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탐구] 아주대 병원 신경외과 조경기 박사(上)

산에 홀리고 일에 취한 '중독자'

의사 조경기(51) 박사에겐 두가지 병이 있다. 일 중독과 산(山) 중독이다. 증세가 심각하다. 남의 병은 잘 고쳐도 자기 병은 좀처럼 치유가 안된다. 워낙 뿌리가 깊다.

아주대학병원 신경외과 과장인 그는 정시 퇴근이란 걸 모른다. 남들이 다 퇴근한 뒤에도 혼자 연구실에서 꾸물대며 나오지 않는다.

새벽길 귀가는 기본이다. 환자 보랴, 제자 가르치랴, 각종 학술모임만으로도 벅찰텐데, 매년 연구논문까지 꾸준히 쏟아낸다. 그야말로 초인이다. 10여년전엔 단 2년3개월만에 논문 18편을 발표한 적도 있는 경이로운 연구중독자이니 차라리 이 정도는 약과인지 모른다.

일 중독도 문제지만 산 중독도 못지 않다. 환자이거나 같은 의료계 종사자가 아니면 좀처럼 사석에서 보기 힘든 그를 유일하게 꾀어낼 수 있는 사람은 산악인들이다.

요즘도 한달에 두번쯤은 인수봉 암벽등반에 나선다. 한밤중에 일을 하다가도 창밖에 보름달만 밝았다 하면 몽유병 환자처럼 병원 뒷산에라도 오르는 의사다.

산에 홀렸다. 너무 연구실에만 틀어박혀 병이라도 날 것 같은 그를 그나마 산이라도 그렇게 데려가는 게 오히려 고맙다. 진료실 겸 연구실 벽엔 등반 사진도 붙어 있다.

의사가 아닌 산사나이 조경기의 터프한 모습이다. 이미 소문을 다 듣고 갔는데, 산 얘기를 꺼내자 펄쩍 뛴다.


"산에 오르면서도 환자들 생각하면 미안하죠"

"환자들에게 미안하게 왜 그러세요. 저는 열심히 일만 하는 사람입니다. 산은 그냥 취미삼아 조금씩 다니는 것뿐입니다. 비록 개인적인 주말시간을 이용해 이따금 다니는 것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 시간까지 환자들을 위해 쓰는 게 옳지 않나 늘 마음에 걸립니다. 저만 아니라 의사들 누구나 스트레스를 이기기 위해 갖는 취미 정도로만 봐 주세요."

주말에 쉬는 것조차 환자들에게 미안해 못견디는 의사. 취미라곤 하지만 누구나 그처럼 목숨 걸고 도전하진 않는다. 몇해전 마나슬루봉을 비롯해 '죽음의 산' K2에도 올랐던 그다.

사실 죽을 고비를 넘기고 돌아왔다. 요즘도 언제 또다시 있을지 모를 '재기전'을 위해 꾸준히 체력을 단련하고 있다. 매일 새벽 5시 20분이면 기상, 일찌감치 병원에 나가 1시간 가량 운동을 한 뒤 일중독자의 일과를 시작한다.

속사정 모르는 사람들은 K2 등반때 팀닥터 자격으로만 합류한 것으로 알고 있다. 당시 등반대를 이끌었던 엄홍길씨를 비롯, 대원들 역시 처음엔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곱게 베이스캠프에만 있을 줄 알았던 그가 부득부득 자신도 '클라이머'(climber)라고 우기며 정상까지 가겠다고 나섰다.

실없는 농담 정도로만 알고 대원들끼리 떠나버리자 급기야 혼자 현지 시장을 돌아다니며 장비를 구한 뒤 단독 등반에 나섰다. 자랑스런 등반대의 일거수일투족이 한국 언론에 시시각각 보도되며 박수를 받을 때, 그는 그 뒤에서 외톨이로 일대 모험을 벌이고 있었다.

나중엔 대원들도 이를 알게 됐지만, "아무리 위험하다고 말려봐야 들을 사람이 아니다"는 것을 알고서야 말리기를 포기했다.

결국 7,500m고지까지 밟고 내려왔다. 자칫하면 빙하속에 사라질 수도 있었던, 당돌한 사투였다. 그러고도 후회는커녕, 고지를 눈 앞에 둔 채 악천후로 포기했다는 미련으로 아직도 이를 갈고 있다.

