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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축구 최후의 카드 '히딩크 실험'

지난 11월15일 낮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한 호텔.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가운데 대한축구협회 가삼현 국제부장이 외국인 감독 영입의 특명을 받고 한 신사를 만나고 있었다.

그가 바로 거스 히딩크(54). 국내에서 외국인 감독 후보 1순위로 1998년 월드컵 우승 조련사 에메 자케(프랑스)가 유력하게 거론되고 있을 때 축구협회는 히딩크와 먼저 접촉하고 있었다. 한국 축구와 히딩크가 '운명공동체'로 묶이는 첫 순간이었다.

그로부터 한달 후인 지난 12월18일 히딩크는 대한축구협회와 공식 조인식을 가졌다. 한국 축구의 재건을 떠맡은 '히딩크 호'가 닻을 올린 것이다. 계약기간은 2001년 1월1일부터 월드컵이 끝나는 2002년 6월 말까지다.

정확한 연봉은 공개되지 않았지만 성과급을 제외한 연봉만 150만 달러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금전적으로 조건이 더 좋은 사우디아라비아 등의 제의를 뿌리치고 한국을 택한 히딩크는 "네덜란드도 꺾을 수 있도록 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천명했다.


네덜란드가 낳은 명감독

그는 네덜란드가 낳은 명감독이다. 1960~1970년대 네덜란드 아인트호벤과 미국 등에서 선수생활을 했고 국가대표로도 뛰었으나 감독으로 얻은 명성에 비해 현역 성적표는 그리 뛰어나지는 않은 편이다.

1981년 처음으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한 그는 1983년 친정팀 아인트호벤 코치를 맡는다. 코치 생활 약 3년째이던 1986년 히딩크는 마침내 팀 사령탑에 올랐고 그때부터 그의 진가는 성적으로 빛을 발한다. 가장 돋보인 성적은 1986-1988년 정규리그 3연패.

1988년에는 네덜란드 축구협회(FA)컵 정상과 유럽 프로축구 챔피언스리그까지 제패해 절정기를 보냈다. 1995년부터 1998년까지 네덜란드 대표팀 지휘봉을 잡아 조국을 1998년 월드컵 4강에 올려놓았다.

같은 해 스페인 명문 레알 마드리드가 대륙간 클럽대항전인 도요타컵 정상에 오른 것도 그의 지도력 덕분이었다. 지난 5월 성적부진으로 레알 베티스(스페인) 사령탑에서 물러나면서(처음부터 3개월만 팀을 맡기로 했다는 평가도 있다) 이력에 약간 흠집이 났지만 그의 지휘능력을 의심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인화 중시하는 원칙주의자

자율적인 분위기에서도 엄격한 원칙을 고수하는 히딩크는 인화를 필수 덕목으로 꼽는다.

1996년 유럽선수권대회 당시 일화 하나. '싸움닭'으로 불리는 에드가 다비즈가 "감독이 못하는 선수만 기용한다. 머리가 모자란 것 아니냐"며 가시 돋친 독설로 감독에 반기를 들었다.

그러자 히딩크는 "말하는 자유도 좋지만 팀에는 규율이 있다"면서 전력손실을 감수하며 다비즈를 중도 귀국시켰다. 히딩크는 그러나 2년 후 월드컵 때 다비즈에게 다시 기회를 주었고 다비즈는 4강 진출로 보은했다.

인화를 앞세운 히딩크는 1996년 유럽 선수권대회 때 흑인 신인들과 백인 베테랑간의 골이 깊었던 불협화음을 무난하게 수습한 것으로 평가 받고있다. 지난 12월18일 공식 기자회견에서도 "코칭스태프와 선수들 모두가 서로 존중하는 팀을 만들겠다"고 말해 자신의 철학을 뒷받침했다.


철저한 실력 본위의 축구

히딩크 앞에서 이름값은 의미가 없다. 철저하게 실력본위를 추구한다. 무명이라도 가능성을 발견하면 거침없이 주전으로 발탁한다. 그는 기자회견에서 "무명 선수들이 대선수가 되는 경우를 자주 봐왔다"며 신예를 적극적으로 찾아내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실제로 히딩크는 '흙 속의 진주'를 찾아내는 탁월한 혜안을 가진 감독으로 평가된다. 호마리우(브라질) 프레드라그 미야토비치(유고)와 코쿠(네덜란드) 등 세계적인 선수들은 그의 작품이다.

미야토비치의 재능을 한 눈에 알아본 후 1993년 팀(발렌시아) 관계자들의 만류를 설득해가며 영입, 유럽 최고 스트라이커 중 한명으로 키워냈다. 1988년 '새별' 호마리우를 데려오기 위해 리우데자네이루 공항까지 쫓아가는 열성을 보였다. 호마리우는 히딩크의 조련으로 세계적인 스타로 발돋움했다.


