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하강 시작했나 안했다

2차 경기논쟁, 정부측 "아직 상승국면"주장에 일부선 "큰소리"

경기가 천정을 치고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는지, 아니면 계속 상승추세에 있는지를 놓고 정부와 국책, 민간 연구기관 사이의 논쟁이 뜨겁다.

지난해 여름 경기과열론에 이은 제2차 경기논쟁이 한여름 폭염만큼이나 후끈 달아오르고 있다. 차이가 있다면 지난해 경기논쟁은 과열 여부를 놓고 의견이 엇갈렸던 반면 이번에는 경기가 식었느냐의 여부를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논쟁의 발단은 국책연구기관인 한국개발연구원(KDI)이 지난 7월13일 ‘하반기 경제전망 보고서’를 내면서 시작됐다. KDI는 보고서에서 “경기정점은 하반기가 아니라 지난 1분기였을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KDI의 보고서는 “경기논쟁은 내년에 가서나 논의해보자”고 느긋해하던 정부 입장에 정면으로 반기를 든 것이어서 주목을 끌었다.

KDI의 보고서에 대해 정부는 내심 당혹감과 불쾌감을 느꼈음에도 “실무적인 책임이 없는 연구기관으로서 할 수 있는 수준의 지적”이라고만 했을 뿐 즉각적인 대응은 자제했다.

그러나 한동안 침묵을 지켜온 정부가 7월말 정부기관인 통계청을 앞세워 반격에 나서면서 싱겁게 끝나는가 싶던 경기논쟁에 본격적인 불을 지폈다. 통계청은 6월중 산업활동동향을 발표하면서 “경기정점이 지났다는 일부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며 연말 안에 정점이 올 것으로 보지 않는다”고 밝혀 KDI의 경기정점론을 정면 부인했다.


KDI "이미 하강국면 가능성"

경제상황은 동일한데도 경기에 대한 진단이 이처럼 서로 달라 경제 주체들은 누구의 말이 진실인지 몰라 혼란에 빠져있다. 경기논쟁이 중요한 것은 현 경기상황을 어떻게 진단하느냐에 따라 정책의 목표가 180도 달라질 수 있고 기업의 입장에서는 설비투자 등 전체적인 경영의 틀을 다시 짜야하는 등 그 파장이 적지않기 때문이다.

KDI의 김준일 연구위원은 1분기 경기정점론의 근거로 산업생산증가율을 꼽았다. 그는 “4월중 산업생산증가율이 1999년 2월이후 가장 낮았던 데다 5월도 실제로는 4월 증가율보다 더 하락하는 등 산업생산이 크게 둔화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도소매 판매와 내구소비재 출하 등 소비동향지표들은 물론이고 설비투자 증가율도 4월이후 뚜렷한 둔화추세를 보이고 있는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는 것이다. 김 위원은 “금융과 기업부문의 부실이 조속히 제거되지 않아 실물경제의 위축을 가져오고 경기상승 국면이 단축되는 결과를 초래할 경우 1·4분기가 경기정점으로 판명될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통계청 박화수 경제통계국장은 “전문가들의 의견을 종합할 때 지금은 소순환기로 본다”면서 “경기가 재상승할 가능성이 높다”고 반박했다. 그는 그 근거로 생산 소비 투자 등 실물경제지표가 상승세를 계속 유지하고 있는 점을 꼽았다.

생산은 반도체 요인과 파업, 조업일수 등 비경제적 요인을 제거할 경우 4월 14%, 5월 13.2%, 6월 11.2%로 증가율이 둔화됐지만 호경기 때의 8∼9%보다는 여전히 높다는 것이다. 또 과거 경기수축기에 생산증가율은 1∼2%에 불과했다는 것이 박 국장의 설명이다.

소비를 나타내는 도소매 판매 증가율도 5월 14.7%에서 6월 11.1%로 크게 낮아졌으나 과거 경기상승기의 10% 내외에 비교하면 그리 낮은 편이 아니라는 것이다. 박 국장은 “6월중 선행지수 하락폭이 줄어들고 동행지수가 상승한 점으로 미뤄 연말 안에 경기정점이 올 것으로는 보지 않는다”고 말해 정부의 입장에 힘을 실어줬다.


