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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와 오늘] 페기 누난과 앨 고어

[어제와 오늘] 페기 누난과 앨 고어

지난 12월14일 김영삼 전 대통령을 상도동 자택에서 30여분간 만난 경남, 광주, 제주은행 등 지방은행 노조위원장들은 하소했다. "큰 어른으로서 큰 목소리로 말씀해달라." YS가 노조위원장들에게 "김대중씨는 일부러 부산을 도태시키려고 그런 것"(삼성자동차 문제), "김대중씨는 균형감각이 없는 사람.

전라도로 싹쓸이하고 경상도를 쓸어냈으며 그렇다고 서울, 충청도 사람을 쓴 것도 아니다"(경찰인사 문제), "지방은행이 풀뿌리 민주주의의 씨앗"이라는 등의 코멘트를 한 후에 나온 청원의 말이었다.

YS의 독설(?)은 새 천년 첫 미국 대통령 선거가 투표를(11월7일) 마치고도 36일간 면도날 위를 달리다 앨 고어 민주당 후보의 승복 연설과 조지 부시 공화당 후보의 승리 연설로 13일 밤 10시께에(현지시간) 마무리되고 난 후에 나온 것이다.

미국에서는 그 누구도, 두 후보의 지지자이건 반대자이건 '큰목소리'를 부탁치 않았다.

특히 미국의 주류신문중 제일 많이 팔리는 보수주의의 '큰 목소리' 월스트릿저널의 컬럼니스트 페기 누난('힐러리 반대이유'의 저자)은 13일 하오 4시34분 이 신문 '오피니언 저널'사이트에 '지고 있는 후보에게 전하는 메모'라는 '조용한 목소리'의 부탁을 했다.

고어 부통령에게 승복하라는 이야기였다. 고어는 대법원의 재개표 불가 판결이 나온 12일 밤 10시가 지나 13일 새벽 2시께 잠자리에 들 때까지 명백한 승복의사를 밝히지 않고 있었다.

'조용한 목소리'를 낸 누난은 1984~1986년 레이건 대통령의 연설문 작성자였고 1988년 대선 때는 부시 후보의 아버지 부시 대통령의 수석 스피치 라이터였다. 그녀는 백악관에 가기전 CBS 앵커 댄 레더의 라디오 논평을 썼다. 또 '내가 혁명에서 본 것- 레이건 시대의 한 정치적 인생'등 책 3권을 쓰기도 했다.

누난은 고어에게 조용히 말하듯 권고했다. "당신의 측근을 통해 당신이 승복할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그렇다면 내 이야기를 들어달라. 죽은 말을 탔을 때는 내리는 게 최선책이다. 오늘 밤 연설에는 왜 이번 선거가 이렇게 되었는지 설명이 있어야 정치를 재개할 명분이 생긴다.

닉슨이 1962년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에 실패후 '당신들은 더이상 나를 팰 이유가 없다'는 기자회견을 했을 때 이를 지켜본 케네디 대통령이 '품위를 잃었다'고 한 점을 유의해야 한다."

"당신의 참모들이 무어라 하든 당신이 이길 확률은 1~2%다. 당신은 지지했던 사람들이 당신의 승복 연설을 듣고 '우리가 투표는 제대로 했다'는 소리를 하도록 해야 한다.

'나는 패배한 게 아니라 작전상 후회할것일 뿐이다. 유권자 투표에서는 이겼다'는 등의 말은 어디에도 넣지 말라. 모두들 이 사실을 알고 있다. 두 후보가 함께 가고 있음을 세계가 알게 하라."

"당신의 지지자가 새 대통령을 돕도록 여러번 강조해라. 링컨의 '우리는 적이 아니고 친구'라는 말을 강조하라. 평화적 정권교체가 미국의 전통임을 주장하고 연설을 마치라."

열열한 부시 후보의 지지자임을 명백히 했던 누난은 고어에게 또다른 조언도 했다. 고어의 관저 밖에서 "딕 체니(새 부통령 당선자)의 관저에서 나와라"고 외치는 데모꾼에게 커피를 돌리고 담소할 것. 고향인 테네시에 갈 때는 부통령 전용기를 타지말고 버스나 기차로 트루먼 대통령처럼 관저를 떠날 것을 바랬다.

고어는 대법원 판결 11시간만에 TV에 나와 승복연설을 했다. 누난의 권고와 충고를 받아들인 면이 많았다. 그러나 그건 외부의 '큰 목소리'를 듣지 않고 자기 내부의 '조용한 목소리'를 들은 것이었다.

"우리의 한 법과대학 도서관에는 '인간이 아니라 신의 법에 따라'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이것이 미국적 자유의 원칙이며 민주주의적 자유의 출발점이다. 지난 5주동안 나는 이 글귀를 길잡이삼아 충실히 살아왔다. 이제 연방대법원의 판결은 내려졌다. 나는 그 판결에 동의할 수 없다. 그러나 받아들이겠다."

누난은 부시의 승리 연설보다 고어의 승복 연설이 훨씬 간결하고 우아했다고 평했다. "이 연설은 '나는 졌다. 그래 나는 떠난다'로 끝나지 않는다. '여러분 다시 봅시다'는 결의가 담긴 것이다."

박용배 세종대 겸임교수

입력시간 2000/12/19 2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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