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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의 계산된 '취중진담'

"기회주의자는 포섭대상이긴 해도 지도자로는 모시지 않는 것이 내 철학이다." 노무현 해양수산부장관이 구랍 21일 민주당의 새 간판으로 등장한 김중권 대표를 겨냥, '기회주의자' 라고 공격해 여권내부에 일파만파의 파장을 일으켰다.

김 대표를 지명한 사람은 여당 총재인 김대중 대통령이기 때문에 현직장관의 이같은 발언은 튀는 언행으로 비쳐지기에 충분했다.

노 장관은 이에 앞서 18일에는 신동아 1월호와의 인터뷰 문제로 김대중 대통령으로부터 질책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노 장관은 이 인터뷰에서 김 대통령의 탈당 가능성에 대한 질문을 받고 "야당의 협조가 전제된다면 대통령의 당적 이탈도 고려할 수 있으나 야당이 그럴 리가 없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당적 이탈은 힘들다"는 취지로 답변했다.

그러나 그의 발언이 '대통령의 탈당도 검토할 수 있다'는 식으로 언론에 과장보도돼 청와대측으로부터 "장관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라"는 경고성 주문을 받았다. 그러나 노 장관은 불과 며칠 뒤 또한번 폭탄 발언을 했다.


"김중권 대표 지명은 웃기는 일" 직격탄

12월21일 밤. 노 장관은 해양수산부 출입기자 17명과 함께 수산물을 파는 음식점에서 회와 맥주, 소주, 양주 등을 놓고 송년 모임을 가졌다. 모임이 시작된지 2시간쯤 흘렀다. 정치 문제가 화제에 오르자 한 기자가 "민주당의 김중권 신임 대표 지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질문했다.

이에 노 장관은 "웃긴다. 잘못되고 있는 것 같다"며 거침없이 김 대표를 기회주의자로 몰아붙였다. 김 대표가 5ㆍ6공 출신으로서 지난 대선 직전 국민회의에 합류, 현정권의 초대 대통령비서실장을 역임한 경력 등을 문제삼은 것이다.

노 장관은 이어 "대권도전에 나설 계획이다. 나는 대권에 도전할 소신과 자격이 있다고 본다. 필요에 따라 움직이는, 가방 끈이 긴 사람보다 정치적 소신이 있는 원칙주의자가 다음 세대에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날 노 장관은 '적당히' 술을 마셨으며 취할 정도는 아니었다는 게 옆에 있던 기자들의 전언이다. 한 기자는 "노 장관이 비(非)보도 요청을 한 것이 아니므로 나름의 의도를 갖고 발언한 것 같다"며 "다만 기자들끼리 비보도 약속이 이뤄졌으나 한 기자가 이를 깨고 보도했다"고 말했다.

이날 밤 언론사로부터 노 장관 발언을 전해들은 민주당 김영환 대변인은 부랴부랴 노 장관을 찾았다. 노 장관은 김 대변인과의 전화통화에서 "대변인을 부담스럽게 해서 미안하다. 김 대변인이 알아서 해명하라"고 말했다.

김 대변인은 22일 "노 장관이 '취중에 과거의 일에 대한 아쉬움을 표명한 것인데, 지금은 새 대표를 중심으로 단결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고 발표, 파문을 진화하려 했다. 그러나 노 장관 측은 "노 장관이 소신을 밝힌 것이다. 취중에 실언한 것은 아니다"라며 '소신'을 강조했다.

당초 발언에서 한발 뺄 경우 우유부단한 정치인으로 비쳐질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따라서 '기회주의자 발언' 파문은 수그러지지 않았다.

김중권 대표는 기자들로부터 노 장관 발언에 대한 질문을 받고 허허 웃으며 "약주를 드시고 한 말씀인데 내가 이런 자리에서 얘기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받아넘겼다.

그러나 김 대표는 이날 특강을 통해 "정치를 언제 시작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정치를 했느냐가 중요한 것"이라고 말하는 등 노 장관 발언에 적잖이 신경을 쓰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이날 오후부터 민주당 고위 당직자들과 동교동계 인사들이 노 장관에게 직격탄을 날리기 시작했다. 김옥두 전 사무총장은 22일 밤 기자들과 만나 "장관이 여당대표를 공격하면서 당을 흔드는 게 말이 되느냐"며 직설적으로 노 장관을 공격했다.

