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금강산서 하산하나?

바닥난 자금, 관광객 급감 등 사면초가

1998년 11월 18일 금강호가 동해항에서 힘찬 뱃고동 소리와 함께 반세기에 가까운 분단의 벽을 허물고 금강산을 향해 떠난 지 2년 6개월.

한반도 화해시대의 개막을 알리며 1,000만 이산가족의 한을 달래주던 금강산 관광사업이 현대의 자금력 부족과 남북한 당국의 책임회피로 언제 좌초될지 모를 위기에 처했다.


특혜시비 우려, 정부도 적극개입 못해

그동안 금강산 사업에서 4,000억원에 가까운 적자를 본 현대는 정부측의 지원이 없는 한 더 이상 사업을 감당할 수 없다며 조만간 금강산 관광선을 운항하는 현대상선을 사업에서 배제키로 하는 등 사실상 사업 중단 수순을 밟고 있다.

그러나 정부는 아직까지 묵묵부답. 금강산 사업이 중단돼서는 안된다는 원칙론에 공감하면서도 민간기업, 특히 현대에 대한 특혜시비를 우려해 이렇다 할 대책을 내놓지 못한 채 고심만 거듭하고 있다.

북한측의 대응도 미지근하기는 마찬가지. 북한은 금강산 관광대가로 현대측으로부터 받는 대북지불금을 월 1,200만 달러에서 절반인 600만 달러로 낮추는데 암묵적인 합의를 한 상태지만 금강산 특구 지정, 육로관광 개설, 관광지 확대 등 관광 활성화 방안에는 여전히 소극적인 입장이다.

이에 따라 현대 안팎에서는 '이대로 가다가는 조만간 금강산 관광이 전면 중단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점차 확산되고 있다.

그러나 금강산 사업 중단에 따른 파장을 우려한 정부가 국내 대기업들로 대북 컨소시엄을 구성, 사업에 참여하는 방안을 추진하는 등 뒤늦게 해법 마련에 나서 금강산 사업이 극적으로 회생할 가능성은 아직 남아있다.

또 고사직전의 현대측도 북한과의 담판을 통해서라도 금강산 사업을 지속한다는 의지를 비춰 의외의 돌파구가 마련될 수도 있을 것이란 전망이다.


무리한 사업추진 등 태생적 한계

통일정서에 기댄 현대의 주먹구구식 사업 시행이 오늘의 위기를 불러왔다. 금강산 관광사업은 1998년 태동 당시에도 대북사업에서 뭔가를 터뜨려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기업투자의 필수 조건인 수익성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무리하게 추진됐다는 지적을 받았다.

물론 이 같은 밀어붙이기식 사업 추진 이면에는 대북사업이 강원도 통천이 고향인 고 정주영(鄭周永) 전명예회장의 숙원사업이란 배경도 작용했다.

현대는 1998년 6월 북한과 금강산관광개발사업을 계약할 당시 98년부터 30년 동안 금강산 지역에 대한 독점적 관광사업권, 토지 및 시설 이용권을 보장받는 대가로 북한의 아ㆍ태평화위원회측에 6년에 걸쳐 총 9억4,200만 달러를 지급하기로 합의했다.

현대는 특히 1인당 입산료로 100달러를 책정했으면서도 막상 계약 때는 '무조건부 일괄지급방식'인 이른바 '럼섬'(lumpsum) 방식을 택해 오늘의 위기를 불러왔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실제로 현대의 이 같은 무리한 계약조건은 98년 11월 금강산 관광선이 출발한 이후부터 최근까지 금강산 사업 주체인 현대아산에 엄청난 자금부담을 안겨줬다. 현대는 지난 2월까지 대북지불금으로만 모두 3억5,600만달러(약 4,000억원)를 북한에 송금했다.

현대는 이를 충당하기 위해 현대상선을 통해 관광객 1인당 200달러씩을 입산료 명목으로 받고 있지만, 관광객수가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서 엄청난 적자를 감수할 수 밖에 없었다.

4월 15일 현재까지 금강산을 찾은 관광객이 39만여명(7,900만달러)임을 감안할 때 2억7,700만달러의 생돈을 북한에 쏟아부은 셈이다. 현대아산은 4차례의 증자를 통해 계열사로부터 4,500억원을 거둬들였으나 자본금이 전액 잠식되는 등 심각한 자금난에 봉착하고 말았다.

