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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탐구] '승부사의 귀재' 차민수

천당과 지옥 오간 프로의 삶

“나이 오십에도 옷을 이렇게 입고 다닙니다. 제가 아직도 철이 없어서요. 하하하.” 간편한 흰 셔츠에 바지차림. 모자는 끈질기게 눌러쓰고 있다.

그리고는 털털한 삼촌처럼 웃는다. 그리 크다할 수 없는 눈이 반짝거린다. 내미는 명함엔 `한국기원 전문기사 차민수'라고 씌어있다. 뒤집으면 `지미 민수 차'라는 미국 이름과 그의 캘리포니아 집 주소가 적혀있다. 어딜 봐도 백만장자란 표시가 없다. 바둑은 물론 포커의 고수란 표시도 없다.

미국 국적을 가진 재미교포로 한국에 방문하는 것이 일년에 너댓번. 길어야 한달 정도 머무는 일정에도 바쁜 일 때문에 바둑돌 한번 잡아보기 힘들다지만, 꺼내는 질문마다 죄다 바둑얘기로 호환해 비유를 든다.

따로 물어보지 않으면 서울에서 운영하는 사업체 얘기도 뒷전. 본업이 무엇이든 마음은 바둑에 붙들려있는 사람이다.

“바둑으로 치면 승부에 강한 기재가 따로 있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바둑에서 말하는 `절에 간 색시'는 이런 쪽에 맞지 않습니다. 즉 상대가 찌르면 찌르는 대로 피하면서 상대가 하자는 대로 끌려가는 사람보다는 차라리 실력은 약해도 상대가 강하게 공격하면 할수록 뭔가 발끈해서 되치고 나오는 그런 사람이 승부 쪽에선 근성이 있는거지요."


한국선 프로바둑기사, 미국선 프로갬블러

그럼 고수는 철옹성인가?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바둑이든 포커든 고수에겐 공통적으로 천재성이 있습니다. IQ만 해도 거의 만점에 가까운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만큼 천재이기 때문에 약점도 있습니다. 자기가 아는 정석 외엔 다른 수를 모른다는 겁니다.

정면에선 누구도 못 따르지만 조금만 엉뚱하거나 의외적인 공격을 받으면 혼란스러워합니다. 저는 그같은 천재가 못되기 때문에 대신 헛점을 노리는 겁니다. 어쨌든 이겨야되니까. 특히 어려운 상황이 왔을 때도 남보다 흔들리지 않고 위기를 잘 참아낸다는 점에선 강한 편입니다.”

천재를 습격하는 천재, 차민수. 한국에선 프로바둑기사(4단)로, 미국에선 세계 최고의 포커고수들을 누르는 승률 최고, 소득 최고의 탑 플레이어로 영웅대접을 받는 프로갬블러다. 한마디로 승부의 귀재다.

바둑만 해도 그를 둘러싼 전설이 많다. 지난 1989년 제2회 후지쯔배 선수권전에서 미국 대표로 출전, 4단의 실력으로 일본의 기라성같은 9단을 단숨에 연파하는가 하면 거의 확정적 완승세에서 납득하기 어려운 패퇴로 물러난 조훈현과의 수수께끼같은 일전은 아직도 화제다.

또 이듬해 같은 대회에서 일본의 최강자 조치훈을 격파, 바둑계를 또한번 술렁거리게 만든 주인공. 대학생 바둑대회 이후 14년만에 출전한 대회에서 보여준 신화같은 얘기다.

도박문화가 정착된 미국 카지노업계에선 더 이름이 높다. 1995년 세계 최강의 승부사만 모이는 세계 포커선수권전 리미트 홀덤 부문에서 랭킹 1위를 차지, 24시간만에 3억-4억원을 벌어들인 적이 있는가 하면, 몇해째 연수입 100만 달러 이상을 기록하는, 말 그대로 `백만장자'. 하지만 도박쪽의 화제엔 영 시들해하는 표정은 왜일까.

“솔직히 프로갬블러로서의 직업은 그저 생활때문에 하는 것이지 옛날같은 승부의 쾌감은 잃어버린지 오래됐습니다. 언제부터 이상하게도 프로가 되면서부터 오히려 재미가 없더라구요. 하지만 가면 갈수록 끌리는 건 바둑입니다.

제가 정말 사랑하고, 앞으로도 평생을 두고 관여할 곳도 이곳입니다. 미국에서도 정 바둑생각이 나면 간간이 인터넷에 들어가 두기도 합니다. 일에 묶이다보니 정식대회에 나가본지도 꽤 오래 지났지만 대신 바둑인을 위해서 뒤에서 할 수 있는 역할도 있고, 언젠가 공부를 한 다음에 승단도 해야지요. 조금씩 그러나 오래 즐길겁니다.”

서울 영등포에서도 소문난 부잣집 막내아들로 태어나 바닥에서 천장까지 추락과 비상을 고루 경험한 차씨. 그의 삶 또한 난투일색이었다.


