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오현의 길따라 멋따라] 삼척 덕풍계곡

지난 겨울엔 이 곳에도 눈이 많이 왔다. 마을까지 차가 다닐 수 있는 소로가 나 있지만 사람들은 자동차의 시동을 걸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완전히 고립된 생활을 하기를 3개월. 봄은 어김없이 찾아왔고, 사람 키만큼 쌓여있던 눈은 거짓말처럼 땅속으로 스며들었다. 하얗던 세상은 지금 연초록의 변주가 한창이다.

신록이 반짝거리는 계곡 사이로 신록의 색깔을 닮은 물이 흐른다.

강원 삼척시 가곡면 풍곡리 덕풍마을은 2년 전만 해도 오지 중의 오지였다. 삼척과 경북 울진의 경계를 이루는 응봉산(999m)의 깊은 골짜기에 들어 있다. 주민들은 지난 겨울의 고립에 대해서 "조상들은 수십 년 혹은 수백 년 바깥 세상을 보지 않고 살았는데 3~4개월을 버티지 못하겠냐"고 이야기한다.

토정 이지함은 이 곳을 '10승 지지'로 지목했다. 나라에 큰 난리가 나더라도 이 곳을 찾으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 것이라 했다.

또한 마을 이름 풍곡은 풍요로운 계곡이라는 뜻. 물이 마르지 않는다는 의미다. 수년에 걸친 가뭄으로 모든 것이 말라버렸을 때에도, 이 곳을 찾으면 곡식의 씨앗과 물을 얻을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덕풍마을은 이제 더 이상 오지가 아니다. 전체 주민이 30여 명 정도로 아주 작은 산촌이지만 초가 일색이었던 마을은 이제 현대식 통나무집까지 들어설 정도로 변했다.

불과 1~2 년 사이의 일이다. 마을로 들어서는 계곡 입구부터 마을까지의 계곡길이 조만간 포장된다고 한다. 오지 덕풍마을을 사랑했던 이들에게는 아쉬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왜 이런 산골짜기 마을이 개발되는 것일까. 한 가지 이유밖에 없다.

아름답기 때문이다. 그 숨겨진 절경이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덕풍마을까지 이르는 덕풍계곡은 트레킹 코스이다. 찻길이 날 정도이니 가파른 코스는 없다. 마을까지 약 6㎞. 쉬엄쉬엄 걸어도 1시간 30분이면 마을에 닿는다. 길은 계곡을 따라 나 있다. 계곡 초입부터 모습이 범상치 않다. 물은 티끌하나 섞이지 않은 청정수이다.

어마어마한 너럭바위를 파고 흐르며 짙은 비취색을 띠고 있다. 가파른 곳에서는 폭포로 떨어지고 느긋한 흐름에서는 깊은 소를 만들어 놓았다. 설악산의 백담계곡과 많이 닮았다. 아치형 철다리가 세 곳에 나 있다. 침목처럼 두꺼운 나무로 상판을 이었는데 이 위로 자동차도 다닌다.

마을은 산 속 분지에 자리를 잡았다. 깊은 골짜기 안에 이렇게 넓은 분지가 있다니. 우선 감탄이 터져 나온다. 주민들은 대부분 새로 지은 집으로 이사를 하고 옛집은 버려 두었다.

덕풍산장이라는 식당이 있다. 마을의 이장이 운영한다. 닭백숙 등 안주가 될만한 음식은 물론 간단한 밥도 판다. 직접 만든 순두부에 양념장을 풀고 강원도 감자밥을 말아 먹는 맛이 일품이다. 봄이면 봄나물, 여름이면 각종 푸성귀와 된장이 상에 오른다.

덕풍계곡 트레킹의 하이라이트는 마을에서부터 시작된다. 응봉산을 오르는 계곡이다. 골짜기는 갑자기 바위 벽으로 바뀐다. 그 바위 벽 아래로 사람 하나가 다닐만한 길이 나 있다.

약 2㎞을 오르면 제1 용소. 일반인은 여기까지가 끝이다. 그 위로는 본격적인 암벽등반 코스이다. 바윗길 양 켠으로 봄꽃이 한창이다. 깊은 산중에서나 볼 수 있는 돌단풍, 종꽃, 할미꽃 등이 연초록 신록과 어우러져 봄 계곡을 더욱 화려하게 꾸미고 있다.

권오현 생활과학부차장

입력시간 2001/05/02 2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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