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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현의 길따라 멋따라] 전남 담양 소쇄원

[권오현의 길따라 멋따라] 전남 담양 소쇄원

광주(光州)에 들어설 때만 해도 빗줄기에 가려 무등산이 보이지 않았다. 미친듯이 퍼붓던 비가 거짓말처럼 그치고 군데군데 파란 하늘이 터지더니 어느새 혼절할 듯 강한 햇살이 쏟아졌다.

“그곳에는 비가 올 때 가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마침 우중이어서 잠깐 들를 요량이었는데 하늘은 갑자기 변덕을 부렸다. 그렇지만 내친 걸음이었다.

주차장은 뜨거웠다. 까만 아스팔트 바닥에서 데워진 습기가 올라와 숨이 막혔다. 땀을 닦을 두툼한 수건을 따로 챙겼다. 곧 무용지물이 될 것을 모르고.

‘뻣뻣한 대나무도 하늘을 가릴 수 있구나.’ 소쇄원(전남 담양군 남면 지곡리) 방문은 굵은 파이프를 촘촘히 박아놓은 듯한, 대숲에 대한 감탄으로 시작됐다. 대숲에는 두 개의 길이 나 있다. 사람이 다니는 길과 물이 다니는 길. 방금 전의 엄청난 빗줄기 때문인지 사람 가는 길은 나 혼자고, 물길은 우당탕탕 아우성쳤다.

소쇄원은 조선의 학자 소쇄 양산보(瀟灑 梁山甫·1503~1557)가 지은 민간정원이다. 당시에 이런 정원이 얼마나 많았는지 짐작하기 힘들지만 이곳은 우리나라 최고의 별서정원(別墅庭園) 또는 원림(園林)으로 꼽힌다.

별서란 선비들이 세속을 떠나 은거생활을 하기 위해 마련한 공간으로 살림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지었다. 상주하는 주택이 아니어서 간소하다.

소쇄란 ‘맑고 깨끗하다’는 뜻. 대사헌까지 지낸 양산보는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정치의 혼탁함을 뒤로 하고 고향에 내려와 이곳에서 학문에만 정진했다. 당시는 건물이 한채에 불과했다. 양산보 말년에 두 아들이 일대 최고의 별서정원으로 완성했고 임진왜란에 소실됐던 것을 손자인 천운이 재건했다.

이곳은 그의 성격처럼 맑고 깨끗하고 안락하기까지 하다. 결코 화려하지 않다. 그저 학자의 정원일 뿐이다. 아무 생각없이 돌아본다면 10분이면 족하다. 그러나 곳곳에서 발길을 잡는다. 적절하게 놓여진 그늘 집(堂), 깊은 계곡을 축소해 옮겨놓은 듯한 앞 뜰의 폭포, 하늘을 향한 대나무숲…. 그래서 이곳을 제대로 감상하는 방법은 곳곳에서 ‘머무는 것’이다. 하늘을 가린 대숲에서 발길을 멈추고, 나무 그늘에서 한숨을 돌린다. 지붕이 있는 집이 있다면 마음대로 누워서 땀을 식혀도 좋다.

1만여 평의 규모였지만 지금은 1,350평 정도로 줄어들었고 10여동의 건물 중 제월당과 광풍각만 남아있다. 가장 높은 곳에서 정원을 바라보고 있는 제월당은 간결한 우리 건축양식을 축약적으로 보여주는 곳. 아궁이 위로 벽을 시커멓게 그을린 불자취도 정겹다.

건축가 고 김수근씨는 세상을 떠나기 전 열흘간 제월당의 마루에 앉아 생을 정리했다. 일가를 이룬 노 건축가의 영혼은 소쇄원의 정기와 어떤 교감을 했을까.

‘빛과 바람을 맞는 집’ 광풍각 앞에는 작은 폭포가 있다. 사람이 만든 폭포지만 자연의 이치를 거스름 없이 자연스럽다. 비로 불어난 물이 시원스럽게 떨어지고 그 물소리에 맞춰 바람이 분다. 더운 수증기를 머금은, 숨막히는 바람이 아니라 아무 것도 섞이지 않은 맑고 서늘한 바람이다. 얼마를 앉아있었을까. 땀은 커녕 온몸이 보송보송하다. 근심걱정도 모두 날아가 버렸다.

소쇄원은 입장료를 받지 않는다. 아직도 양산보의 후손이 관리하는데 “우리 집을 찾은 손님에게 어떻게 돈을 받느냐?”고 반문한다. 유쾌해진다.

다시 대숲을 통해 나가는 길. 누군가 이곳에 대해 물으면 대답해야지. “그곳에는 비가 갠 직후에 가는 것이 좋다.”

권오현 생활과학부 차장 koh@hk.co.kr

입력시간 2000/08/03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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