어릴때부터 유별났던 승부근성

IQ 144. 유별난 승부근성은 어릴때부터 조짐이 있었다. 다섯 살 무렵 자전거만 탔다하면 일부러 비탈길만 골라 달리며 쓰레기통이나 담벼락, 전신주를 들이박는 것으로 피날레를 즐겼다. 길을 지나다가도 아찔한 사다리만 보면 무조건 올라가고 보는, 도무지 겁이 없던 아이. 일하던 인부들과 가족이 질겁을 했다.

6.25전쟁통에 4남매중 유복자로 태어나긴 했지만 타이프 학원과 책방, 하숙업 등 타고난 생활력과 이재로 재산을 일으킨 동덕고녀 출신의 어머니 덕에 집안은 내내 부유했다.

여섯 살때 외삼촌댁에 놀러가 우연히 외사촌형으로부터 배운 것이 바둑. 며칠째 바둑판만 끼고 살며 집으로 돌아오지 않던 아들은 “바둑교습을 받게 해주겠다”는 어머니의 다짐을 받고서야 어머니를 뒤따랐다.

교습 5개월만에 7급이 된 유치원생, 그러나 피아노와 당수, 바이올린 과외등 빽빽한 일정 속에서 어머니에 의해 반강제로 그만뒀던 바둑은 용산고 입학시험에 실패하던 해, 우연히 기원을 찾게 되면서 다시 시작됐다.

당시 성남기원의 최강자 이원식과 여드름쟁이 소년 서봉수와의 만남도 그렇게 이루어졌다.

특히 처음엔 호선으로 두던 서봉수는 무서운 속도로 괄목상대, 2주만에 그를 추월하더니 얼마 뒤 `동양3국 고교생 바둑대회 한국 대표'로 등장할만큼 무섭게 튀어오르는 후배였다.

유난히 많은 예체능 과외일정 속에서 짬짬이 두는 바둑으론 추월자들을 마냥 두고볼 수 밖에 없었다. 약이 올랐다. 당시 프로입단 후보 1위로 주목받던 이원식을 이기겠다며 젊은 사범 한태훈으로부터 정식지도를 받기 시작했다.

포커를 처음 접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모처럼 기원이 한산하던 어느날 본의아니게 주윗 사람이 벌인 포커판에 휩쓸렸다. 난생 처음 뛰어든 포커게임, 자리에서 일어날 땐 동전 하나 없이 다 잃은 뒤였다. 그러나 가슴이 뛰었다. 뭣보다 게임 그 자체가 주는 팽팽한 긴장의 자극이 묘한 충만감을 던져주었다.

훗날 그의 첫 아내가 된 한 여학생과 고교시절 연애사건으로 집안을 발칵 뒤집어놓았던 차씨. 대학교 2학년이었던 1971년엔 전국 대학바둑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하는 등 약진을 계속했지만 21세때 결혼한 얼마 뒤 다시 관심은 포커쪽에 쏠리기 시작했다. 그의 남다른 승부벽은 예전부터 소문이 나있었지만 특히 포커판의 차씨는 무모하리만치 과감한 베팅과 속도감 빠른 `속사권총형'으로 상대를 질리게 만들 정도였다.

그러다 군에 입대, 공군본부 PX 근무중엔 거의 매일 장교들의 바둑상대로 앉는 것이 일과였다. 수원에서 전출온 공군상병 조훈현 6단과 만난 것도 이곳. 100판 이상 조훈현과 대국하는 사이 일취월장하는 호기도 얻었다.


미국으로의 `강제이민', 프로도박사 입문

그러나 그뿐이었다. 한때 아내로부터 외도의 의심까지 받아가며 경영을 위임받은 사업체도 내팽개친 채 포커에 빠져든 그를 어머니는 제대후 얼마 뒤 미국으로 내쫓다시피 강제로 이민을 보냈다.

1975년 세살배기 아들과 생후 백일도 채 지나지 않은 딸, 그리고 아내와 낯선 미국땅에 도착한 25세의 가장. 최소한의 정착비용 외에 어머니로부터의 원조는 전혀 없었다. 가자마자 시간당 2달러50센트 벌이의 주유소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아내가 벌어오는 피아노 교습비 월 50달러를 보태 근근히 생활을 꾸렸다.

한때 옷가게 점원으로도 근무, 착실한 생활 끝에 자신의 옷가게도 가졌다. 하지만 곧이어 닥친 오일파동과 불황의 여파는 그를 다시금 기원으로, 카지노로 향하게 만들었다.

LA 나성기원에서 알게 된 한 교포의 제의로 기분전환 삼아 처음 가본 라스베이거스 카지노. 첫 게임 5분만에 30달러를 쥐었다. 주유소에서 하루꼬박 일하면 20달러. 그후 카지노에 머무는 시간이 점점 길어졌다. 오일파동이 끝나고 옷가게가 원상회복된 뒤에도 차씨는 그 자리 그대로였다.

