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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북정책 주도하는 '제갈량'

대북정책을 한손에 임동원 국정원장

임동원 국가정보원장은 김대중 대통령에게 어떠한 존재일까. 6월13일부터 15일까지 평양에서 보내온 남북 정상회담 화면을 지켜본 우리 국민은 임 원장의 정치적 비중을 실감했을 것이고 외교안보 문제를 다루는 취재기자들은 이 질문을 다시한번 던져야 했다.

평양에서 임 원장의 행보는 가히 눈부셨다. 6월14일 오후 11시20분 백화원 영빈관에서 진행된 역사적인 남북 공동선언 서명식에 임 원장은 김 대통령 옆에 앉는 배석자로 참여했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참석한 14일 목란관 만찬에서는 헤드테이블에 앉아 정상간 대화에 참여했다.

임 원장은 15일 환송 오찬에서는 북한의 군부 실세인 조명록 군총정치국장과 나란히 오찬사를 하면서 “7,000만 민족의 염원에 평양도 울고 서울도 울었다”며 공동선언의 의미와 성과를 요약했다.

양측 체제 수호의 최전선에 있는 두 사람이 잇따라 오찬사를 낭독하는 장면은 인상적일 수 밖에 없었다. 특히 14일 3시간 이상 진행된 남북 정상회담에 임 원장이 배석자로 참석한 대목도 빼놓을 수 없다.


남북정상의 신뢰 한 몸에

당초 정부는 임 원장이 정상회담 대표단에 포함되지만 모양새를 감안, 공식수행원으로 발표하지 않았다. 임 원장의 대표단 동행 사실이 알려지자 정보기관의 총수라는 특성으로 인해 의외로 받아들여졌다. 그래서 일부 관측통은 임 원장이 막후에서 정상회담 전략을 짜는데 참여하겠지만 ‘설마 정상회담에 참석하겠느냐’는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이 예상은 보기좋게 빗나갔다. 물론 임 원장이 정상회담 전에 2차례 방북, 회담내용을 조율했었다는 사실이 정상회담 직후 밝혀져 회담 배석이유는 확연해졌으나 임 원장에 거는 김 대통령의 신뢰가 다시 한번 부각될 수 밖에 없었다.

임 원장의 비중은 북쪽의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북측 지도부가 더 잘 알고 있는 듯 했다. 김 위원장은 14일 만찬에서 이희호 여사의 좌석이 김 대통령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자 임 원장을 불러 이 여사의 자리를 김 대통령 옆으로 옮기도록 권유했다.

김 위원장이 이같은 이야기를 할 만한 사람으로 임 원장을 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김 위원장은 또 14일 만찬후 임 원장을 상대로 얘기꽃을 피우기도 했다.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도 임 원장에게 “얘기 많이 들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현 정부 출범후 2년5개월간 외교안보 및 대북정책에 관한한 김 대통령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해온 임 원장은 평양 정상회담을 통해 자신의 진가와 그동안의 보람을 진하게 느꼈을 것으로 보인다.

1995년 1월 김 대통령이 이사장으로 있던 아태평화재단의 사무총장으로 영입된 이래 청와대 외교안보수석(1998년 2월), 통일부 장관(1999년 5월), 국정원장(99년 12월)으로 일해왔던 날들이 임원장의 뇌리에서 주마등처럼 스쳤을 법하다.


DJ 대북정책 수립에 큰 역할

1995년 이래 통일문제에 관해서는 한 몸처럼 움직였던 김 대통령과 임 원장의 관계는 처음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그래서 아태재단 사무총장으로 영입되는 과정은 1995년 이후 임 원장의 행보를 재는 주요한 준거점으로 간주된다.

당시 김 대통령은 자신의 측근을 통해 임 원장을 영입하는데 무척 공을 들이다 결국 자신이 직접 나섰다는 후문이다. 삼고초려를 연상케 하는 김 대통령의 임 원장 영입에서는 1990년 이후 외교안보연구원장, 통일원차관 등의 직함으로 남북 고위급회담과 남북 비핵화선언에서 활약했던 임 원장의 대북정책 노선이 큰 배경으로 작용했다는 후문이다.

아태재단에 발을 디딘후 그는 첫 작품으로 김 대통령의 3단계 통일론을 완성하게 된다.

