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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노체트, 역사의 단죄 받나

면책특권 박탈, 칠레 과거청산작업 본격화

독재자의 말로는 역시 비참하다. 억울하게 당한 원혼들이 그냥 내버려 둘 리가 없다.

82세 노구를 이끌고 영국에 들렀다가 가택연금을 당한 후, 스페인 법정으로 끌려갈 뻔 했다가 겨우 살아 돌아온 칠레의 전 군부독재자 아우구스토 피토체트(84)가 조국에서도 결코 편한 여생을 보낼 수 없게 됐다. 늙고 병들고, 이젠 역사적 단죄를 받아야 할 처지에 놓였다.

칠레 산티아고 항소법원은 6월5일 종신 상원의원인 피노체트에 대한 의원 면책특권 박탈 여부를 전체 합의에 부친 결과 22명의 법관중 13명이 찬성(반대 9명), 면책특권을 박탈하기로 결정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이로써 영국법원의 ‘재판과정에서의 정신적·육체적 부적합’판결로 지난 3월 칠레로 돌아온 피노체트는 17년간(1973~1990년)의 독재시절 각종 인권유린 혐의로 제기된 110건의 소송사건을 놓고 또다시 고국에서 지리한 법정싸움을 벌이게 됐다.


변호인단 상고, 번복 가능성은 희박

피노체트의 변호인단은 항소법원의 판결에 불복, 상고할 뜻을 밝혔지만 대법원에서 번복될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게 대체적인 시각이다.

법원의 이번 심의는 희생자 유족들이 피노체트의 면책특권을 박탈할 것을 요구하며 제기한 재정신청과 면책특권에 대한 심판을 내려달라는 정부의 의견을 받아들여 이뤄졌다. 앞서 연방법원의 후안 구스만 판사는 피노체트 귀국 직후

이들 유족이 제소한 ‘정치범 19명 납치및 실종사건’에서 피노체트의 개입혐의가 짙다고 판단, 그를 전격 기소했었다. 이 사건은 유혈 쿠데타 직후인 1973년 특수부대 요원들로 구성된 ‘죽음의 특공대’가 저지른 군정의 대표적인 인권유린 행위이다.

세르히오 아레야노 장군을 지휘관으로 한 죽음의 특공대는 쿠데타 이후 칠레 국내에서 빈발하던 반체제 탄압과 좌익인사 색출 및 격리를 주목적으로 구성된 조직. 일단 이 조직의 눈에 띄면 군사재판을 거쳐 신속하게 ‘집행’이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아레야노 장군을 비롯한 특공대 고위 관계자들은 모두 72명의 양심수에 대해 총살형을 선고한 사실이 확인됐으나 이중 19명의 행방은 아직도 밝혀지지 않아 유족들이 진상규명을 요구하고 있다.

피노체트는 1998년 9월 척추수술을 받기 위해 영국으로 갔다가 다음달 16일 수술 직후 스페인 사법당국의 요청으로 영국 경찰에 체포됐었다.

체포를 요청한 스페인의 발타사르 가르손 판사는 피노체트가 권력을 획득, 유지하기 위해 정치적 반대자들에게 고문을 자행했다고 비난하면서 그를 법정에 세우기 위해 신병인도를 요청했었다.

이에 대해 영국 런던 법원은 지난해 10월8일 그를 스페인에 인도하기로 결정 했으나 건강이 악화되는 바람에 석방, 3월4일 칠레로 돌려보냈다.

피노체트는 1973년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뒤 17년간에 걸친 장기집권 기간중 마지막 2년간에 있었던 한 건의 고문 공모죄와 34건의 개별 고문사건과 관련해 가르손 판사로부터 피소됐다. 그의 통치기간 동안 3,197명의 반체제 인사가 살해됐으며 실종자 수가 무려 10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직대통령 면책특권은 여전

그러나 이번 면책특권 박탈이 곧바로 그의 기소와 처벌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피노체트는 이번 결정으로 의원으로서의 면책특권은 박탈당했지만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면책특권이 여전히 갖고 있어 대법원의 최종 판단이 주목된다.

칠레 의회는 지난 3월말 전직 대통령들에게 면책특권을 부여하는 법안을 통과시켰기 때문에 그는 여전히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각종 혜택은 누릴 수 있는 상태다.

또한 피노체트는 84세의 고령인데다 여러차례 병원신세를 질 만큼 정신적·육체적으로 쇠약하다는 사실 역시 참작될 경우 예기치 못했던 판결이 나올 수도 있다.

어쨌든 이번 판결을 계기로 ‘인간 살육자’ 피노체트를 비롯해 그와 함께 군정을 이끌었던 3,000여명의 군정관계자들 운명은 이제 칠레 사법부의 판단에 맡겨졌다.

더구나 군정시절 투옥을 경험했던 리카르도 라고스 칠레대통령이 전례 없이 사법부의 독립과 판결존중 정신을 강조해 온데다 최근 칠레정부가 군정시절 제정된 사면법의 확대적용을 배척한 이상 이들의 운신의 폭은 더욱 좁아질 수 밖에 없다.


미국, 이례적 공개 지지

이런 점에서 칠레의 정치전문가들은 “칠레의 과거청산작업은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말하고 있다.

한편 미 국무부는 피노체트에 대한 이같은 결정에 대해 “인권문제를 심리하는 칠레 사법당국의 독립성을 높이 평가한다”는 성명을 발표, 이례적인 공개지지를 표명했다. 윌리엄 슐츠 국제사면위원회 미국 지부 사무총장은 “이번 결정은 혁신적인 것으로, 인권범죄를 저지르는 모든 독재자들에 매우 중요한 신호”라고 말했다.


[피노체트 일지]

◇1998년

▲9월22일: 영국 도착 ▲10월16일: 스페인이 발급한 영장에 의해 영국 경찰에 의해 체포 ▲11월25일: 영국 상원, 피노체트에게 면책특권 없다고 결정 ▲12월17일: 영국 상원 재심위원회, 피노체트 면책특권 여부 재심리 지시

◇1999년

▲3월24일: 영국 상원 심사원단 7대 1로 피노체트에게 면책특권 없다고 결정 ▲4월15일: 잭 스트로 영국 내무장관, 두번째로 범죄인 인도절차 진행 지시 ▲9월14일: 스페인, 이 사건을 국제중재위원회에 넘기자는 칠레 제안 거부 ▲10월8일: 런던법원, 피노체트 스페인 인도 결정

◇2000년

▲1월5일: 런던 노스윅 파크 병원서 건강진단 ▲1월11일: 4개 의료팀의 소견에 따라 스트로 장관이 석방 발표 ▲1월31일: 런던법원, 벨기에 정부의 피노체트 석방저지 소송 기각 ▲2월11일: 피노체트 건강 위독설 ▲3월2일: 영국 정부, 석방 결정 발표 ▲3월4일: 칠레 귀국 ▲6월5일: 산티아고 항소법원, 의원 면책특권 박탈 결정

홍윤오 국제부기자 yohong@hk.co.kr

입력시간 2000/06/13 2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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