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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찻그릇 역사기행(27)] 웅천(下)

앙상레짐에서 피어난 웅천 찻그릇

일본의 역사에 있어서 중세, 소위 무로마치(室町時代 1336-1573)시대 오오닌 분메이의 난(應仁文明 亂 1467-1477)이 가지는 의미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가히 혁명적이라 할 수 있다.

정치적으로는 구질서가 무너지고 새로운 하층무사 계급들이 대두하고 사회적으로도 커다란 계급 변동을 겪게 되었다. 이것은 서양에서 말하는 `앙상레짐'적인 것이 아니라 개혁의 `뉴시스템'으로 가는, 어떤 의미에서는 일본 근대화의 시발점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일본의 역사소설가 `시바요타로(司馬遼太郞)'는 오오닌의 난을 새로운 일본 탄생의 시발점이라고 하였다. 일본열도를 하나의 거대한 도가니로 본다면 이 시대만큼 그 내부가 물 끓듯이 격렬하게 끓어오른 적도 없었다.

대외적으로는 중국, 조선은 물론 포르투칼을 비롯한 서양제국들과 교류가 빈번하여서 선진문화를 받아들였고, 곁들여 상인들이 활발한 교역을 통해 경제적인 질서가 재편된 동시에 도시 상인들은 막대한 상업자본을 축적하게 되었다.

이처럼 중세 일본의 역사는 대외적인 교류를 통하여 일본내에 오랫동안 존재하고 있었던 이질적인 제 요소들을 통합시켜 새롭고 독창적이며 일본정서에 맞는 문화를 창조하여 중세 문화의 황금시대를 열게 되었다. 중세 일본문화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다회(茶會)를 비롯한 노(能), 가부끼 등 많은 예술과 생활문화가 이 시대에 성립되었다.

이러한 문화들은 오늘날까지 일본의 전통문화 내지 민족문화로서 굳건히 뿌리를 내려 세계속에 일본문화의 특성을 크게 선양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에 현존하는 조선 찻그릇들은 당시 조선 가마터의 지명이나 찻그릇을 수출한 출항지의 지명에서 유래된 것이 대부분이다. 예를 들면 "이토―새미골", "긴카이―김해", "고모카이― 웅천" 등이다.

16세기 일본 불세출의 다장(茶匠) 센노리큐(天利休)가 진중(珍重)한 고모카이 찻그릇은 당시 일본과의 교역 항구였던 웅천 지명에서 유래된 것이다. 진해에서 동쪽으로 가다 웅천을 지나면 웅동이 나온다. 웅동에서 다시 서북쪽으로 1.5km정도 가면 두동리 금곡마을에 도착한다.

이 마을 안 길을 따라 동쪽으로 다시 조금 올라가면 `전골못'이 있고 이 못의 북동쪽 '보배산'중턱 남향으로 조선 초기 가마터가 자리하고 있다. 이곳 가마터는 1960년대 말부터 일본의 골동상들에 의해 주목을 받았고 그 후 가마터 전체가 도굴을 당하는 수난을 겪었다.

16세기 초반의 분청사기 찻그릇과 막백자 찻그릇 도편들이 출토되고 있어 가마터의 중요성을 더해주고 있다. 특히 하동 가마터에서 발견되는 이토 찻그릇과 비슷한 도편들이 출토되고 있다. 이곳 가마터에서도 이토 찻그릇들이 굽혀졌음을 알 수가 있다.

16세기초 삼포중의 한곳인 제포항(웅천)에서 여러가지 교역품들이 일본의 하카탐?항(博多港)에 도착하게 되었는데 당시 최고의 인기품인 찻그릇들이 교역품에 포함되어 있었다. 일본상인들은 처음 보는 찻그릇이라 “어디서 가져왔느냐”고 묻자 곰가이(熊川)라고 해서 웅천 찻그릇의 이름이 붙혀진 것이다.

웅천 찻그릇의 특징은 형태가 매우 단정하고 아름다우며 입술이 바깥쪽으로 기울고 몸통은 아래쪽으로 부풀었고 아래굽이 굵고 아주 단단하다. 그릇의 안쪽이 깊은 찻그릇이다.

오오닌의 난 이후 약 1세기동안 일본국민은 끊임없이 전쟁의 참혹함속에 시달렸다. 귀족이나 평민들은 절대 무상이라는 "불교의 선"적인 정신세계를 깨달게 된 것이다.

당시 차인들은 고대광실(高臺廣室)을 외면하고 방장초옥(方丈草屋)에서 속세의 온갖 <?b>부귀영화를 초월하여 오로지 웅천 찻그릇에 담긴 차 한잔을 통하여 고단한 현실의 삶을 관조하였던 것이다.

현암 최정간 도예가

협찬 코미트신용금고 사진 양승철

입력시간 2000/10/12 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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