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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탐구] 국내 특수분장사 1세대 윤예령씨

"영화판에선 나보고 '피 부인' 이래요"

으, 끔찍하다. 그녀가 만들었다는 저 시체는. 내장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만신창이의 시신. 검붉은 피투성이의 다리 상처 속엔 구더기까지 드글거린다. 몇걸음 앞엔 눈을 뜬 채 목이 잘린 한 남자의 머리가 나뭇대에 대롱거린다.

엽기적인 이 모형 전시물들을 만들어낸 주인은 특수분장사 윤예령(35)씨.

이 정도면 본인조차 가끔은 소스라칠 때가 없느냐는 물음에 오히려 미소만 밝다. "전혀 아무 느낌이 없습니다. 영화촬영 땐 여관방에서 일부러 시체(모형) 바로 옆에 자기도 하는걸요."

11월 15일, 중앙대내 한 전시실에서 특수분장 소품전을 마련한 윤씨. 1992년 국내 특수분장 1세대로 출발해 영화 '은행나무침대' '쉬리' '퇴마록' '이재수의 난' '단적비연수' 등으로 이름이 알려진 베테랑이다.

특수분장은 주로 TV나 영화 등 영상매체에 쓰이는 전문분야. 동물모형에서부터 사람의 갖가지 상처와 절단 부위, 또는 괴물이나 시체, 요정, 사이보그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영역을 차지하고 있다. 쓰이는 재료는 주로 폼 라텍스와 화공약품 등.

그러나 하나부터 열까지 수작업으로 진행하는 터라 육체적으로도 고된 중노동이다. 전시장에서 선보인 시체모형만 해도 다리, 팔, 가슴의 잔털은 물론 음부까지 일일이 특수바늘로 털을 심어 만들어낸 작품이다.

'단적비연수'에서 선보인 말 모형은 몸통을 뜨는 데 1달, 갈기를 심는 데 두 세명이 24시간 철야로 교대하고도 꼬박 두달이나 걸렸다. '은행나무 침대'에 등장한 한석규의 잘려나간 머리 모형은 3주만에 완성. 단 몇초에 쓰일 소품이든 이 꼼꼼한 수작업에서 예외일 수가 없다.

더욱이 그렇게 고생해 만들고도 두 번 다시 쓰지 않는, 완벽한 1회용이다. 아무리 같은 대상이라도 관객들의 예리한 눈이 무서워 '재활용'하는 법이 없다. 매번 바꾸고 매번 같은 고생을 되풀이해야 하는 소모전이지만, 그래도 거리낄 게 없다는 윤씨.

이미 충무로에선 '피 부인'으로, '여왕벌 부대'로 통하는 일류 분장사로 자리잡았다.


특수분장 8년, 한땐 주목받던 연기자

"몸은 힘들어도 늘 재미있습니다. 항상 새로운 작품, 새로운 배우들과 만나 작업하는 것도 즐겁고, 무엇을 어떻게 만드는가에 따라 영화나 배우에 대한 인상까지 뒤바꿔놓을 수 있는 이 역할 자체도 늘 흥미진진하기만 합니다."

특수분장사로 나선지 8년. 그 전에도 영화판 자체는 그녀에게 낯선 것이 아니었다. 한때 그녀 자신이 여배우였다. 86년 영화 '연산군'으로 데뷔해 88년 '우담바라' '구로아리랑'등으로 주목을 받았던 주인공. 배우가 된 것은 우연이었다.

중앙대 연영과를 졸업하고 2년전 석사 학위를 받은 그녀는 대학 재학중 아버지를 따라 가족동반 식사모임에 나갔다가 당시 '연산군' 제작자였던 아버지의 친구로부터 즉석에서 출연제의를 받았다.

처음엔 "딱 하루만 왕비 역할을 하면 된다"는 부탁만 믿고 응했다가 결국 고정 출연 배우로 붙잡히고 말았다. 이후 한 여성주간지에 실린 그녀의 사진을 계기로 '우담바라'의 주연으로 전격 발탁됐다.

그후 '구로아리랑'에 출연하는 등 80년대 후반 연예계의 샛별로 화려한 조명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배우로서의 욕심은 처음부터 없었습니다. 지금도 배우란 참 좋은 직업이라고 생각하지만 어쨌든 제 꿈은 아니었거든요. 그땐 여배우에 대한 인식도 요즘과 많이 달랐고, 제 계획은 원래 연극ㆍ영화쪽의 공부를 더 한 뒤 교수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배우활동을 그만두는데도 전혀 어려움이 없었지요."

