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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탐구] 고고학자 이융조 교수

"땅에 미치고 유물에 빠져 산 내 인생"

"고고학은 낭만적인 학문이 아닙니다. 저만 해도 거의 미친 짓을 한 거지요." 고고학계의 별종을 만났다. 충북대 고고미술사학과 이융조(59) 교수.

땅에 미치고 유물에 미쳤다. 그가 떴다 하면 가장 고개를 젓는 것은 공무원들. 웬만하면 공무원 설득에 넘어갈 일도 이 교수와 얽혔다 하면 쉽게 넘어가는 일이 없다.

언젠가 발굴 기간을 연장해 달라는 요청에 '감사원 감사에 지적될 수 있는 사항이라 안된다'고 쐐기를 박자 직접 감사원장까지 찾아가 설득전을 편 고집불통의 외골수 학자다.

게다가 만만찮은 공적까지 있다. 이 교수는 국내외가 인정하는 구석기 전문학자. 그동안 그가 발견한 유물중 88~90%가 구석기 시대의 것이고, 그중 상당수가 국내 최초, 아시아 또는 세계 최고(最古) 등의 이름표를 달고 있다.

이미 지구상에 사라진 멸종 동물 50만년전 동굴 곰 뼈나 쌍코뿔이 뼈, 옛 코끼리 상아 등 옛 짐승 뼈를 비롯해 약 4만년전 인간의 전신 뼈, 약 1만7,000여년전 볍씨 등으로 국내외 구석기 문화사를 다시 쓰게 만든, 고고학계의 '특종 메이커'이기도 하다.


구석기문화사 다시 쓰게 만든 특종메이커

"다들 제게 '행운이 있다'고들 하지만 하느님이 제게만 따로 기회를 줄 만큼 특별히 운이 좋은 사람이라곤 생각하지 않습니다. 속으론 엄청 고생도 많았습니다. 행운 대신 말할거리가 있다면 '끝까지 물고 늘어졌다'는 것, 남들이 포기하거나 버리는 흙도 저는 끝까지 뒤지고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 그런 정도지요."

어릴 때부터 역사에 관심이 많았다. 충남 서산에서 태어난 그는 초등학교 6학년때 담임 선생님에 의해 반 친구들의 국사수업을 맡았다가 사학자가 되기로 마음을 먹었다.

아버지는 이씨가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거나 농사짓기를 바랬다. 그 뜻대로 고교 졸업후 공주사범학교를 다니기도 했다. 하지만 도저히 억울해서 꿈을 포기할 수 없었다.

고집을 세워 연세대에 진학했다. 석사와 박사과정도 모두 그곳에서 마쳤다.

대학원에 다니던 무렵, 현 단국대 석좌교수인 손보기 교수를 만나게 됐다. 지금도 주위에서 '은사인 손 교수와 어쩌면 연구 스타일이 그렇게 닮았냐'고 할 만큼 손 교수는 그에게 큰 영향을 끼친 스승. 발굴작업의 치밀함, 진지함, 성실하면서도 부드러운 성품까지 배웠다.

대학원 때 참여한 공주 석장리 구석기 유적 발굴은 몸살이 날 만큼 몹시 힘들었지만 소중한 경험이었다. 학문적인 기여도에서뿐만 아니라 그의 인생 좌표까지 수정하는 계기가 됐다.

1977년 충북대에 교수로 부임한 뒤, 청원 두루봉 동굴에서 그의 화제작 제1탄이 터졌다. 신체 일부만이 아닌 완전한 전신 인간 뼈를 발굴해내기는 그가 처음. 발견 자체도 화제였지만, 한걸음 더 나아가 다른 학과 교수들의 도움까지 얻어 청동상으로 입체 복원해 더욱 주목을 받았다. 첫 발견은 한창 공사가 진행중이던 광산에서 이뤄졌다.

'문화국민'을 부르짖는 요즘도 건설업자가 문화유적을 훼손하는 마구잡이 공사를 밀어붙이는 판에, 80년대 초는 더 더욱 문화재 발굴에 대한 개념이 희박할 때였다. 수시로 공사판을 드나들며 미리 인부들과 친해두었다.

"당신들이 도와주면 사람 뼈가 나올 것도 같다. 협조만 해주면 돼지라도 한 마리 잡아 꼭 보답하겠다"고 말끝마다 부탁해두었다. 그러기를 몇 년. 과연 그가 바라는 것이 나올지 어떨지, 설사 인부들이 발견한다 하더라도 자신에게 알려줄지 어떨지는 전혀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유물발견과 함께 발굴작업이 본격화하면 당장 그들의 생업인 공사가 중단되면서 인부들 자신에게 손해가 갈 것이기 때문. 절대 공사 자체를 막지 않겠다고 약속까지 했지만 마음이 불안했다.

