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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일본(39)] 부라쿠(部落)②

부라쿠에 대한 사회적 차별은 17세기 후반 이후 잔혹함을 더해갔다. 자연재해에 취약하고 볕도 잘 들지 않는 궁벽한 지역이 거주지로 주어졌다. 일본의 인구가 17세기 말을 고비로 거의 늘어나지 않았던 반면 부라쿠의 인구는 계속 늘어났던 것은 주거환경의 악화에 기여했다.

이는 당시 부라쿠민이 엄격한 종교의식 때문에 인공중절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복장과 머리 모양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제한을 두어 한눈에 일반인과 구별할 수 있도록 했다. 에타 신분의 7세 이상 남녀는 가슴에 네모난 가죽 조각을 붙이도록 하고 에타의 집 출입문에는 모피를 내걸도록 한 예까지도 있었다.

행정관청의 이 같은 부라쿠 차별은 무사를 최상층에 두는 사공농상의 엄격한 신분제도를 유지하기 위해 농공상 등 일반인 아래 따로 천민신분을 두어 일반인의 불만을 달래자는 것이었다. 부라쿠민은 일반인의 차별로 더욱 큰 고통을 받았다.

부라쿠 차별이 절정에 달했던 19세기 들어 부라쿠민이 일반인과 다투는 송사(訟事)가 잇따랐으나 결과는 늘 부라쿠민에 불리한 쪽이었다.

당시의 법정인 '시라스'(白洲)에서 일반인은 멍석 위에 앉아 재판을 받았지만 부라쿠민은 맨바닥에 앉았다. 그러니 공정한 판결은 애초에 기대할 수 없었다. 1859년 에도(江戶ㆍ도쿄)의 아사쿠사(淺草)에서 에타가 신사의 마쓰리(祭り)에서 살해됐다.

그러나 당시의 관청은 '에타의 목숨은 보통 사람의 7분의1'이라는 이유로 이를 사건으로 취급하는 것조차 거부했다. 이런 비교의 근거는 분명하지 않지만 부라쿠 차별의 심각성을 드러내는 좋은 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부라쿠민은 목숨을 내걸고 차별에 저항했다. 1843년 무사시노쿠니(武藏國ㆍ사이타마현)의 부라쿠민이 '한번 죽지 두번 죽지는 않으며 목숨을 버려야 소망을 이룬다'는 구호를 내걸고 저항운동에 나서는 등 근대화 기운이 무르익어감에 따라 부라쿠민의 집단적 의사 표시도 잦아졌다.

또 바쿠후(幕府)를 타도하기 위한 도바쿠(倒幕) 운동에 참여한 부라쿠민도 적지 않았던 결과 메이지 유신 직후인 1871년 에타와 히닌 등 모든 부라쿠민의 신분 차별을 철폐하는 신분해방령이 내려졌다.

그러나 에타ㆍ히닌을 일반인으로 끌어올린 것을 두고 일반인은 스스로의 신분이 부라쿠민으로 떨어져내린 것으로 인식해 전국적인 반대운동에 나서는 한편 부라쿠를 습격, 폭력을 자행했다.

더욱이 신분해방과 함께 부라쿠가 독점해왔던 가죽 생산과 판매에 대한 제한이 풀려 신흥 자본가들이 진출하면서 부락쿠민은 저임금 노동자로 편입돼갔다.

부라쿠민의 이런 경제적 피폐는 부라쿠 차별의 새로운 요인이 됐다.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부라쿠 해방운동이었다. 초기의 해방운동은 부라쿠의 열악한 주거환경과 풍속ㆍ교양의 낙후를 스스로의 노력으로 극복하려는 부락개선 운동이었다.

부라쿠의 자숙과 노력으로 일반인의 동정과 융화를 얻어내려는 성격의 이런 운동과 달리 인간으로서의 당연한 권리를 인식, 차별에 항의하고 시정을 요구하는 보다 적극적 운동도 나타났다.

일본 정부는 1907년에 처음으로 전국적인 부라쿠 실태 조사에 나섰으며 러시아 혁명 이후 부라쿠 해방운동이 사회운동으로 전환하는 기미를 보이자 1920년부터 '융화 사업' 예산을 배정하는 등 부라쿠 회유에 나섰다.

융화 사업은 전시 총동원을 겨냥한 '동포일화'(同胞一和)의 구호에 따라 '도와(同和) 사업'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지방 유지와 저명 인사가 참여, 협회를 만들고 지방개선비 등 다양한 명목의 예산지원도 이뤄졌지만 밑으로부터의 사회운동을 막기에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었다.

1922년 교토(京都)에서 스이헤이샤(水平社)가 창립돼 전국적 조직을 갖추면서 부라쿠 해방운동은 새 단계에 접어들었으나 전시체제 하에서 이내 침묵을 강요받았다. 패전후 스이헤이샤 전국위원회의 전통은 부라쿠 해방 전국위원회와 그 후신인 부라쿠 해방동맹으로 이어졌다.

이들은 공산당이나 사회당(현 사민당) 등 진보정당, 노동단체와 연대해 지금도 부라쿠 차별 철폐 운동을 벌이고 있다. 한편 도와사업 계통의 조직도 남아있으나 우익이나 폭력단관련 의혹이 끊이지 않고 있다.

총무청의 1993년 조사에 따르면 부라쿠는 일본 전국에 4,603개가 남아있다. 약 70만 세대가 여기에 살고 있으나 재일동포나 하층민이 흘러들어간 예도 있어 순수(?) 부라쿠민은 30만 세대 89만명인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황영식 도쿄특파원 yshwang@hk.co.kr

입력시간 2000/12/26 2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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