배우생활 3년의 상승기에 오히려 미련 없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지난 89년의 일이다. 연극관련 공부의 연장이었다. 그러나 건너간지 1년만에 계획을 전면수정해 버렸다.

TV영화 '스타트랙'의 특수분장사 길 모스코를 우연히 촬영현장에서 만나게 되면서 특수분장의 세계에 눈을 돌리게 됐던 것. 특히 학창시절 별도의 미술 개인지도까지 받을 만큼 어려서부터 미술분야에 관심이 컸던 그녀로선 더욱 마음이 끌리는 분야였다.

앞서 배우활동을 하며 보았던 국내 영화계의 허술한 분장 수준도 오히려 의욕을 자극했다. 주먹구구식의 한국과는 달리 할리우드는 놀라운 첨단 기술을 끝도 없이 선보이고 있었다.

당장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고 특수분장 전문학교에 등록했다. 잘만 하면 개척자가 될 수 있을 뿐더러 언제 누가 됐든, 누군가는 꼭 해야 할 일이었다.


"처음 영화작업 의뢰 받곤 도망가고 싶었어요"

92년 귀국했을 때에도 여전히 국내엔 특수분장사란 이름조차 낯선 불모지로 남아 있었다. 기껏해야 방송국 분장사나 소품 담당자들이 그때 그때 임시방편으로 해결해가는 상황.

그러나 전문인 1호라는 이름도 무색하게, 처음엔 맡을 일감이 많지 않아 고전했다. 약 4년 동안 주로 TV 어린이 프로그램의 요정이나 괴물 분장, 이벤트 행사의 괴물 가면, 놀이공원의 바디 페인팅 이벤트 등의 일을 하며 보냈다.

96년, 마침내 기회가 왔다. 강제규 감독의 '은행나무 침대'작업을 의뢰받은 것. 그러나 막상 제의를 받고 보니 오히려 두렵고 겁이 났다. 차라리 다음에 하겠다고 거절을 할까, 부담감에 못이겨 달아날 생각까지 들었다.

"저로선 굉장한 모험이었거든요. 성공하면 다행이지만 자칫 실패라도 하면 그걸로 끝이라는 아주 절박한 심정이었지요.

영화판의 생리라는 게 한번 실력 없는 걸로 찍히면 그날로 완전히 그 바닥에 소문이 다 퍼져서 더 이상 일거리를 맡을 수가 없습니다. 절대 두 번의 기회란 없지요. 그러니 이것으로 내가 살아남느냐, 죽느냐, 너무도 부담감이 컸습니다."

일을 맡은 뒤에는 아예 집에도 들어가지 않았다. 작업실에서 먹고 자며 오로지 일에만 매달렸다. 분장사로서의 사활이 걸린 이상, 건강은 안중에 없었다. 애쓴 만큼 좋은 신호는 곳곳에서 찾아왔다.

목 잘린 모형만해도 이미 앞서 다른 경험에서 실패했던 강감독은 아예 별 기대조차 갖지 않은 듯 했다.

그러다 윤씨가 만든 모형을 본 뒤 대단한 만족감을 표시, 신뢰를 보냈다. 극중에서 신현준의 얼굴이 변하는 장면도 윤씨가 제안한 아이디어였다. 원래는 간단한 눈썹 분장 등으로 얼버무리려던 것을 그녀가 자청해 가면을 만들고 그 가면을 활용해 스태프와 관객을 일시에 탄복하게 만들었다.

그 외에도 심장을 꺼내는 장면 등, 영원한 콤플렉스로 남을 뻔한 한국 영화에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은행나무 침대'의 성공은 곧 그녀의 이름을 영화판에 각인시켜 놓았다. 최근작인 '단적비연수'에 이르기까지 몇 편의 영화에 참여, 소위 '대박'을 터뜨린 영화마다 그 크레디트 속엔 대부분 그녀의 이름이 올라 있었다.

그 중에서도 섬세하고도 사실감 높은 작품이 그녀의 주무기. 이를 위해 수시로 법의학책이나 해부학책을 탐독하고, 역사물을 맡을 땐 반 고고학자가 되기도 하는 윤씨였다.

'단적비연수'처럼 시ㆍ공간적 배경이 애매한 상황에서도 나름의 상상력을 발휘해 감독의 머릿속에 든 이미지에 직접 옷을 입히고, 살을 붙인 것은 그녀의 몫이었다.