"그런데 어느날 밤 현장소장에게서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알려줄까 말까 보름동안 혼자 고민하다가 차마 숨길 수는 없어 말을 하는 거라며 얼마 전 작업중에 사람 치아 같은 것이 나왔다고 하더군요. 알고 보니 그 부인이 알려주지 말자고 반대하는 것까지 무릅쓰고 제게 전화를 한 것이었습니다."


집념과 고집으로 똘똘 뭉친 고고학자

전화를 받자마자 댓바람에 바로 현장으로 내달렸다. 발견된 치아는 한 인부가 포크레인 작업중 우연히 발견한 것. 보자마자 "아, 이거다!"싶었다. 문제는 나머지 유골을 마저 찾아내는 일. 그러나 소장이 가리키는 흙더미를 보니 앞이 캄캄했다.

태산처럼 높이 쌓인, 엄청난 양의 흙이었다. 다음날부터 대학생, 대학원생 등 발굴대원 40여명을 이끌고 온 이 교수의 손엔 밀가루 등을 거르는 도구 '체'가 들려있었다. 체 질로 흙 속을 샅샅이 뒤져보겠다는, 남들은 알면서도 피해가는 배짱 좋은 무리수였다.

품도 많이 들 뿐더러 시간도 더디고, 부대 인건비도 많이 드는 것이 그 이유. 거대한 산을 이룬 흙더미 꼭대기에 죽치고 앉아 체로 흙을 치기 시작했다.

동참한 대원들조차 "어느 세월에 찾겠냐"는 표정이 역력했다. 아침 해만 뜨면 모두 나가 체 질을 하고, 깜깜해지면 마지 못해 손을 놓고 돌아왔다. 어떨 땐 전등을 켜고 한밤중까지 작업을 계속하기도 했다.

작업 1주일만에 머리뼈 100여개를 찾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신이 난 건 대원들이었다. 학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약 4만년전 다리가 안쪽으로 휘고 충치투성이였던 다섯살짜리 소년의 존재는 그렇게 세상의 햇볕 아래로 나왔다. 청동의 입체상으로 복원하는 데까지는 총 15년의 세월이 걸렸다.

두루봉 발굴경험은 이 교수에게 자신감과 확신을 가져다 주었다. 못할 것이 없었다. 일본과 중국 등 아시아 학계를 뒤흔든 단양 수양개 유적도 지난 80년대 초반 악천후속에서 강행한 고생 뒤 결실이었다.

며칠동안 억수같이 퍼붓는 비에 온 몸이 흠뻑 젖은 채 걷던 기억, 하루 종일 쫄쫄 굶다가 잘 곳도 없어 어느 산 속 분교에 사정해 간신히 하룻밤 신세를 지던 일, 수양개 앞 강을 건널 땐 큰 비로 불어 넘친 성난 급류속에서 배를 탄 채 "제발 대원들이 무사할 수만 있다면 앞으로 좋은 일 많이 하겠다"고 비장한 기도를 올리던 일.

발굴작업이 시작됐을 땐 대원들의 숙소가 없어 인접한 농가 한 채를 빌렸는데, 묵을 공간이라곤 손바닥만한 방 세 칸이 전부. 그 속에서 대원 60명이 들어가자니 최대한 몸을 구겨넣고도 다 들어가지 못해 헛간이나 바깥에서 함께 새우잠을 자며 살았다.

충주댐 담수가 진행된 후엔 그곳 흙까지 물이 스며들면서 사고가 발생, 흙더미에 깔린 대원을 구해낸 일도 있었다. 그래도 누구 하나 불평하지 않았다. 교수까지 몸사리지 않고 동고동락하는 상황, 게다가 좀돌날 몸돌, 슴베찌르개 등 끝도 없이 구석기 유물들이 쏟아지는 터라 고생속에서도 낙이 있었다.

발굴면적 총 1250㎡. 이 교수팀은 석기 3만여점을 안고 돌아왔다. 관련 보고서만도 수백쪽에 달할 만큼 대단한 성과였다.

"이 수양개의 유물을 통해 규슈지방과 북경, 그리고 북해도의 구석기 문화가 바로 수양개에서 건너갔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하지만 국제학술대회에서 이것을 발표하자 특히 일본 학자들의 반발이 심했습니다. 객관적인 근거에도 불구하고 일종의 자존심 싸움 같은, 정서적인 저항감이 컸던 거죠. 시간이 좀 걸리긴 했지만, 결국엔 그들도 인정을 했습니다.

