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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찻그릇 역사기행(29)] 부산

현해탄을 넘은 평화의 찻그릇

'기다림의 미소'라는 국화가 핀 이 가을 지금 항도 부산에서는 국제 영화제와 전국체전이 열리고 있다. 부산은 격동의 한국 현대사와 함께 많은 애환이 서린 곳이다.

6·25동란때 임시정부가 세워지고 많은 피난민들이 스쳐간 이곳은 오늘날 많은 변화를 거듭하여 시가지에는 판자집 대신 고층 빌딩이 즐비하게 들어섰고 인구도 많이 늘어났다. 그리고 21세기 팍스코리아나의 국제교역도시로 그 기능을 다하고 있다.

부산에서 피난민들의 옛 추억의 그림자가 가장 많이 남아있는 곳은 용두산 공원이다. 유명한 40계단 앞에는 당시 피난살이의 애환을 담은 노래비가 서있어 지난날의 빛 바랜 흑백영화를 보는 듯하다.

부산토박이들에게 구관(舊館)이나 고관(古館)이란 지명을 물으면 모르는 사람이 없다. 구관이란 구왜관(舊倭館), 고관은 고왜관(古倭館)의 준말이다.

지금 부산진역 앞 부산일보에서 초량으로 넘어오는 옛길과 경남여고 일대, 그 아래 KBS와 일본영사관이 있는 곳이 대략 구관의 자리이다. 신관(新館)의 자리는 오늘날 대청동길을 경계선으로 동광국민학교, 타워호텔, 부산호텔, 광복동 로얄호텔이 있는 용두산 일대를 가리킨다.

구관이나 신관은 조선시대 일본과의 교역을 할 수 있는 조선속의 일본인촌 이였다. 신숙주의 해동제국기(1471년)「동래 부산포 지도」에 의하면 부산포는 동래로부터 25리 떨어져 있고 상주(常住)일본인은 67호, 323명이었다고 한다.

부산포가 개항장으로 일본에 개방되어「왜관」이라고 불리는 영빈관이 설치된 것은 1423년이다.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지만 부산포에는 일본국왕의 사절 및 많은 외교사절들이 출입하였다.

15∼16세기의 조선과 일본과의 선린 관계가 차와 찻그릇을 포함한 「왜관문화」를 낳고 그것이 중심이 되어「부산포」란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오래된 항구도시를 탄생시켰다. 그후 부산왜관은 조선왕조와 일본사이에 경제, 문화등 많은 교류를 통해 평화의 시대를 열어갔던 것이다.

임란이후 1609년 조선왕조와 도쿠카와 바쿠사이에 국교가 회복되면서 지금의 부산역 자리에 있던 두모포(豆毛浦)에 왜관 개설을 인가한 것은 서기 1618년 광해군 10년이었다. 무역협정 당시 왜관에는 5-6백명이 상주하며 연간50척의 무역선이 출입하였다.

각종 무역품중에 도자기가 으뜸을 차지하였다. 부산에 왜관을 설치한 도쿠카와바쿠는 사신을 통해 여러 찻그릇의 견본을 그려보내 많은 종류의 찻그릇을 구워줄 것을 동래부사에게 요청하였던 것이다.

동래부사는 예조판서의 허가를 얻어 하동과 진주의 흙과 사기 장인들을 소집하여 김해에 가마터를 만들어 이들의 요청을 들어주었다. 도쿠가와바쿠는 날로 증가하는 찻그릇의 수요 때문에 1636년 사신을 다시 파견하여 부산 왜관안에 큰 규모의 가마를 만들어 줄 것을 요청하여서 조선왕조는 허가를 하였다.

이때부터 쓰시마(對馬)도주의 책임아래 본격적으로 찻그릇을 구워 도쿠가와바쿠로 보내졌던 것이다. 이때, 흙과 사기 장인들은 모두 하동과 진주에서 공급을 받았다. 1681년 (숙종7년) 일본의 화공(畵工), 도공(陶工), 조각사들이 파견되어 일본적 취향에 맞는 찻그릇을 굽게 하였다.

1685년 일본의 유명한 도공 무산(茂山)을 부산 가마터에 파견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당시 부산가마터에는 일본인 기술자들이 파견되자 조선사기장인들과 의견충돌로 싸움도 일어났고 1709년 (숙종35년) 일본인 도공 마쓰무라(松村)가 조선사기장인에 의해 맞아 죽는 등 계속 불화가 일어나자 1717년 (숙종13년) 이 곳 부산 가마터는 폐지가 되고 만다.

디자인과 모델은 일본, 흙과 기술은 조선이 담당하여 70년 동안 제작한 부산가마찻그릇들은 현해탄을 넘은 평화의 찻그릇들이 이였다.

입력시간 2000/10/24 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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