"나중에 가족들이 놀라지 않았냐구요? 그럴까봐 전혀 그 얘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걱정도 걱정이지만 뭣보다 다음번 등정때 혹시 지장이 있을까봐 계속 숨기고 있습니다. 아직도 집사람은 제가 베이스 캠프에만 얌전히 있다가 온 줄 압니다."


위험한 운동만 골라서 하는 산사나이

세상에 위험하다는 운동이란 운동은 다 해보았다. 공중에서 낙하하고, 바다로 뛰어들고, 그런 등등의 스포츠다. 하지만 등반만큼 그를 강력히 사로잡은 건 없다. 왜 그렇게까지 위험에 뛰어드는가를 물어보면 엉뚱한 수술 얘기가 다시 튀어나온다.

"수술과 등반은 서로 통하는 점이 있습니다. 생명이 왔다 갔다하는 아주 극한 상황에 나를 던져놓고 마침내 그 많은 위험과 어려움을 잘 참고 견뎌서 성공할 때, 큰 희열과 보람을 느낍니다. 뇌수술은 아침에 시작하면 오후 언제쯤 끝날지 모르는, 대단히 힘든 일입니다.

열몇시간씩 그렇게 극도로 정신을 쏟다 보면 도중에 너무나 지쳐서 당장이라도 모든 동작을 정지하고 좀 쉬었으면 싶을 때가 한두번이 아닙니다. 꼭 암벽 한가운데에 탈진한 채 매달려 있을 때 느끼는 기분과 똑같습니다. 그런 고통 하나하나를 어떻게든 참고 이겨나가는 과정 자체가 제게 만족감을 줍니다."

수술실 안에선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걸까? 조경기 박사는 국내 의학계가 인정하는 뇌종양과 척추종양 수술의 권위자다. 실력은 물론 수술횟수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거의 매일 수술 스케줄이 잡혀 있다. 그것도 아침부터 저녁까지 이어지는 대수술이 보통이다.

수술이 있는 날은 하루종일 온 몸이며 정신이 바늘끝처럼 예민해진다. 혹시라도 손이 떨릴까봐 수술당일 아침엔 절대 무거운 것을 들지 않는다. 특히 뇌수술 환자들은 대부분 생명이 위태로운 심각한 상태다.

극도의 긴장속에서 10여시간 수술에 몰두하다 보면 지치는 건 환자뿐 아니라 집도하는 의사도 마찬가지다. 웬만큼 강하지 않으면 탈진하기 십상이다. 철인체력으로 소문난 그도 어떨 땐 수술중 피로를 이기지 못해 잠시 다른 스태프에게 몇가지 처치를 지시한 뒤 한쪽 구석에서 10분쯤 급히 눈을 붙이고 일어나 다시 수술대에 돌아올 정도다.

의료사고를 막자면 궁한대로 그 수밖에 없다. 한번 메스를 들면 옆자리의 간호사가 바뀌어도 눈치채지 못한다.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 일부러 틀어놓은 음악소리가 들리는지 안 들리는지, 환자외엔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다. 몸도 쉴 틈이 없다.

손은 손대로 수술도구를 쥐고 있고, 발은 발대로 특수 설계된 의자의 버튼을 수시로 밟아대며 주변 장비를 조작하느라 바쁘다. 눈은 수술 내내 밝은 조명속에서 현미경을 들여다보느라 거의 핏발이 설 지경, 그 현미경의 위치를 조정할땐 입까지도 동원된다. 입으로 물어 움직이는 것이다.


극도의 긴장 요하는 수술, 체력으로 버텨

정신을 놓치면 큰 일이다. 이것은 생명의 뇌관을 건드리는 일이다. 뇌혈관의 크기는 고작 직경 1mm정도. 그 미세한 혈관을 자르고 접합하면서 둘레로 여덟 차례 꿰매기, 그의 수술은 대부분 그런 식이다. 실은 가늘다못해 육안으론 보이지도 않는다.

머리카락 굵기의 10분의 1에 불과하다. 한번 꿰매다가 잃어버리면 다시 찾지도 못한다. 사고의 위험은 도처에 도사리고 있다. 단 2-3mm만 오차가 있어도 환자는 그 즉시 반신불수가 되거나 다시는 세상을 보지 못한다. 죽거나 식물인간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신경외과 의사들의 수명은 짧다. 환자의 목숨은 그리도 잘 늘려주면서도 정작 자신들은 제 명대로 못 산다.

