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세계는 해커 양성소

컴퓨터관련 범죄 무방비, 국제사회에 큰 위협

필리핀 마닐라에 있는 AMA 컴퓨터대학 논문심사위원회는 지난 2월 오닐드 구즈만이 제출한 '이메일 비밀번호 찾아내는 트로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기각하면서 학문외적 이유를 달았다. 이 학교 학장은 "이 논문은 불법"이라고 지적했다.

드 구즈만이 제출한 논문은 다른 사람의 인터넷 계정을 몰래 빼돌려 인터넷을 무료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이었다. 교수들은 논문의 여백에 "우리는 '도둑'을 양성하지 않는다"고 써놓았다. 드 구즈만은 이 논문으로 학위를 받지 못했다.

그러나 논문의 내용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얼마전 미 국방부와 영국 의회 등 전세계의 이메일 체계를 박살내 150조 달러의 재산피해를 낸 대재앙의 원인인 러브바이러스의 원전이 됐다는 의심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23세의 야윈 듯한 드 구즈만은 지난 주 기사회견을 갖고 러브버그 살포의 책임을 사실상 인정했다. 선글라스를 끼고 얼굴을 수건으로 가린 채 나타난 구즈만은 바이러스를 퍼뜨렸냐는 질문에 "그럴 수도 있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그는 그랬다 하더라도 '젊은 혈기' 의 결과였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바이러스 천국 필리핀

개발도상국의 대학이 해커의 온상으로 등장했다는 사실은 그다지 놀라운 것이 아니다. "온라인상으로만 서로 교류하는 해커동아리가 선진국의 컴퓨터시스템에 유례없는 위협요소가 되고 있다."고 관계 당국은 지적한다.

이들 중 일부는 컴퓨터 기술을 연마하겠다는 교육적 목적으로 해킹을 하고 있다. 또 파괴를 저지르는데서 희열을 느끼거나 혹은 단순한 재미로, 혹은 돈을 위해 해킹을 하기도 한다. 최근에는 상당수가 정치적, 이념적 목적을 띠는 추세다.

사이버범죄 경찰관들은 몇몇 국가를 해킹천국으로 주목하고 있다. 돈세탁의 천국처럼 이들 국가는 컴퓨터관련 범죄에 대한 규제법률이 없거나 아주 느슨하고 당국은 부패하거나 거의 규제능력이 없어 해커들이 얼마든지 세계를 위협하는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는 충분한 환경을 갖추고 있다.

AMA 컴퓨터 대학은 필리핀에서 컴퓨터 교육의 선구자격이다. 이곳에서 많은 젊은이가 중산층으로 진입할 수 있는 기회를 엿볼 수 있다.

그러나 AMA는 또한 '그래머 소프트'라는 지하 컴퓨터동아리의 산실이기도 하다. 그래머소프트는 중소기업에 컴퓨터프로그램을 판매할 뿐만 아니라 논문이나 숙제를 학생에게 파는 것으로 알려졌다. 드 구즈만도 그래머소프트의 회원이다.

드 구즈만의 친구인 마이클 부엔(23)도 회원이다. 수사당국에서는 러브버그가 드 구즈만과 부엔의 공동작품인 것으로 의심하고 있다. 러브버그의 코드에는 그래머소프트의 이름이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필리핀은 바이러스 천국으로서 요건을 모두 갖추고 있다. 수천명의 젊은이들이 AMA와 같은 학교에서 컴퓨터프로그래밍을 배우고 있다. 반면 컴퓨터 관련 법규는 미미한 형편이다.

실제로 러브버그의 용의자가 국내법에 의해 퍼벌되 수 있을지도 불분명하다. 드 구즈만의 동기도 아리송하다. 한번은 "실수였다"고 주장했다가 나중에는 기자들에게 "인터넷은 교육적이어야 하고 따라서 무료로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필리핀에서는 인터넷을 1시간 사용하는데 3달러가 든다. 필리핀 국민의 주당 평균소득이 20달러인 점을 감안하면 적지 않은 액수다.

만약 드 구즈만이 사이버 용어로 '핵티비스트'라고 불리는 의식화한 해커라면 문제는 간단치 않다. 최근 정치적 이념에 따라 움직이는 해커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파키스탄, 미국, 인도가 주 공격 대상

'파키스탄 해커즈 클럽'은 미국과 인도의 인터넷 사이트를 주기적으로 공격하고 있다. 목표는 한가지, 인도로부터 파키스탄의 해방이다.

해커 사이에서 '미스터 누커'라고 불리는 이 클럽 회장은 세계에서 가장 정력적으로 활동하는 해커다. 그동안 이 클럽은 텍사스의 랙크랜드 공군기지 사이트와 카라치 증권시장, 미국 에너지부 홈페이지를 공격해 '캐시미르를 구하자'라는 글을 남겨놓았다.


나토공격, 오폭 유도한 세르비아

미군이 코소보를 3일동안 폭격하는 동안 세르비아 해커들은 나토의 웹사이트를 집중공격해 외부연결을 끊어놓기도 했다.

또한 나토의 이메일 시스템에는 바이러스에 감염된 메시지가 폭주하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지 1년이 지났지만 해커들은 공격을 멈추지 않고 있다.

지난달만해도 영국 맨체스타 축구팀의 홈페이지는 물론 독일의 아이다스사까지 무려 50개 회사의 홈페이지가 세르비아의 상징인 독수리와 '코소보는 세르비아다'라는 슬로건으로 바꿔치기 됐다.


중국, 대만 해커들의 전쟁

중국과 대만의 긴장이 고조되자 양안의 해커도 바쁘게 움직였다. 대만 총통 이등휘가 대만은 주권국가라고 천명하자 이에 격분한 중국의 해커들이 바이러스 공격을 가했다. 대만의 해커들도 곧 반격을 가해 중국의 웹사이트에 '헬로 키티'라는 유명한 일본 만화를 띄워놓았다.


선진국들 대책마련에 부산

이밖에도 싱가포르와 남아프리카, 말레이시아, 브라질, 아르헨티나, 불가리아, 폴란드 등도 해커의 온상으로 요주의 국가명단에 포함돼 있다. 선진국들은 이제 막 대책마련에 나선 상태다.

유럽의회는 컴퓨터 범죄 관련 법률의 입법과 수사공조를 규정하는 조약을 채택했다. 선진 8개국 정상회의 산하 소위원회도 이번주에 컴퓨터 관련 유명 전문가들을 초청해 바이러스 퇴치 방안을 들을 예정이다.

그러나 해커방어는 생각보다 쉽지 않은 작업이다. 컴퓨터바이러스 감시연구소인 'ICSA.net'의 데이비드 케네디 국장은 "능력있는 해커들은 이를 도전으로 받아들여 뚫을 방법을 잦는다"라고 설명했다.

문제는 제3세게의 해커의 성향이다. 선진국의 컴퓨터 전문가보다 뛰어나다는 점을 입증함으로써 만족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드 구즈만이 세계를 놀라게 한 러브바이러스의 용의자로 지목되자 필리핀의 반응도 마찬가지였다.

마닐라에서 발행되는 '스탠다드'는 "필리핀 최초의 세계적인 해커였다"고 드 구즈만을 치켜세운 뒤 "필리핀인도 할 수 있다"고 보도했다.

입력시간 2000/05/29 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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