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정주영] 계열분리 가속화… 夢의 시대로

현대그룹에서 정주영 전 회장이 갖는 위상은 '왕회장'이란 말 한마디에 압축돼 있다. 왕회장의 위상이 현대 내에서만 통용된 것은 아니었다.

지난해 8월부터 외부활동을 완전히 끊은 뒤 위독설이 간간히 흘러나왔지만 그는 존재한다는 그 사실 만으로도 현대의 든든한 방패막이 구실을 해왔다.

현대의 주거래은행인 외환은행 관계자의 말이 의미있다. "지난해 이후 수조원의 대출금 연장과 회사채 연장조치도 따지고보면 정주영 회장이라는 정신적인 담보물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왕회장의 이러한 영향력과 상징성은 앞으로의 현대를 가늠할 바로미터가 된다.

왕회장의 죽음은 무엇보다 지난해 3월 '왕자의 난' 이후 응집력이 현저하게 떨어진 그룹의 계열분리를 가속화할 전망이다. 왕회장은 부인 변중석 여사와 사이에 8남1녀를 두었다.

장남 몽필, 4남 몽우씨가 먼저 사망하는 바람에 현대 각 계열사는 6형제가 분점하고 있는 형태다. 차남 정몽구 현대자동차 회장, 3남 정몽근 현대백화점 회장, 5남 정몽헌 현대아산 회장, 6남 정몽준 현대중공업 고문, 7남 정몽윤 현대해상화재 고문, 8남 정몽일 현대기업금융 회장이 그들.


몽구 몽헌 몽준 중심의 소그룹으로 재편

이중 현대가의 굵은 맥락을 이어갈 형제는 정몽구, 정몽헌, 정몽준 세사람이다.

이들은 지난해 1, 2차 왕자의 난 이래 급격히 실리적 관계로 돌아섰다. 계열사간 거래가 사실상 끊긴 것도 당연한 수순. 지난해 8월 계열분리된 현대차 그룹이 현대건설의 유동성 위기를 일부 지원한 적은 있다.

하지만 왕회장의 타계로 느슨하나마 존재하던 연계가 사라질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일반적인 전망이다. 올 3월 현대중공업이 고려산업개발의 부도를 방치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올해 말까지의 예정에 따르면 현대는 이미 분가한 현대자동차를 제외하고 3개 부문으로 크게 계열분리된다. 건설ㆍ상선을 주축으로 하는 기존의 현대그룹과 중공업부문, 전자부문으로 나눠지고 금융부문에서는 완전히 손을 뗀다는 것.

1998년 말의 구조조정 전에 계열사 83개를 거느렸고, 1999년 말 자산규모 124조원이었던 공룡그룹 현대가 소그룹의 병립체제로 재편되는 셈이다.

현단계에서는 몽구, 몽헌, 몽준 형제가 힘을 합쳐도 왕회장의 빈자리를 메우기 어렵다. 정몽헌 회장의 현대건설은 5조원이 넘는 부채로 심각한 유동성 위기를 겪고 있다.

현대건설 계열인 현대아산도 금강산 사업의 손실로 자본금 4,500억원이 거의 잠식된 상황.

정몽구 회장의 현대자동차 소그룹도 안심할 상황은 아니다. 정몽구 회장이 순수하게 확보하고 있는 현대자동차 지분은 4.07%에 불과하다. 현대모비스(구 현대정공)와 인천제철을 통한 우호지분을 합쳐야 20% 정도다. 상황이 닥칠 경우 경영권 방어가 간단치 않다는 이야기다.

정몽준 고문은 현대중공업 지분을 10.34% 갖고 있다. 하지만 정몽헌 회장의 지배하에 있는 현대상선이 중공업 지분을 12.34% 갖고 있다는 약점을 지니고 있다.

경영권 분쟁의 소지가 엄존한다는 결론이다.

왕회장의 사망은 그의 생전에 윤곽을 드러낸 그룹 분할을 앞당김과 동시에 현대그룹의 본가를 이끌 정몽헌 회장에게 심각한 고민을 던졌다.

정몽헌 회장 지배하의 주력사들이 대부분 유동성 위기를 겪고 있기 때문이다. 왕회장의 그늘이 없는 상황에서 계열사간 직간접 지원과 외부적 지원을 기대하기는 더욱 어려워졌다.

배연해 주간한국부 기자

입력시간 2001/03/28 14:42


배연해 주간한국부 seapower@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