"사실 지금도 부단히 공부하지 않으면 도태되기 쉬운 것이 이 분야입니다. 충무로든 할리우드든 특수분장기술은 나날이 발전하는데 옛날에 써먹은 것만 믿다 보면 언제 후배에게 밀릴지, 항상 긴장할 수 밖에 없거든요.

그 때문에 아무리 바빠도 1년에 서너 번은 꼭 외국에 나가 새 기술이나, 정보, 재료들을 챙깁니다. 평소에도 새 외화나 비디오가 나올 때면 빠짐없이 보며 모니터를 하지요."


진짜 같은 '사체', 경찰 출동 대소동 벌이기도

때로는 웃지 못할 해프닝도 겪는다. 한때 경찰 60여명이 총출동해 벌인 대소동 하나.

그 코미디같은 사건의 전말은 이랬다. 안면도 신두리 바닷가에서 촬영이 있던 어느날, 다음날 작업에 대비해 주변 숲덤불속에 시체모형이 든 가방을 깊이 숨겨두고 숙소로 철수했다.

그런데 그날 새벽, 마침 일대를 지나던 낚시꾼 하나가 우연히 그 가방을 발견한 것. 열자마자 기겁하며 토하기까지 한 낚시꾼은 곧장 경찰에 신고, 순식간에 경찰 60명이 긴급 출동했다.

이른바 '변사체 발견지점' 1km 전방부터 노란 띠를 두르며 출입통제선을 설치하는 등 일대 사건이었다.

경찰 감식반원들은 반원들대로 "구더기까지 생긴 시체에서 썩은 냄새가 나지 않는 게 이상하다"며 "사람 시체다, 아니다" 논쟁까지 붙었다. 궁리 끝에 누군가 가방 속에 손을 넣어보자 시체의 피부위로 잔털이 만져졌다. 물론 윤씨가 공들여 한땀 한땀 바늘로 심은 인조털.

이를 알리 없는 경찰들은 다시 분분한 의견속에서 결국 최종확인방법으로 목 부위 절개를 시도했다. 그런데 칼을 대자마자 안에서 튀어나온 것은 엉뚱한 솜과 스폰지 등속. 나머지 상황전개는 독자들의 상상에 맡긴다.

아무튼, 다음날 아침 촬영지로 가던 중 경찰의 저지를 받고서야 겨우 사태를 알게 된 윤씨 일행은 제작부장이 경찰서에서 다음과 같은 각서와 조서를 쓰고서야 겨우 촬영지로 돌아갈 수 있었다.

"다시는 이만큼 사람과 비슷한 마네킹을 만들지 않겠습니다."

또는 멋모르고 윤씨의 작업실에 들어왔다가 즐비한 괴물과 시신 등에 경악, '마귀가 씌었다'며 한바탕 소란을 피우는 '거리의 전도사'들도 있다.

요즘도 흔히 치르는 곤욕이다. 그런가 하면 '위독한 아버지 대신 빚을 받으러 가야 하니 내게 아버지 얼굴로 가면을 만들어 달라'거나 웬 사진을 들고 나타나 '이 얼굴로 바꿔줄 수 있냐'고 물어보는 수상쩍은 의뢰자들도 많다.

물론, 이유부터가 이상할 뿐 아니라 행여 범죄에 이용될까봐 윤씨가 일언지하에 거절하는 기피대상 1호이다.

반면에 선천적인 팔, 다리 기형의 장애인이나 유방암 수술로 가슴을 잃은 여성들에겐 기꺼이 보형기구를 제작, 밝은 웃음으로 돌아가는 이들은 그녀에게도 보람이다.

오래 전부터 국방부 특수부대측의 요청으로 틈틈이 변장술 강연을 맡기도 했던 윤씨. 92년부터 문을 연 '유영분장학원'의 원장이기도 하다. 워낙 바빠 결혼도 못했다.

연애는 커녕, 지난 10년동안 설날 한번 쉬어보지 못한 지독한 일꾼이다. 성격도 털털한데다 '분장사답지 않게' 화장은 물론 매니큐어 한번 칠하는 법이 없다고 후배나 제자들에게 잔소리까지 듣고 사는 그녀는 당장 이번 전시회를 마친 뒤 한번 쉬어보는 게 현재 최고의 소망이다.

"벌써 내년 작업스케줄까지 다 찼습니다. 가능하다면 빠른 시일내 전문학교나 학원이 아닌 4년제 대학교의 정규과목으로 특수분장학과를 개설하는 게 제 꿈입니다. "

정영주 자유기고가 mar10@chollian.net

김명원 사진부 기자 kmx@hk.co.kr

입력시간 2000/11/21 2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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