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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애자 들라노에, 파리시장 당선

동성애자 들라노에, 파리시장 당선

진솔·용감택한 파리시민, 첫 좌파출신 당선

"파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시장이 되려 합니다"

프랑스 파리 시민들은 너무나 평범한 이 한마디에 감동해 무명의 베르트랑 들라노에(50)를 130년 만의 첫 좌파출신 시장으로 뽑았다. 전임 시장들이 보여준 노련함이나 경험, 정치적 제스처는 부족했지만 시민들은 오히려 그런 점을 참신함으로 보았고, 그를 택했다.

들라노에가 풍기는 이미지와 그가 제시한 비전이 가식없는 진실로 비쳐졌기 때문이다.

들라노에가 속한 사회당이 3월 18일 실시된 프랑스의 수도 파리의 지방선거 결선투표에서 시장을 뽑게 될 시의회 163석 중 89석을 확보함으로써 그는 야당인 공화국연합의 필립 세갱을 누르고 이날 시장에 공식 선출됐다.

파리 시장직은 1871년 파리 코뮌 이후 폐지됐다가 1977년 부활돼 자크 시라크 대통령이 1977년부터 95년까지 선출되는 등 우파인 공화국연합이 독점해 왔다.


게이 고백한 용감한 정치인

지독한 애연가로 알려진 들라노에는 공개적으로 동성연애자임을 선언한 '용감한' 정치인이다. 그는 1999년 TV 인터뷰에서 사회자의 질문을 받고 "그래요, 저는 동성연애자입니다"라고 고백한 뒤 "동성연애자들의 권리에 대한 무관심을 해결하겠습니다"고 말했다.

프랑스는 동성연애자 천국이지만, 정치인이 공개적으로 '커밍 아웃'(Coming Outㆍ동성연애자임을 밝히는 선언)을 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그러나 커밍 아웃 후 들라노에의 인기는 오히려 천정부지로 치솟기 시작했다. 리오넬 조스팽 총리를 비롯한 정치인들과 각계 지식인들의 지지가 쏟아졌다.

여론도 정치적 야망이 아니라 진솔한 모습을 보여준 그를 칭찬했다. 들라노에가 6년 임기의 파리 시장 출마를 준비한 것도 이 때부터였다.


우파, 부패스캔들로 자멸

시장 후보 티켓도 아주 우연하게 주어졌다. 시장 후보로 유력했던 도미니크 스트로스 칸 전 재무장관이 지난해 부패 스캔들에 연루돼 중도 하차한 뒤 자크 랑 전장관도 교육부 장관으로 좌파 연정에 입각하면서 '제3의 인물'인 들라노에에게 기회가 온 것이다.

사회당 후보로 나선 그는 기존 정치인과 달리 권위적이지 않은 모습을 내보임으로써 차근차근 인기를 쌓아갔다.

여기에 상대편인 우파가 각종 부패 스캔들로 자중지란을 보이며 흔들리기 시작했다. 장 티베리 현 파리시장은 지난 선거 때 선거인 명부를 조작한 것으로 드러났고, 티베리의 전임 시장이었던 시라크 대통령 마저 잇달아 대형 비자금 스캔들에 휘말렸다.

야당은 티베리에 대한 여론의 비난이 높아지자 저명한 정치인 세갱을 내세웠으나 티베리가 무소속으로 출마하는 바람에 지지세력이 분열되고 말았다.

그러나 들라노에가 승리하게 된 요인은 우파의 분열이라는 반사적 이익 만이 아니었다. 그는 그야말로 민심을 대변한 생활 밀착형 공약을 내놨다.

파리시의 골칫거리인 개똥 청소를 위한 대안을 제시하는 한편, 시내 주요 지하철 역에 자전거 대여소 마련, 개인 소유 빈집에 대한 공공관리 등 참신한 아이디어를 시정 계획으로 제시했다.

학원 폭력과 청소년 범죄를 막기 위해 1,000명 규모의 지방경찰을 창설하고 청년 실업자 1,000명을 학교 건널목 파수꾼으로 투입하겠다는 방안도 설득력이 있었다.

또 지방세를 더 올리지 않고 공공부채를 지출의 46%에서 42.5%로 끌어내리겠다고 공언했다. 하나 같이 서민들이 무릎을 칠 만한 내용들이었다.


