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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선 중진들, 지금 뭐하십니까"

새천년의 첫 선거인 4·13 총선의 두드러진 흐름 중의 하나는 386 세대로 대표되는 신진 정치세력의 대거 등장이다. 신세력의 등장은 곧 구세력의 몰락을 의미한다. 그만큼 이번 총선에서 낙선한 중진 정치인이 많다는 이야기다.

어느 때보다 거세게 불어닥친 변화의 바람을 넘지 못하고 고배를 마신 중진들은 요즘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한때 우리 정치를 좌지우지했던 화려한 경력을 지닌 그들이지만 아직도 낙선의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칩거에 들어간 이가 있는가 하면 패배의 아픔을 딛고 재기의 몸짓을 구체화하는 이도 있다. 또 당분간 정국의 추이를 지켜보며 나름대로의 ‘역할’을 찾아보려는 관망파도 있다.


와신상담-칩거형

민주당 장을병 의원은 총선후 아들이 살고 있는 미국에 머물고 있다. 자민련 TK주자의 대표격을 자부해온 박철언 부총재는 총선 이후 한번도 당사에 나오지 않을만큼 꽁꽁 숨어있다가 최근 재충전을 위해 유럽방문을 준비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특히 지역구를 통해 단 한명도 원내 진출에 성공하지 못하는 참패를 한 민국당의 중진들은 대부분 칩거에 들어간 상태.

우선 조순 전대표는 매일 새벽 등산하는 것을 빼고는 하루종일 서재에 틀어박혀 경제현안에 대한 칼럼 집필을 준비하고 있다. 정계입문 2년8개월만에 당수에서 평당원으로 돌아간 그는 “정치활동을 줄이는 것이지 정계 은퇴는 아니다”면서 재기의 의욕을 감추지 않고 있지만 특별한 계기가 마련되지 않는 한 결코 정치적 재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한때 여야 모두 ‘차기주자감’으로 꼽았던 이수성 전총리는 첫 선거에서의 패배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두문불출하다가 가족과 함께 뉴질랜드로 휴가를 떠난 것으로 전해졌다. 이 전총리의 측근은 “1년 정도는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총선 직전 한나라당의 공천탈락에 반발, 민국당으로 둥지를 옮긴 이기택 최고위원과 신상우 국회부의장도 오랜 정치생활 가운데 가장 견디기 어려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는 것이 측근의 전언. 두 사람 모두 마음을 정리하기 위해 두문불출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공공연하게 “여기서 결코 그만둘 수 없다.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가 대통령이 되는 것은 막아야 한다”고 입을 모으고 있어 조만간 활동을 시작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재야의 거목’으로 군림하다 처음으로 시도한 본격적인 정치무대 진입에 실패한 장기표 최고위원도 오대산 산사 등을 오가며 와신상담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좌절은 없다-재기선언형

우선 민주당 노무현 의원과 김중권 전청와대비서실장은 9월 전당대회에 민주당의 최고위원 경선 출마를 적극 검토할 정도로 재기의욕을 불사르고 있다.

노 의원은 “9월 최고위원 경선이 차기와 당내 상징성에 관련된 세력구도를 결정짓는 성격으로 치러진다면 단 1표를 얻더라도 나선다”는 입장이다.

특히 노 의원은 총선 낙선에도 불구하고 ‘지역감정의 벽을 넘지 못한 정치실험’이라는 찬사를 받는 등 유권자의 격려에 고무된 듯 “정치를 그만두게 될 줄 알았는데 의외의 상황이 나타나고 있다”며 자신감을 보이고 있다.

총선에서 19표 차이로 낙선의 고배를 마신 김 전실장은 최고위원 경선 출마의사를 공공연하게 밝히는 가운데 6월1일에 실시되는 대법원의 재검표에 내심 기대를 걸고 있다.

‘태풍의 눈’처럼 등장한 386 바람에 5선의 꿈을 접어야 했던 한나라당의 이세기 의원은 최근 당의 대북관계 대책특위위원장을 맡으면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민국당에서는 김윤환 대표대행과 박찬종 전의원이 패배의 충격을 딛고 활발한 대외활동을 벌이고 있다. 김 대표대행은 ‘킹 메이커’라는 명성에 걸맞게 반(反)이회창 세력이 중심이 되는 ‘영남 정치동우회’(가칭) 결성 등 차기 대선을 위한 밑그림을 구상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지난 1일 김대중 대통령과 만나 ‘비(非)한나라당 연합세력의 연정론’을 제기한 그는 “차기 대권후보를 만들어 DJ를 견인해낼 것”이라면서 왕성한 의욕을 과시하고 있다는 후문. 특히 이달에 열릴 전당대회에서 당 체제를 정비한 뒤 민국당의 ‘캐스팅 보트’ 역할을 적극 살려나갈 계획이다.

낙선 이후 자비를 들여 150개의 플래카드를 만들어 부산 시내에 내걸었던 박 전의원은 지난 5월10일 부산 용두산공원에서 열린 ‘시민경제강연회’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강연정치’에 나섰다. 그는 이달 안으로 그동안 각종 신문·잡지 등에 기고한 글을 묶어 ‘한국 경제, 이대론 안된다’를 출판할 예정이다.


두고보자-관망형

서울 종로에서 패배한 민주당 이종찬 전국정원장은 이달 말께 미국으로 유학을 떠날 예정.

유학기간은 짧으면 6개월, 길면 1년 가까이 될 것이라고 하는데 당분간 당직을 유지한 채 정치활동을 중단할 것이라는 것이 측근의 전언. 하지만 ‘기회가 되면’ 언제라도 다시 국내로 들어와 활동을 재개할 것으로 전해졌다.

경기 광명에서 낙선한 민주당 조세형 상임고문도 당분간 자서전 집필에 몰두하며 ‘세월을 낚을’ 생각이다. 하지만 지구당을 유지하면서 기회가 닿는 대로 ‘역할’을 찾아볼 계획이다.

‘물구나무를 서서라도 국회로 들어가겠다’며 기염을 토했던 민국당 김상현 의원도 “내년 대권 경쟁구도가 가시화할 때까지 당분간 환경관련 시민운동에 주력할 생각”이라며 잠정적인 정치활동 중단을 선언했다.

한때 지리산 등지의 산사에 파묻혀 지냈던 민국당 김광일 최고위원은 변호사 사무실 재개 준비를 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한편 전남 해남·진도에서 떨어진 민주당 김봉호 국회부의장은 선거이후 당선무효소송 진행에 총력을 기울이며 여전히 ‘선거전’을 치르고 있는 중이다.

박천호 정치부 기자 toto@hk.co.kr

입력시간 2000/05/26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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