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일본(24)] 세키가하라(關ケ原)

기독교의 영향력이 미미한 일본에서 2000년은 새로운 천년의 시작이라는 의미를 찾기는 어렵다. 대신 20세기의 마지막 해이며 21세기로 넘어가는 전환점이라는 의미는 강하다.

일본 사회의 분위기를 정확히 짚는 것으로 유명한 NHK의 주말 대하드라마가 올들어 ‘아오이(葵)-도쿠가와(德川) 3대’를 내보내고 있는 것도 세기의 전환점을 맞아 일본사를 되돌아보려는 뜻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와 히데타다(秀忠)·이에미쓰(家光) 등 에도(江戶) 바쿠후(幕府)의 1~3대 쇼군(將軍)을 조명하고 있다. ‘아오이’는 도쿠가와 가문의 문장(紋章)인 접시꽃이다.

세 사람은 도쿠가와 가문을 일본 최고의 명문가로 끌어올린 것은 물론 에도시대의 기초를 닦았다. 역사상 가장 오랜 전란기인 센코쿠(戰國)시대와는 정반대로 에도시대는 가장 오랜 평화와 번영의 시기였다. 농업 생산이 비약적으로 늘었고 수공업과 상업이 발달, 자본주의의 토양이 마련됐다. 문화·예술의 발전도 눈부셨다.

이런 새로운 시대로 넘어가는 전환점이 1600년 9월15일의 세키가하라(關ケ原) 전투였다.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사후 천하의 주인을 가리는 이 싸움에서 이에야스의 동군(東軍)은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가 이끈 서군을 격파했다.

이에야스는 여세를 몰아 히데요시의 아들 히데노리(秀賴)의 본거지인 오사카(大坂·현 大阪)성을 공격, 1615년 마침내 오사카성을 함락시키고 일본 천하를 장악했다.

그러니 세키가하라 전투 400주년을 맞아 NHK의 대하드라마는 침략과 식민지 지배, 전쟁과 패배, 경제 부흥과 통상 전쟁, 거품 경제의 붕괴와 경제 침체 등 20세기의 혼란을 매듭하고 번영과 평화의 21세기를 맞으려는 기원을 담았다고 볼 수 있다.

세키가하라는 기후(岐阜)현 남서쪽 끝인 후와(不破)군에 있는 들판이다. 이부키(伊吹)산지와 스즈카(鈴鹿)산맥으로 둘러싸인 분지다. 예로부터 교통·군사 요충지로 유명했고 794년에 일본 3대 세키(關)의 하나인 ‘후와노세키’(不破關)가 설치됐던 곳이다.

‘세키’란 중국의 옥문관(玉門關)과 마찬가지로 국경 검문소, 또는 경비 초소에 해당한다. 옥문관을 기준으로 중국의 관내·관외가 갈렸듯 일본의 간토(關東)·간사이(關西) 지방을 가르는 기준점이 바로 후와노세키, 나중의 세키가하라였다.

일본의 역사는 이곳에서 두번이나 바뀌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 앞서 672년 ‘진신(壬申)의 난(亂)’은 고대 일본의 모습을 바꾸었다. 이 궁정 쿠데타에 의한 정권 교체 이후 일본이 고대국가의 면모를 갖춰가기 시작했다. 또 그동안의 반신라 정책을 크게 후퇴시키는 등 많은 수수께끼를 남긴 사건이기도 했다.

전후 일본의 국민적 스승으로 존경받은 역사 소설가 시바 료타로(司馬遙太郞)는 세키가하라 전투가 규모나 그 영향에서 워털루 전쟁에 못지않다고 지적했다. 승패의 영향은 다이묘(大名)로부터 학쇼(百姓·농민)에 이르기까지 일본 사회 곳곳에 미쳤고 이후 엄격하게 정착된 봉건제는 동양사에서 일본사의 특수성을 규정했다는 등의 이유에서다.

그러나 세키가하라 전투는 간토지방이 일본 역사의 중심 무대에 등장하는 기점이라는 점에서 보다 중요한 의미를 띤다. 후와노세키가 설치될 당시만 해도 일본의 통치권은 간토지방에는 미치지 못했다.

바쿠후의 최고통치자인 쇼군이라는 호칭은 애초에 간토지방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한 정벌군의 대장인 ‘세이이다이쇼군’(征夷大將軍)에서 나왔다. ‘오랑캐를 정벌한다’는 칭호에서 보듯 간토지방의 대부분은 오랫동안 오랑캐의 땅으로 여겨졌다.

간토 무사들이 가마쿠라(鎌倉) 막부를 열었던 짧은 시기를 제외하고 일본의 역사는 나라(奈良)·교토(京都)·오사카를 잇는 기나이(畿內)지방과 그 주변의 긴키(近畿)지방, 규슈(九州)지방, 규슈와 기나이의 중간에 위치한 추고쿠(中國)지방, 시코쿠(四國)지방에 한정됐다.

이에야스가 에도에 바쿠후를 열고서야 비로소 간토지방이 역사의 중심 무대가 됐다. 도호쿠(東北)지방에까지 통치권이 미친 것은 훨씬 나중이었음은 물론이다. 홋카이도(北海道)의 경우에는 15세기에 군사용 요새를 설치하는 등 적극적인 편입 노력에도 불구하고 본격적 개척이 시작된 것은 메이지(明治)유신 이후의 일이었으니 영토 지리적 면에서 일본의 역사는 극히 짧다고 할 수 있다.

지금도 간토와 간사이 지방은 언어와 생활 습관, 사람의 성격이 많이 다르고 도쿄와 오사카를 축으로 한 서로의 경쟁도 치열하다. 그것이 세키가하라 전투를 연상시킬 만한 정치 대결로 치닫지 않는 것은 의원내각제에 힘입은 바 크다.



황영식 도쿄특파원

입력시간 2000/09/06 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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