프랑스 정치의 새로운 희망으로 떠올라

들라노에는 유세를 벌이면서도 상대를 비난하며 어부지리를 챙기려 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과거의 잘못을 추궁하기 보다 미래를 준비하겠다며 시민들에게 용기를 북돋워주었다. '시대를 바꾸자' '파리에 자부심을 갖자' '파리를 계몽주의자들의 도시로 환원시키자' 등의 구호를 내세운 그는 "파리는 자유와 문화, 역동성의 도시"라고 예찬하면서 "현대적 시 운영의 기구를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들라노에는 파리시의 투명한 예산 집행을 실시하기 위해 독립적 전문가들로 구성된 위원회를 설치하겠다고 제시했고, 대기 오염을 줄이기 위한 전기 자동차 개발을 지원하는 한편 파리시 외곽에 배기 가스 배출이 적은 전차를 운행하겠다고 선언했다.

기존 정치인들처럼 정쟁에 휘말리지 않고 희망을 던져 준 것이다.

들라노에는 당선이 확정된 뒤 시청 앞 광장에서 축제를 벌인 1만여명의 지지자들 앞에 나타나 "오늘 파리 시민들은 자유롭게 수도의 정권교체를 선택했다"며 "이것은 무엇보다도 문화와 민주적 실천의 쇄신 뿐만 아니라 시민들의 일상 생활에 봉사하는 시 운영의 획기적 변화를 요구하는 선택"이라고 말했다.

튀니지에서 태어난 들라노에는 10대때 가족과 함께 프랑스로 돌아와 1972년 사회당에 입당해 정계에 입문한 뒤 1981년 파리 18구에서 국회의원에 당선했다. 85년엔 정치에 회의를 느껴 은퇴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정치 방학 ' 중 오히려 시민들의 희망 사항이 무엇인지 파악했다.

93년 정치에 복귀해 사회당 대변인을 거쳐 사회당의 파리지구 제1서기 자리에 오르는 등 화려한 정치 경력을 쌓았다. 95년 대통령 선거 당시 사회당 후보였던 리오넬 조스팽 총리의 선거대책본부장을 맡아 조스팽과도 교분이 깊다. 그 해 파리에서 상원의원에 당선됐다.


파리시장은 대권으로 가는 징검다리

이번 파리시장 선거 결과가 향후 프랑스 선거에 미치는 영향은 지대하다. 프랑스 정치에서 파리시장이 차지하는 비중은 단순한 지방자치 단체장의 수준을 뛰어 넘을 정도로 크기 때문이다.

시라크 대통령이 18년 동안 파리시장으로 재직하며 닦은 정치적 기반으로 대통령에 당선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파리 시장은 대권을 향한 징검다리 역할을 한다.

규모 면에서도 파리 시청은 직원수만 4만4,000명, 50억 유로의 예산을 집행하는 거대 조직이다. 각국 정상들이 프랑스를 방문할 때도 파리 시청연설은 당연한 일정으로 간주되고 있다.

파리에 좌파 시장에 등장 함으로써 내년 대선에 출마할 조스팽 총리는 큰 힘을 얻었다. 반면 재선을 노리는 시라크 대통령은 대선가도에 적신호가 켜졌다.

사회당, 녹색당, 공산당 연합의 좌파는 파리 외에도 우파의 아성이었던 제2의 도시 리옹의 시장을 차지하는 개가를 올렸다. 좌파는 최근의 실업률 감소, 경기 안정 등을 내세우며 총반격에 나설 기세이다.

하지만 파리시 선거 결과 만을 놓고 내년 대선 결과를 점치기는 아직 이르다. 우파는 가장 중요한 거점을 잃었지만 이번 지방선거의 전국적인 득표에서는 승리했다. 툴루즈를 빼앗은 데 이어 마르세이유, 스트라스부르그, 오를레앙, 캉, 루앙, 엑상 프로방스, 아비뇽, 니스 등에서 연승을 거뒀다.

특히 조스팽 총리 정부의 간판인 자크 랑 교육장관과 엘리자베트 기구 노동장관이 각각 블루아와 아비뇽 시장 선거에서 떨어졌다. 야당 지도자들은 "프랑스는 조스팽의 좌파에 아니오라고 답했다"고 정치 공세를 강화했다.

이번 선거에서는 지난해 6월 통과된 개정선거법에 따라 인구 3만500명 이상 시ㆍ군에서 각 정당 공천 후보 중 남녀 비율을 동일하게 할 것을 의무화하는 조항이 처음으로 적용됐다.

이동준 국제부 기자 djlee@hk.co.kr

입력시간 2001/03/28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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