현대가 문제의식을 가진 것은 지난해 말. 뒤늦게 북한측과 대북지불금 축소 협상에 나서 올 2월부터 월 지급액을 절반(600만달러)으로 낮추기로 잠정 합의했지만 이마저도 근본적인 해결책은 되지 못한다는 분석이다.

월 600만달러의 대북지불금을 감당하려면 연 관광객이 30만명 수준에 도달해야 하지만 현 상황으로는 20만명에도 미치지 못할 전망이다. 게다가 미지급금도 감축이 아닌 기간만 연장해주는 지급유예 조건이다.

따라서 남북관계 전문가들은 금강산 관광의 근본적인 잘못이 현재처럼 관광객수에 상관없이 지불하는 대북지불금에 있다며 지금이라도 관광객수에 비례해 지급하는 방식으로 바꿔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관광선 운항 축소 등 배수의 진

현대의 자금난은 이제 하루하루를 버티기도 힘들 정도로 바닥을 드러냈다.

현대아산은 지난 2월부터 대북지불금을 절반으로 낮췄음에도 불구하고 2월 지급분중 200만달러만 송금했고, 3, 4월분은 한푼도 보내지 못했다. 그렇다고 계열사들에게 또 손을 내밀 처지도 아니다.

자동차와 중공업, 전자, 금융 등 주력사들은 사실상 남남이 된데다 정몽헌(MH) 회장의 계열사도 남의 사정을 봐줄 만큼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다급해진 현대는 지난해 말부터 북측에는 대북지불금 축소와 관광 활성화 방안을, 우리 정부측에는 카지노ㆍ면세점 사업 허가, 대북협력기금 지원 등 지원책을 줄기차게 요구해 왔다.

그러나 정부측이 무덤덤한 반응으로 일관하자 급기야 관광객 운송과 모객(募客) 업무를 맡고 있는 현대상선의 사업 철수를 결정하고 관광객 감소를 이유로 관광선 운항을 점차 축소하고 있다.

현대가 금강산 사업에서 현대상선을 배제키로 한 것은 정부에 대해서는 '배수의 진'을 치고, 현대상선은 살린다는 다목적 포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사업초기 단계부터 지금까지 금강산 사업과 무관할 수 없으면서도 선뜻 지원대책을 내놓지 못하는 정부측에 '사업 중단'이라는 최후통첩 카드를 내민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자본금이 바닥난 현대아산이 관광선 운영까지 떠안는다는 것은 곧바로 관광중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특히 MH가 이끄는 현대그룹의 지주회사인 현대상선의 동반 부실을 막기 위해서도 불가피한 조치였다는 해석이다. 하루 평균 2억원씩의 적자를 감수하고 있는 현대상선을 그대로 방치할 경우, 상선도 좌초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현대는 상선이 발을 빼더라도 현대아산이 관광선을 직접 운영하거나 현대상선의 운영비를 보존해주는 방식으로 사업을 유지한다고 한다. 문제는 현 상태로는 현대아산이 이를 떠안을 자금력과 사업능력이 전혀 없다는 점이다.

김윤규 현대아산 사장은 이와 관련, "금강산 사업대가 인하와 육로관광, 금강산 및 개성지역 특구지정을 통한 관광활성화 방안이 전제되지 않으면 현대아산의 단독사업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현대는 금강산 사업 파트너인 북한 아ㆍ태평화위원회측에도 관광활성화 방안이 지연될 경우 더 이상 사업을 지속할 수 없다는 입장을 최근 통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대는 북한측에 대북지불금 축소 협상과는 별도로 육로관광 조기실현, 개성ㆍ금강산 경제특구 지정, 관광지 확대 등 관광활성화를 위한 대책 마련을 강력 촉구하고 있다. 현대는 4월27일 MH와 김윤규 사장의 방북을 시작으로 잇따라 고위 인사들을 북한으로 보내 담판을 짓겠다는 태세다.


남북한 당국에 공 떠넘긴 현대

현대가 두 손을 들고 버티기에 들어감에 따라 금강산 사업의 운명은 이제 남북한 당국의 대응에 달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부는 남북한 당국을 동시에 압박하는 현대측의 양동작전에 곤혹스러워하면서도 남북화해 시대의 상징인 금강산 사업이 중단될 경우 미치는 파장을 우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

정부는 일단 금강산 사업의 지속을 위해 정부가 할 수 있는 범위내에서 간접적인 지원은 검토하겠다는 입장이지만 뾰족한 묘안을 찾지 못하고 있다.