의사가 된 건 자신과의 약속 때문이었다. 어렸을 때 남산도서관장이었던 아버지 덕분에 도서관 책더미속에서 살다시피 했다. 그 가운데 슈바이처 전기가 있었다.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치료하며 살겠다고 마음먹었다.

산은 언제나 가까이 있었다. 코흘리개적부터 동네 뒷산 범바위를 오르내리며 자랐다.

아버지부터가 산악지역 출신이었다. 부친의 고향은 이북 해산진. 8ㆍ15해방때 가족이 남한으로 내려왔다. 그의 이름도 월남한 뒤 처음 서울(京)에 터(基)를 잡고 낳은 아들이라고 해서 부친이 지은 것이다.

1969년 연세대 의과대학에 입학했다. 공부 하나만으로도 벅찬 의대생 신분, 그러나 의대 산악부에 들어간 뒤 오히려 본격적인 산타기에 더 열을 올렸다. 전국의 산을 찾아 암벽, 빙벽을 오르내렸다. 숫기없던 성격이 서서히 바뀌었다. 그 흔한 축제나 데이트도 하지 않았다. 그럴 시간이 있으면 산에 갔다.

산악부원 중에서도 산 욕심이 유별났다. 고려대 산악반에 이어 두 번째로 백두대간 종주에 성공하는 기록도 세웠다. 무모하기론 그때부터 소문이 나 있었다. 아직 제대로 길도 나지 않은 그 험난한 고산준령을 넘어보자고 학생들을 모아놓고, 장비라고 가져간 것은 고작 5만분의 1 지도와 콤파스.

"지도 읽는 법도 모르면서 무슨 종주냐"는 핀잔에도 불구하고 무작정 밀고 나갔다. 산악반을 두 팀으로 나눠 양 끝점에서 각각 출발시킨 뒤 15일후 그 중간지점인 대관령에서 도킹한다는 계획이었다. 얼마나 무리한 일인지, 시간이 지나면서 깨달았다.

부르튼 발 때문에 절뚝거리는 학생들, 한 화전민촌을 지날땐 제발 그곳에서 자고 가자는 반원들의 하소연도 뿌리친 채 강행군을 계속하다가 결국 그들이 흘리는 눈물을 보고 뒤늦게 가슴 아팠던 적도 있다.

그래도 멈추진 않았다. 계획대로 15일만에 도킹. 모두가 '독하다'고 했다.

행여 산 때문에 학업을 망칠까봐 부모님은 내내 좌불안석이었다. 언젠가 암벽을 타다가 다쳤을땐 집에서 몰래 치료하다가 아버지께 들켜 크게 혼이 났다. 한번만 더 산에 가면 다리를 부러뜨려놓겠다는 고함까지 들었다.

그러나 부친은 끝내 아들의 '버릇'을 고쳐놓지 못하고 가셨다. 심지어 장래가 달린 의사면허시험 2주일전에도 산으로 달아났다가 돌아온 아들이었다. 산만 아니면 나무랄 게 없는 효자였다.


신경외과는 의료분야중 3D업종으로 취급

대학교 1학년때 척추종양수술을 받았다. 지난 K2등반때도 남몰래 허리통증을 겪었을 만큼 아직도 후유증이 있는 큰 수술이었다. 처음엔 까닭없이 한쪽 다리가 아파오다가 나중엔 걸음도 떼지 못하는 정도가 됐다.

병원에 갔더니 척추종양이라고 했다. 자신과 비슷한 증세로 1주일전 입원했다는 한 환자는 수술후 사지마비가 된 채 누워 있었다.

다행히도 무사히 수술이 끝난 그는, 그러나 그 몸으로 또다시 산행을 다닌 것이다. 하고많은 과목중에서도 특히 어렵다는 신경외과를 택한 것도 그런 자신의 병력과 무관하지 않다.

또한 신경외과는 누구나 원한다고 다 될 수도 없는, 당시 의대성적 상위권 중에서도 최상위권에게만 기회가 주어지는 선망의 분야였다.

인체를 다루는 의료분야중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겠지만, 그중에서도 인간의 생명을 지탱하는 최고의 중추를 다룬다는 자부심이 누구보다 컸다. 3D 취급을 받는 요즘에도 그것은 여전하다. <계속>

정영주 자유기고가

김명원 사진부 기자

입력시간 2001/04/25 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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