일본 후쿠오카 시립박물관 등지엔 이미 우리 수양개에서 구석기문화가 건너갔다는 전파도가 그림으로 걸려있습니다. 96년부턴 아예 우리가 주축이 돼서 '수양개와 그 이웃들'이란 이름으로 해마다 정기 국제학술대회도 열고 있는데, 북경쪽 전파 경로도 최근 받아들여졌고, 나머지 북해도쪽도 머지않아 학계에 수용되리라 봅니다."


일본 '농경우위'주장 잠재운 볍씨발견

97년 청원 소로리 토탄층에서 발견한 세계 최고의 볍씨는 자신이 세운 기록을 다시 자신이 수정해야 하는 해프닝 아닌 해프닝도 빚어냈다. 그전까지 3,500년전 볍씨 하나로 일본인들이 한국에 농경문화를 전해줬다며 자못 자부심에 차있던 것이 일본학계.

그러나 91년 이교수가 경기도 일산의 토탄층에서 5.020년전 볍씨를 찾아냄으로써 국내의 반향은 물론 일본 열도를 뒤숭숭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마이니치 신문에까지 대문짝만한 기사로 실린지 얼마 뒤 그는 다시 청원 소로리에서 5,000년전것보다 훨씬 시간을 뛰어넘는 1만4,000년, 1만7,000년전 볍씨 등을 발견, 세계 최고의 기록으로 재등록시켰다.

한국은 물론 세계 농경사의 상한선을 올려놓은 역사적 개가. 일본의 '농경 우위' 주장을 완전히 잠재워버렸음은 물론이다.

"이 많은 일들이 가능했던 건 뭣보다 현장에서 궂은 일도 참고 견디며 작업해 준 학생들과 그 외 많은 분들의 도움이 가장 컸습니다.

올해 예순이 넘은 어떤 농부 한 분은 첫 두루봉 동굴 조사 때부터 지금까지 저희 발굴작업만 있다 하면 20여년째 한번도 빠짐없이 만사 제치고 달려오시는 분도 있습니다. 그만한 현장전문가도 없지요. 그런 모든 분들의 은혜를 입은 거지요. "

한때 동굴곰 뼈 발굴현장에선 유서를 쓰듯 하루하루를 살았던 이 교수. 작업중 한 발만 잘못 디뎌도 곧장 낭떠러지였다. 아내가 사정을 알면 가지 말라고 말릴까 봐 두려움도 혼자 앓았다.

단지, 만약의 경우 아이들 장래가 마음에 걸려 아내에게 지나가는 소리처럼 "아이들 적금을 들어두었냐"고 물었던 일은 지금에서나 담담하게 털어놓을 수 있는 얘기다.


환갑 앞둔 지금의 인생의 절정기

최근엔 필리핀과 폴란드의 국제학술대회에 다녀오느라 정신없이 가을을 보냈다.

학교와 현장외에도 한국박물관학회, 한국고대학회 회장까지 맡아 더더욱 한가할 짬이 없는 몸이다. 내년이면 벌써 나이 예순이지만, 그의 인생은 오히려 환갑이 더 절정기.

그간의 연구물을 총망라하는 논문집 발간에다 후대에까지 작업을 연장해야 할 세계적 노다지 단양 구낭굴 발굴도 즐거운 골칫거리다.

'수양개 박물관'도 내년 착공을 앞두고 있어 기대가 크다. 어릴 때부터 발굴현장에도 곧잘 데리고 다녔던 1녀2남중 막내아들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공익근무요원으로 복무중인 사학도.

20여년전이나 지금이나 발굴작업땐 일주일에 한번 집에 들어가는 것으로도 '그만하면 잘 하는 것 아니냐'는, '아직도 간 큰' 가장이지만, 정작 곁에도 없는 아버지에겐 매일 마음을 드리고도 죄스럽기만 하다.

"살아가면서 아버지 생각을 많이 합니다. 제가 대학4학년때 돌아가셨는데, 살아계신 동안 아버지가 바라신 일은 한가지도 못 들어 드렸습니다. 그 아버지께 사죄하는 마음으로 이 세상에 사는 동안 꼭 뜻있는 일을 하며 살겠다고 늘 다짐해왔습니다. 행운이 있다면 그런 아버지가 계셨다는 걸 겁니다."

정영주 자유기고가 mar10@chollian.net

김명원 사진부 기자 kmx@hk.co.kr

입력시간 2000/11/28 2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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