한은 "연내에 경기정점 안 올 것"

한국은행도 정부의 손을 들어줬다. 전철환 한은총재은 지난 8월3일 금융통화위원회가 열린 직후 기자들과 만나 “경기정점이 이미 지났다는 주장도 있으나 세계적인 정보통신 혁명과 국산품의 경쟁력 향상 등으로 수출이 높은 신장세를 지속하고 소비와 설비투자도 늘고 있음을 볼 때 연내에 경기정점이 오지는 않을 것 같다”고 전망했다.

대부분의 민간 연구기관과 전문가도 경기가 이미 정점을 지났다는 KDI의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그 시기가 내년이 될 것이라는 정부 주장은 너무 낙관적이라는 견해를 나타내고 있다.

현대경제연구원은 “경기선행지수로 보면 하반기중 경기가 정점을 기록하고 하강국면이 시작될 것으로 보인다”고 밝혀 연말쯤 경기정점이 올 것으로 점쳤다.

금융연구원은 “현재의 경기수준을 나타내는 동행지수가 최근 몇달새 정체되고 있는 점에 비춰 경기정점이 근접한 것 같다”고 조심스럽게 3분기 경기정점론을 전망했다.

우리 경제는 1970년대 이후 모두 6차례의 경기순환을 경험했다. 제1순환기(1972년 3월∼1975년 6월)와 제2순환기(1975년 6월∼1980년 9월)의 경기변동은 오일쇼크라는 외부충격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제3순환기(1980년 9월∼1985년 9월)는 부진한 설비투자로 막을 내렸고 사상최대 호황을 구가했던 제4순환기(1985년 9월∼1989년7월)는 흑자관리 실패로 고물가의 후유증을 남겼다. 제5순환기(1989년 7월∼1993년 1월)는 건설경기가 침체되면서 급속히 꺼졌고 제6순환기(1993년 1월∼1998년 8월)는 과잉설비투자로 외환위기라는 비극적 최후를 맞았다.


구조조정·금융시스템 복원이 부담

외환위기 이후 현재 진행중인 제7순환기는 위기관리체제라는 특수성과 정보기술(IT)혁명에 따른 신경제적 요소 등이 어우러져 정점 예측이 어렵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다.

하지만 기업 및 금융구조조정 추진, 금융시장 안정, 물가안정 노력 여부 등에 따라 정점도달 시기는 앞당겨지거나 늦춰질 수 있다는 지적이다. 특히 구조조정의 마무리와 금융시스템 복원은 최우선적으로 해결해야할 과제로 꼽히고 있다.

이 과제를 해결하지 못한 상황에서 경기가 하강국면으로 돌아서면 우리 경제는 또한번 급속한 침체로 빠져들 것으로 우려되고 있다.

물가안정의 기조를 유지하는 것도 중요하다. 전철환 한은총재는 “7월에 공공요금 인상과 농축수산물 가격상승이 있은데다 앞으로도 임금상승, 공공요금 인상, 국제원자재 가격상승 등 물가상승 요인이 잠재해 있어 총수요 관리의 필요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갑작스런 외부충격에 대해서도 대비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최대 수출시장인 미국 경기가 하강조짐을 보이고 있고 국제유가도 연초 이후 계속 불안한 조짐을 보이고 있어 안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유가의 경우 국제수지와 물가에 직접적인 타격을 줘 범정부 차원에서 에너지 절약운동을 벌어야할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사실 경기정점은 2년 정도가 지나야 확실히 알 수 있어 지금 경기논쟁은 어느 쪽이 맞는지 진위를 가리기가 쉽지않다. 다만 경기에 대한 판단은 기업이나 개인이 투자를 결정하거나 정부가 경제정책을 수립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지나친 비관이나 낙관은 금물이다.

정부도 무조건 “경기정점은 내년에나 얘기해보자”는 식으로 안이하게 대처하기 보다는 올 하반기 경제운용의 우선과제로 구조조정의 마무리와 경기연착륙 방안을 제시하는데 이어 추가적인 정책대응의 필요성을 꼼꼼히 점검해야할 것으로 보인다.

최준영 문화일보 경제산업과학부 기자

입력시간 2000/08/09 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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