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찻그릇 역사기행(32)] 경주(中)

김동리(金東里) 생가와 남사리 가마터

"나는 오랜 옛 서울의 한 이름없는 마을에 태어나 부모형제와 이웃사람의 얼굴 그리고 하늘의 별들을 볼 적부터 죽음을 공기처럼 숨쉬게 되었다. 아침에 피는 꽃과 황혼에 지는 동산의 가을소리도 이별이 곁들여져 언제나 그처럼 슬프고 황홀했다."

한국 현대문학사의 큰 산맥인 김동리 선생의 시 '자화상'의 한 구절이다. 동리(東里)는 신라의 고도 경주가 낳은 시인이자 소설가이며 평론과 문명론까지 쓴 장르를 초월한 위대한 문호였다.

기행자가 태어나고 유년시절 사금파리 조각을 장난감 삼아 놀던 경주시 성건동 200의1에 있는 고가(古家)는 김동리 선생의 생가와 한 골목에 위치하였다.

옛 경주박물관에서 서쪽으로 실개천을 건너 김유신 장군 묘 쪽으로 가는 이 골목길은 우리나라 근대 정신문명사의 대전환점을 마련한 동학의 창도주 최수운(崔水雲) 선생과 최해월(崔海月) 선생의 초기 행적이 서려있는 유서깊은 곳이기도 하다.

기행자는 이웃의 죽마고우 이균형(명상연구가)군과 함께 신라토기 조각과 고려자기 조각을 가지고 한 사금파리 놀이는 가난한 유년시절의 코끝시린 추억이 아닐 수 없다.

일요일이 되면 기행자의 형님과 이군의 형인 이신형(강남방사선과 원장) 형님과 함께 성건동 뒷들녘 선덕여왕의 지혜가 서린 신라 고찰 영묘사지와 김동리 선생 생가 옆의 옛 삼랑사지터에서 신라와당 조각과 토기조각을 줍던 시절이 엇그제 같은데 어언간 삼십 성상이 흘러버렸다.

지금은 기행자 생가와 김동리 선생의 생가 모두 없어지고 오로지 이균형군의 집만이 고색이 창연하게 남아 지난날의 묵은 이야기들을 들려주고 있다.

영묘사지와 삼랑사지는 흔적조차 사라졌고 그 자리에는 현대식 아파트와 주택단지가 들어섰다. 동리의 소설 '무녀도'의 배경이 된 '애기청소'를 지나면 신라화랑이 차를 마시면서 수련한 '금장대'가 나온다.

1930년대 이곳에서는 신라화랑들이 돌에다 맹세한 기록인 '임신서기석'과 토기 찻그릇이 발견된 적이 있다. 신라의 대표적인 데라코타 조각가인 양지스님이 작품을 굽던 석장사 옛터를 지나 금장다리를 건너면 진덕여왕릉으로 가는 길이 나온다.

지금은 멋진 아스팔트길이지만 1960년대 초반부터 기행자의 형제에게는 남다른 정회가 서려있는 길이다.

흙먼지를 희뿌엿게 뒤집어쓰고 있는 미루나무 가로수 길을 따라 자갈밭길 20리를 걸어 오류리(五柳里) 진덕여왕릉의 둘레에 조각된 12지신상을 탁본하러 다니던 아련한 추억들.. 진덕여왕릉 초입에서 4Km 남쪽으로 가면 신라시대 와당과 전돌을 굽던 하구리 가마터가 나온다.

최근까지 양질의 흙으로 경주옹기의 전통을 이어온 곳이다.

발길을 재촉하여 6Km를 서쪽으로 달리면 동방의 예루살렘인 구미산이 시야에 들어온다. 동학의 최수운 선생이 후천개벽의 대진리를 득도한 용담정에서 청수일배를 하고 시오리 솔밭길을 넘어가면 현곡면 남사리마을이 나온다.

마을 입구에는 천년의 이끼서린 아담한 통일신라시대 석탑일기가 최근 복원되어 지나는 길손의 소원을 들어주고 있다.

개울을 따라 남쪽 골짜기로 300m 정도 올라가면 조선시대 초기 분청사기 가마터가 나온다. 이곳에서 출토되는 도편은 인화문이 상감된 고급도편들로서 간혹 '경주장흥고'란 명문이 음각된 찻그릇 도편들도 함께 출토되고 있다.

회청색을 띤 유약이 시유되었고 소성온도는 1280℃ 정도의 고화도였다. 남사리 가마터에서 영천쪽으로 4Km 정도 가면 나태리 고려청자 가마터가 나온다. 이 가마터는 통일신라의 토기제작기술을 바탕으로 11∼12세기의 고급 상감청자 찻그릇을 제작하던 곳이다.

현암 최정간 도예가

입력시간 2000/11/14 2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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