처음이 그렇듯 현 정부 출범 이후 임 원장의 행보는 제갈량에 비견될 수 있다. 흡수통일 배제, 무력도발 불용, 교류협력 심화로 요약되는 김 대통령의 취임초 대북정책 3원칙, 한반도 냉전해체구상 등에 임 원장의 손길이 크게 미쳤다.

특히 1998년 8월 북한의 미사일 발사로 조성된 한반도 긴장국면을 해소하기 위해 같은해 12월 구체화한 한반도 냉전해체 구상의 경우 임 원장의 역할이 남달랐던 것으로 전해진다. 외교안보수석 자격으로 1999년 1, 2월 미국과 일본 중국을 돌며 냉전해체 구상에 대한 지지를 이끌어냈고, 같은해 8월에는 미국을 방문, 페리보고서에 결정적인 입김을 불어넣었다.

이같이 활동반경이 넓어지면서 그는 외교안보수석에서 통일부 장관으로, 다시 국가정보원장으로 자리를 옮겼고 그만큼씩 대북정책의 영향력도 확장되어 갔다.

물론 임 원장이 김 대통령의 후견 속에 이끌어논 그간의 대북정책은 1998년 6월 북한 잠수정 침투사건, 1999년 서해교전 및 금강산 관광객 민영미씨 억류사건 등으로 시련을 맞기도 했다. 이때마다 강경파의 화살은 임 원장을 향했다.

그러나 김 대통령은 특유의 정치감각으로 대북정책을 조율하면서 임 원장을 보호해왔다. 이같은 사정 때문인지 대북정책에 관한 정부의 정책이 최종조율되는 국가안보회의 상임위에서 “임 원장이 독주한다”는 비판도 심심치 않게 흘러나왔다.


매파들의 집중공격 대상 되기도

임 원장의 대북정책을 분석할때 빼놓을 수 없는 대목은 그의 대북정책 이면을 들여다 볼 수 있었던 훈령조작 사건이다. 대북정책 강경파들의 곱지않은 시각을 상징적으로 드러내준 이 사건은 1991년 고위급 회담 당시 발생했으며 1993년 11월 이부영 의원에 의해 폭로됐다.

평양 고위급 회담과정에서 이동복 당시 안기부장 특보와의 갈등으로 유발됐던 이 사건은 국내적으로 임 원장의 이미지를 각인시키는 계기가 됐으며 그의 온건적인 대북정책을 더욱 심화시켰던 전환점이었다.

당시 남측 대표로 참여했던 임 원장이 협상을 통해 노부모 이산가족 고향방문 정례화, 판문점 면회소 설치, 동진호 선원 송환 등 3가지 조건중 두개를 얻는 조건으로 이인모 노인을 송환한다는 협상결과를 도출했지만 이동복 특보가 묵살했다는 의혹을 골자로 한 이 사건은 정부내 매파와 비둘기파의 충돌로 정리되고 있다.

이 사건의 앙금은 지난해 7월8일 이동복 당시 자민련 의원의 국회 대정부 질문에 요약되어 나타난다.

이 전의원은 서해교전, 금강산 관광객 억류사건 등을 거론하면서 “햇볕정책의 과속현상은 그 원인의 많은 부분이 얼마전 대통령 외교안보수석에서 통일부 장관의 자리로 영전한 임동원 장관의 대북관에 기인한다”며 “우리 정부의 대북관이 장밋빛으로 채색이 되어 있고 이같이 특이한 대북관을 임 장관이 주도한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강력한 영향력, 평가는 아직 일러

현 정부의 대북정책은 임 원장을 빼놓고 언급할 수 없을 정도로 그는 매우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대북정책과 관련해 김 대통령을 대신해 야당과 강경파의 비판의 화살을 대신 받아줄 참모는 임 원장 밖에 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현재까지 제갈량에 비견되는 그의 대북정책은 북한의 대외관계 변화에 조응해 일정한 성과를 얻고, 남북의 긴장관계를 화해 협력 관계로 질적으로 변화시키는데 적지않은 역할을 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하지만 임동원 국정원장에 대한 평가는 김 대통령의 대북정책 평가와 그 맥락을 같이할 것으로 보인다. 즉 김 대통령의 대북 정책이 어느 정도 마무리된 이후에나 그에 대한 정확한 평가가 나올 것이다.

이영섭 정치부 기자 younglee@hk.co.kr

입력시간 2000/06/27 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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