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6세대의 힘을 하나로 뭉친 '제3의 힘'

지난달 29일 새천년 민주당 서영훈대표가 여의도 한 음식점에서 마련한 초선의원 오찬 모임. 그러나 유독 한 테이블만 덩그라니 비어 있었다. 바로 386 세대 출신 초선 의원들의 자리였다. 이른바 광주‘5.18 술자리’로 여론의 따가운 질타를 받은 386의원들이 감히 공식석상에 나서지 못하고 자중하는 중이었다.

광주‘5.18 술자리’에 참석했던 의원 중 유일하게 모습을 드러낸 이종결의원도 “송구스럽고 죄송하고… 모두 여기에 나오는 것에 큰 부담을 가지고 있다”며 말을 잇지 못했다.


새로운 정치 표방, 의욕적 청사진 제시

‘5.18술자리’의 현장을 본 임수경씨가 386세대의 자숙을 촉구하는 글을 올린 곳은 ‘한국의 미래 제3의 힘’(www.futurekorea.org) 인터넷 사이트였다. 일반에게 거의 알려져 있지 않는 ‘제3의 힘’은 80년대 학생운동권 출신 400여명이 만든 시민단체.

목표는 이름에서 나타난 대로 한국의 미래를 책임질 새로운 대안의 정치세력을 만든다는 것. 1999년 10월 발족했다. 참여자의 면면을 보면 80년대를 대표해온 운동권 결사체와 같은 느낌을 주기에 충분하다.

이정우(전 서울대 총학생회장)변호사, 이인영(전대협 초대의장)씨, 우상호(전 연세대 총학생회장)씨, 고진화(전 성균관대 삼민투 위원장)씨, 함운경(전 서울대 삼민투 위원장)씨, 임종석(전대협 3기 의장) 민주당 의원, 송영길(전 연세대 총학생회장) 민주당 의원, 김영춘 한나라당 의원, 허인회(전 고려대 총학생회장)씨 등이 두드러진다. 제3의 힘은 한국의 미래를 점치게 하는 파랑새 역할을 자임하고 나섰다.

16대 총선에서 당선자를 낸 제3의 힘은 17대 총선이 예정된 2004년에는 386세대를 중심으로 한 신당 창당을 목표로 세력을 규합중이다.

주요 강령은 연속 3번 이상 출마 금지 날치기통과 등 다수파 횡포 근절 의회 농성 및 점거 반대 자유의사에 의한 표결제 100만원 이상 정치자금 실명기부 의무화 등의 강령을 표방하고 새로운 정치실험에 대한 의욕과 희망을 키워왔다.

제3의 힘은 또 자신의 소득과 시간의 3%를 남을 위해 기부하는 ‘나눔의 삶’운동, 1인 1시민단체 가입운동, 전문가의 사회적 기여운동, 전자민주주의 실현, 불량 정치인 리콜운동 및 낙선운동, 차세대 정치인 양성, 신세대 정치참여 운동 등 의욕적인 신정치 프로그램을 제시했다.

민주화를 위해 젊음을 바친 386 세대들의 결의인 만큼 국민은 큰 희망을 품고 이들을 지켜봤다. 그러나 광주 술자리 사건이후 자기반성 못지 않게 억울함을 호소하는 목소리도 커 제3의 힘은 곤혹스러워 하고 있다. “‘흐드러진 술판 운운’은 보수언론과 극우세력의 공격”이라는 일부의 지적에 우왕좌왕하고 있는 듯하다.

한 정당의 대변인실에 근무하는 제3의 힘 회원 김모씨는 “386세대는 결속력이 강하고 끊임없는 토론과 비판을 통해 결론에 도달하는 특성이 있다”며 “일부 회원의 잘못된 행동을 깨끗이 비판하고 징계한 뒤 다시 태어나는 모습을 국민에게 보이면 될 텐데 너무 주저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제3의 힘에서 사업기획팀장을 맡았던 박재구(39)씨는 “이번 파문 자체가 세대 전체의 도덕에 심대한 타격을 줬기 때문에 연대 사과가 필요하다. 우리에 대한 기대가 큰 만큼 자숙, 신뢰의 기간을 거쳐 국민의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고 말했다.