조직력 앞세운 공격축구 지향

허정무 전 대표팀 감독은 "네덜란드의 전형적인 스리백 시스템과 토털사커에 큰 변화를 가져온 인물"이라고 히딩크를 소개했다. 히딩크는 네덜란드 출신답게 공격축구를 지향하며 양 날개의 측면돌파를 적극 활용한다.

주로 4-4-2 전술을 사용하지만 틀에 박힌 포메이션에 얽매이기보다는 체력과 스피드를 바탕으로 한 공격축구를 선호한다. 스피드와 체력은 한국 축구의 강점으로 이 부분이 히딩크와 한국축구의 '교집합'이기도 하다.

그는 특히 '생각하는 축구'를 강조한다. 그는 90분 동안 경기를 통제할 수 있는 팀, 전술변경을 요구했을 때 즉시 소화하는 팀을 만들겠다고 했다.

잘 뛰고 개인기가 좋은 것도 중요하지만 자신의 위치와 책임, 팀 전술을 정확히 체득하고 주어진 문제를 해결해내는 선수들의 두뇌플레이가 중요하다는 게 그가 말하는 '생각하는 축구'의 핵심이다. 기계처럼 맞아떨어지는 조직력도 중시한다.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

히딩크는 영어 독일어 스페인어 등 5개 외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한다. 정몽준 대한축구협회 회장은 히딩크가 외국어에 능하다는 사실을 두고 "외국어를 잘 하기 위해서는 첫째 노력과 관심이 중요하고 무엇보다 머리가 좋아야 한다"면서 히딩크가 대단히 명석한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스페인 발렌시아와 레알 마드리드 등에서 감독생활을 하면서 선수들과의 의사소통이 지도력을 발휘하기 위한 기초임을 깨닫고 스페인어를 열심히 배웠다.

한국 선수들을 빨리 파악하기 위해 유니폼에 이름을 새겨달라고 요청할 만큼 의욕이 넘치는 히딩크가 혹시 한국어를 '제6 외국어'로 익히지는 않을까.

히딩크를 지켜본 축구협회 관계자와 기자들은 그가 입이 무거운 사람이라는 데 이의를 달지 않는다. 히딩크는 일에 대해서는 지극히 말을 아낀다. 그를 위한 시연회라는 말까지 나왔던 12월20일의 한일 정기전에 대해 히딩크는 끝내 무거운 입을 열지 않았다.

"10명으로 잘 싸웠다"와 몇몇 선수들에 대해 살짝 언급했을 뿐. 축구협회 가삼현 국제부장은 "히딩크는 불필요한 말을 철저하게 삼가는 신중한 사람으로 그런 면에서 프로의식이 느껴진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히딩크는 일상적인 대화에서는 유머와 재기 넘치는 입담으로 폭소를 자아내는 재주를 가졌다. "도요타컵서 우승하면 콧수염을 깎겠다고 약속해서 지금 콧수염이 없다", "유럽선수권 때 성적이 좋으면 머리를 밀어 대머리가 되겠다고 했는데 한국과도 무슨 약속을 할지 생각해보겠다"는 등 이외에도 그가 주위 사람들을 웃긴 말들은 꽤나 많다.


세번째 외국인 감독, 슬기 모아야

올해 최악의 해를 보낸 한국 축구가 벼랑 끝에서 정부의 '공적자금'까지 투입해 마련한 위기탈출의 승부수가 세계 최고 수준의 외국인 감독 영입이었다. 히딩크는 데트마르 크라머(독일ㆍ1990~1992년)와 아나톨리 비쇼베츠(1994~1996년ㆍ우크라이나)에 이은 세번째 외국인 대표팀 감독.

전직 두 외국인 감독은 지도 방식 등에서 한국인 코칭스태프와 불화를 노출하며 결국 초라하게 보따리를 쌌다. 이와 관련해 벌써부터 외국인 감독에 대한 일부 축구인들의 배타성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지난 실패를 교훈 삼아서라도 히딩크가 하루 빨리 한국축구의 체질을 개선할 수 있도록 모두가 슬기를 모아야 한다. 시간도 그리 넉넉하지는 않다. 2002년 월드컵까지 불과 1년 5개월 남았다.

1998년 월드컵에서 한국에 0대5의 치욕적인 패배를 안긴 '그때 그 감독'이었던 히딩크.

악연으로 시작된 그와의 인연이 2002년 월드컵에서 좋은 연분으로 열매 맺힐 수 있을 것인가. 한국 축구의 '히딩크 실험'은 오는 1월 24일 개막하는 홍콩 칼스버그컵에서 그 첫 걸음을 내딛는다.

김정호 체육부 기자 azure@hk.co.kr

입력시간 2000/12/26 2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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