현대가 요구하고 있는 실향민, 즉 이산가족 관광요금의 정부 부담이나 고성항 시설 인수 등은 국민정서상 어렵고 비현실적인 구상인데다 남북협력기금 지원 방안도 '30대 기업 제한' 규정에 걸려 안된다는 입장이다.

따라서 정부는 금강산 사업의 수익구조를 개선하는 쪽으로 정부의 역할을 한정하고 한때 카지노ㆍ면세점 사업의 허가를 적극 검토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는 그러나 강원도 정선 카지노 지역 주민들과 정치권에서의 반발이 의외로 거세자 '푼돈 쥐어주고 망신 당하는 꼴'이라며 슬그머니 이를 철회하고 말았다.

정부는 대신 국내 대기업들을 포함한 대북컨소시엄을 구성해 금강산 사업을 지원키로 하고 5~6개 대기업에 의사를 타진한 것으로 알려졌다. 물론 업계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강력 반발했다는 후문이다.

정부는 현대가 북한과의 협상을 통해 대북지불금을 현실화하고 경제특구 지정, 육로관광 개설 등의 관광활성화 방안이 성사되면 투자가치가 충분하다는 논리로 대기업들을 설득한다는 입장이어서 결과가 주목된다.

북한측의 대응 수위도 관심거리다. 북측은 그동안 대북지불금을 월 1,200만달러에서 600만달러로 낮춰줬는데도 남한 당국이 전혀 나서지 않고 있는데 대해 강한 불만을 표시했다는 전언이다.

북측은 그러면서도 현대측에는 '어떤 일이 있어도 금강산 관광을 유지하면서 협상에 임한다'고 약속, 일단은 금강산 관광을 당장 중단시키는 일은 없을 것임을 내비쳤다.

그러나 지금까지 남북관계에서 북한의 돌출행동을 감안할 때 북한이 갑작스럽게 관광 중단 방침을 선언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분석이다. 2~4월분 관광대금조차 제대로 받지 못한 북한이 금강산 관광을 둘러싼 현대와 남한 정부간 줄다리기를 언제까지 참고 기다려줄지는 아무도 예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대기업 참여로 돌파구 마련될 수도

현대 안팎에서는 정부가 북한과 직접 협상에 나서 금강산 특구지정과 육로관광을 성사시켜 수익성을 높인다면 국내 대기업들의 참여로 금강산 사업이 새로운 전기를 맞을 수도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현대측은 현대상선이 빠지더라도 어떤 식으로든 사업을 계속한다는 방침이다.

문제는 근본적인 수익성 개선대책이 마련되지 않는 한 관광업무를 누가 맡더라도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적자를 감당할 수 없다는 점이다.

따라서 금강산 사업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현대-북한간 사업계약에 가장 큰 문제점으로 지적되는 대북지불금을 현실화하는 등 근본적인 조치가 선행돼야 할 것으로 보인다.

남북문제 전문가들도 남북교류 협력시대에 금강산 관광사업이 차지하는 비중을 감안할 때 남북한 당국과 현대 등 이해당사자들이 서로 한발씩 양보, 관광선이 끊어지는 파국만은 막아야 한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이종석 세종연구소 연구위원은 "금강산 사업은 단순한 수익성 차원에서 접근해서도 안되지만 무조건적인 지원도 곤란하다"며 "정부 지원은 현대를 살리는 것이 아닌 금강산 관광을 살리는 쪽에 맞춰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금강산 사업은 앞으로 정부가 어떤 식으로든 개입해 명맥은 유지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분석된다. 특히 남북한 당국이 직접 육로관광과 특구지정 등의 관광활성화 방안에 합의할 경우, 수익성 개선과 자금유치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어 금강산 관광 사업은 탄력을 받을 수도 있을 전망이다.

그러나 민간사업에 정부가 개입해서는 안된다는 반론도 만만찮다. 조동호 한국개발연구원(KDI) 북한경제연구팀장은 "금강산 관광이 잘되면 좋겠지만 원칙적으로는 관광선이 중단되더라도 정부가 민간사업에 개입해서는 안된다"며 "남북경협도 중요하지만 경제성을 무시한 사업에 더이상 미련을 가질 필요가 없다.

과감하게 포기하는 것이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오히려 남북관계에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금강산 관광사업은 남북한측이 육로관광이나 특구지정 등 후속조치를 얼마나 빠른 시일내 결정하느냐에 따라 그 운명이 좌우될 전망이다.

민병오 세계일보 경제부 기자

입력시간 2001/05/09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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