한국 사회와는 달리 프로골퍼나 프로야구선수처럼 프로도박사도 수입과 비례한 세금을 내며 엄연한 직업으로 인정받는 곳이 미국.

자신을 찾아온 캘리포니아주립대 포커학과 치프 존슨 교수는 그에게 빅 플레이어로서의 이론적 기반까지 전수해주었다. 낯선 용어들로 읽기도 어려운 수많은 영어이론서를 공부해가며 통계학과 확률론, 승부사의 자세나 덕목등을 철저히 배웠다.

높은 승률과 함께 벤츠와 고급주택 등 갈수록 재산은 불었지만 대가는 너무도 엄청났다. 건강은 망가지고, 가정은 무너졌다. 좀처럼 집에 돌아오지 않는 남편에 대한 부인의 원망과 고통은 더이상 회복하기 어려운 지경까지 이르렀고 결연히 가정 속으로 돌아와 하루 3시간씩 자며 잡화점 운영에만 전력을 쏟아붓던 차씨의 뒤늦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12년의 결혼생활은 이혼으로 마감되고 말았다.

어느날 자고 일어나보니 머리맡에 놓여있던 이혼통지서. 며칠 뒤 집으로 돌아와 문을 열려고보니 열쇠가 맞지 않았다. 아내가 그 사이 자물쇠를 바꿔버린 것이었다. 아직도 잊지못하는, 가장 고통스러운 기억이다.


모든것 잃고 귀국 ·방황, 다시 미국땅으로

갖고 있던 재산도, 자녀도 모두 아내에게 준 채 빈털터리가 되었다. 비행기삯도 주위의 도움으로 간신히 마련, 서울로 돌아왔지만 어머니는 그를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대문에 들어서기도 전, 운전사를 시켜 가방을 내던지며 문을 닫아걸었다. “이미 장성해서 떠난 자식, 당장 돌아가 네 재산을 찾아 살라"는 호통만 되돌아왔다.

갈 곳은 아무데도 없었다. 아는 사람으로부터 빼앗다시피 빌린 돈으로 여관방에 틀어박힌 채 죽음만 생각했다. 하루 한끼도 먹기 어려운 거식증까지 겹쳐 몸은 갈수록 말라들어갔다.

한차례의 정신병원 강제입원 소동까지 겪은 뒤 그는 어머니와의 절연을 선언하며 외톨이로 미국땅을 되밟았다.

“아, 살다보니 내가 이렇게도 되는구나, 말할수 없이 비참했습니다. 주머니에 든 돈이라곤 단 18달러, 하지만 경제적인 문제보다 더 견디기 어려운 고통은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라든가 이젠 세상에 나혼자 뿐이라는 외로움 그런 거였어요. 정말 힘들었습니다.”

기어이 재기하겠다는 독한 다짐으로 주위의 배려도 거절, 추위가 몰려든 11월까지 몇달동안 길거리에 세워둔 낡은 차 안에서 잠을 자며 살았다. 기본목표 5,000 달러. 작은 노점이라도 시작할 자금이었다.

몇달간 내기바둑으로 모은 돈으로 다시 베팅에 들어갔다. 잠시동안 잠들었던 승부사의 실력은 이내 발휘됐고 연봉 30만 달러의 월급쟁이 프로갬블러로 안정을 찾은 뒤 몇해 전부턴 독립적으로 활동, 39승 1패, 63승 2패, 244?승 1패 등 해마다 평균 승률만 9할대에 이르는 기록 퍼레이드를 벌이며 오늘까지 최고의 주가를 올리고 있다.


엄청난 대가 치뤄야 하는 프로도박사

“하지만 이런 얘기만 듣고 막연한 일확천금의 꿈으로 달려들지도 모를 젊은이들에게 진심으로 꼭 전하고 싶은 조언이 있다면 `프로갬블러가 되지 말라'는 겁니다. 너무도 많은 대가와 어려움이 따르는, 힘든 일이기 때문입니다.

저도 만약 지난날 이혼과 같은 상황까지 가지 않았더라면 절대 이 길로 오지 않았을겁니다. 인생에는 돈보다 더 소중한 것이 많습니다. 어려운 일을 참고 견디는 것 만큼이나 그만둬야할 지점에서 그만둘 수 있는 결단력도 인생에서 이기는 법입니다.”

재혼후 뒤늦게 네살배기 늦둥이 아들도 얻은 차씨. 남몰래 눈물을 흘려왔던 어머니와도 몇년전 화해, 이제는 오히려 미더운 아들로 남다른 `총애'를 받고 있다. 그에게 이제 남은 승부는 무엇일까? 바둑?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사업? 수입의 30-40%를 장학금 등 청소년을 위해 쓰고 있는 그는 어쨌거나 돈쓰는 법에도 고수.

정영주 자유기고가 mar10@cholian.net

김명원 사진부 기자 kmx@hk.co.kr

입력시간 2000/10/12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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