만물상 코스의 삼선암에 도착한 미스코리아들은 천하절경 금강산의 비경에 채 빠져들기도전 한 북한 여성 관리원의 시샘 섞인 핀잔을 들어야 했다.

“자, 처녀들은 미인대회에 나온 후보들입니까”하고 관심을 보이더니 곧바로 “남조선 여자들은 잘 가꾸는지 무척 키가 크고 피부가 곱구만요. 하지만 머리를 노랗게 물들여서 보기는 좋지 않구만요”하고 애써 외면했다.

사진 촬영은 완전히 통제하진 않았지만 상당히 제한적으로만 허용했다. 한 사진기사는 장소 스케치를 하다 우연히 북측 관리원 얼굴쪽으로 카메라 방향을 돌렸다가 찍은 필름을 압수당하기도 했다.

모신문사 취재기자도 “관광 와서 웬 취재냐”는 이유로 후보자들과의 인터뷰 내용을 적은 취재수첩을 압수당했다가 이튿날 되찾는 해프닝을 겪기도 했다.


시간지나자 “언니·동생”하며 친밀

그러나 이런 긴장된 분위기도 미스코리아 후보의 아름다운 미소와 함께 조금씩 녹아 들어가기 시작했다.

구룡폭포 코스를 답사하는 이튿날, 비록 날씨는 온종일 비가 내리는 악조건이었으나 미스코리아들과 북측 관리원의 관계는 한결 자연스럽게 변해갔다. 첫날 준엄했던 표정은 어느덧 사라지고 북측 관리원과 미스코리아들은 “언니”, “동생”하며 한결 가까워졌다.

23세라는 옥류동 계곡의 한 북한 여성 관리원은 미스코리아 후보에 둘러싸인 채 쏟아지는 질문 공세에 답하느라 곤혹을 치를 정도였다. “나이가 얼마나 되는지 물어봐도 됩니까.” “우리는 25세가 되야 연애를 합네다.

그전까지는 열심히 일해야지요. 남조선에서는 몇살쯤 결혼합네까.” “남남북녀라고 하는데 정말 우리 북쪽 여자들 이쁩네까.” 비록 때늦은 봄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쌀쌀한 날씨였지만 남과 북 여성들이 서로 진솔한 마음을 펼쳐보였던 그 자리는 어느 곳보다 훈훈함이 넘쳐 흘렀다.

“처음 입국할 때는 사실 두렵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왠지 모르게 애써 열등감을 감추려는 그들의 얼굴을 마주해보니 너무나 가슴이 아픕니다. 하루빨리 남북이 하나가 되는 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방문 마지막날 평양모란봉교예단과의 만남을 뒤로 하고 돌아서는 미스코리아 후보들의 두 눈은 촉촉히 젖어 있었다.

송영웅 주간한국부기자 herosong@hk.co.kr

입력시간 2000/05/21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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