김 대통령의 의중이 실린 언급으로 해석됐다. 박상규 사무총장도 23일 오전 "(노 장관은)김중권 대표를 공격한 것이 아니라 임명권자인 김대중 대통령에게 도전한 것이다. 공무원 신분으로서 집권당 대표에 대해 그런 얘기를 하는 것은 건국 이래 처음 있는 일"이라며 노 장관을 신랄하게 성토했다.


용꿈에 '김중권 변수' 돌출

박 총장 발언이 있은 뒤 노 장관은 사과성명을 발표했다. 노 장관은 "비보도를 전제로 기자들과 사담을 나눈 것이 언론에 보도돼 당에 내분이 있는 것처럼 비쳐져 당과 대통령에게 죄송스럽게 생각한다"며 "대통령께서 대표를 지명한 이상 대표를 중심으로 당이 단합해야 한다"고 밝혔다.

노 장관이 고개를 숙임으로써 발언 파문은 일단락됐다. 노 장관은 청와대로부터 또 한차례 '옐로우 카드'를 받고 해명했을 것이란 얘기들이 나왔다.

그러면 노 장관이 파격적 발언을 한 이유는 무엇일까. 노 장관의 용꿈과 무관치 않다. 부산 출신인 노 장관은 2002년 민주당의 대선후보 경선을 이인제 최고위원과 자신의 양자 대결 구도로 몰고가겠다는 전략을 갖고 있다.

'영남후보론'을 내세워 '반(反)이인제 세력'을 결집할 경우 당내 경선에서 해볼만 하다는 것이 노 장관 캠프의 주장이다.

그런데 경북 출신인 김중권 대표가 부각되는 것은 자신의 전략에 차질을 가져올 수도 있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또 여권 지도부를 향해 할 소리를 하는 사람으로 비치도록 하는게 영남 정서를 업는 데 유리하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노 장관은 최근 지지도에서 여권의 대선예비주자로 거론되는 10여명의 인사 중 이인제 최고위원에 이어 2, 3위를 달리고 있다. 그러나 원외인사여서 당내 세력은 미약한 편이다.

노 장관은 이같은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이인제 최고위원과 경쟁관계에 있는 한화갑 최고위원으로부터 지지를 유도하는 방안에 부심하고 있다. 이같은 상황에서 '김중권 변수'가 생겼으니 갈 길 바쁜 그에게 달가울 리가 없었을 것이다.

기회주의자 발언 파문은 노 장관에게 득보다는 실이 많았을 것이라는 게 지배적 해석이다. 심지어 여권 일각에서는 "노 장관이 대선경쟁에서 밀려나는 계기가 됐다. 장관 취임을 안정감 부족이란 기존 이미지를 불식하는 기회로 삼으려 했는데 이번 파문으로 정반대 효과만 내고 말았다"는 주장이 나왔다.


정치적 안정감, 당내기반 구축이 과제

반면 노 장관측은 비관적 해석을 거부한다. 노 장관의 한 측근은 "그래도 노 장관의 인기는 완만히 상승하고 있다. 당내에서 이인제 최고위원의 대선 승리 가능성에 의문을 갖는 세력은 결국 우리를 밀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측근은 이어 "노장관이 내년 초 개각 때 교체되지 않을 가능성도 많다"며 "노 장관은 어차피 내년 중반기 이후에 본격적으로 경선 레이스에 들어간다는 입장"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내년 초 개각이 이뤄질 경우 노 장관이 경질될 것이라는 견해가 우세하다.

물론 여권 일부에서는 "노 장관이 튀지 않도록 컨트롤하기 위해서라도 장관직에서 물러나게 하면 안 된다"는 반론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누구보다도 적극적으로 용꿈을 꾸는 있는 노 장관은 비교적 높은 대중적 인기, 영남 출신, 소신파 이미지 등의 자산을 갖고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 정치적 안정감을 심어주지 못해 여론주도층 사이에 비토 분위기가 있다는 게 노 장관의 약점이다. 약한 당내기반도 부담이다. 2000년 8월부터 장관 자리를 맡은 게 그의 정치적 대차대조표에 어떻게 기록될지는 두고볼 일이다.

노 장관은 이르면 내년 초 늦어도 내년 중반기에는 장관직을 그만두고 당내 대선 경쟁에 본격적으로 뛰어들 것으로 보인다.

김광덕 정치부 기자 kdkim@hk.co.kr

입력시간 2001/01/03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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