비상총회서 치열한 자기반성

박재구 전 팀장의 지적대로 제3의 힘은 지난달 30일 서울 숭실대 사회봉사관에서 비상총회를 가졌다. 이 자리에는 50여명의 회원이 참석해 뼈저린 반성과 눈물, 억울함, 언론에 대한 성토가 뒤섞이며 3시간 30여분간 계속됐다.

“우리 내부에서 ‘사는 게 다 그렇지’라는 분위기가 암묵적으로 흘렀습니다. 386 세대가 모두 해이해졌고 이런 상태에서 ‘5.18’정신을 들먹이면 국민들이 비웃습니다.” 한 참석자의 치열한 자기반성은 장내를 숙연하게 만들었다. 오후 8시께 광주 술자리의 당사자인 민주당 송영길 의원과 우상호 위원장이 도착해 참회의 신상발언을 했다.

뒤이어 이진순(38·여·방송작가)씨가 나서 “이한열 열사를 광주에 직접 묻고 매년 홀로 기일(忌日)을 지킨 우상호씨와 광주의 아들 송의원을 광주의 이름으로 단죄해야 하는 우리의 마음은 더욱 아프다”라며 경과보고를 시작했다. 이씨의 목메는 발언 중간 중간에 회원들은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거나 어깨를 들썩이며 오열했다.

이씨는 민주주의 원칙을 강조했다. “설사 젊은 개혁그룹 전반에 대해 치명적인 타격이 될 것이라고 예상됐다 하더라도, 하나의 안건으로서 (임수경씨의 글을) 공개하고 사실의 진위 여부를 엄중하게 확인해 나가고 만일 과장이나 왜곡이 있다면 공개적으로 시비를 가리는 절차를 밟았어야 했다. 그것이 민주주의다.

제3의 힘이 모인 것은 바로 그런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뜨거운 열정때문이었다.”그러나 민주주의 원칙이 상처받은 국민 감정을 되살릴 수 있을까.

비판은 다양했다. 모두의 책임이라는 자성도 있었다. 한 회원은 “같은 과거를 가졌고 같은 미래를 공유하려는 우리다. 어려울 때일수록 함께 지혜를 모아야 한다”며 “술자리에 참석했던 새천년민주당 송 위원과 우 위원장을 징계하려면 우리 모두도 그와 같은 상황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는 지부터 자문해봐야 한다. 냉정하게 자체 비판하고 국민에게 사죄하자”고 촉구했다.

“그 현장에는 나도 있었던 만큼 징계의 대상에 올려달라”(함운경(咸雲炅)씨). “이번 사태는 보수세력의 전면전 선포다”, “우리는 임의단체이기 때문에 책임한도가 적다.

이미 송의원과 우위원장은 사회적으로 매도된 만큼 제3의 힘의 자체 징계는 의미없다.” 솔직하면서도 다채로운 의견은 하나로 결집되기에는 현실적으로 힘들었다. 3시간 30분간의 토론을 통해서도 ‘5.18전야제 술판 참석 회원 징계’에 대한 결론이 나지않자 어쩔 수 없이 같은 건물의 다른 방으로 옮겨 철야 난상토론을 벌였다.

소속 정당 사정으로 이날 총회에 참석하지 못한 한나라당 김영춘 의원은 한 인터넷 신문에 “나무라십시오, 그러나 죽이지는 마십시오”라는 글을 올렸다.

김의원은 “지키기보다는 버리는 마음으로 거듭나는 일종의 ‘씻김굿’으로 이번 사건을 자리매김하자”며 “자숙과 근신을 통해 더욱 단단한 개혁세력으로 국민에게 다가서자”고 촉구했다. 제3의 힘과 386세대의 거듭나는 모습을 언제쯤 다시 볼 수 있을까.

김태훈 사회부 기자 >

입력시간 2000/06/13 2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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