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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프 정치학] '밀실 요정' 정치에서 '필드'정치로 중심이동

1989년 9월 1일 하오 민주당 총재였던 김영삼 전대통령은 경기 광주군 소재 뉴코리아CC에서 신ㆍ구 당직자 15명과 골프를 치며 친목을 다졌다.

이 것은 김 전대통령이 1979년 국회에서 의원직 제명과 신민당 총재직 정지 가처분 조치를 당한 후 술 담배와 함께 골프를 끊은 지 꼭 10년만의 첫 '골프장 행차'였다.

1987년 대선을 앞두고 선거자금이 부족해 20년간 보유했던 서울컨트리클럽 회원권을 5,000만원에 처분한 바 있는 YS는 이날 "앞으로 소속 의원들과 골프를 해야 겠다"고 골프 재개를 선언했다.

그리고 한달 뒤인 10월2일 YS는 경기 안양CC(현 안양베네스트)에서 당시 공화당 김종필 총재와 27홀 골프 회동을 갖고 3야당 공조를 통한 5공화국 청산에 합의했다.

당시 YS와 황병태 특보, JP와 김용환 정책의장이 한조를 이뤘는데 JP는 오랜만에 골프 채를 잡은 YS와 점수차를 벌리지 않으려고 배려하는 모습이 역력했다고 한다.

이날 YS는 JP가 보는 가운데 드라이브 티샷을 날리다 중심을 잃었는데 이 장면이 이튿날 도하 신문에 일제히 게재되기도 했다. 이 날을 기점으로 두 사람은 한겨울 방한모까지 쓴 채로 연이어 골프 회동을 했고, 4번째 골프 회동이 열린 1990년 1월 6일 민주ㆍ공화 양당 통합을 전격 발표했다.

두 야당 총재의 잇단 골프 회동은 마침내 같은해 1월22일 여당인 민자당을 포함한 3당 대통합으로 이어졌다. 국내 정치사에서 골프 회동이 만들어 낸 첫 '결실'이었다.


서울 근교 골프장은 위원님들 차지

정치인들의 골프 열기가 전에 없이 뜨겁다. 요즘 정가에서 가장 유행하는 회동은 골프 모임이다. 주말이나 평일 가릴 것 없이 서울 근교 주요 골프장에 가보면 유명 정치인들은 쉽게 볼 수 있다.

의사당에서는 늦장 출석에 조퇴가 잦은 의원님들이지만 '골프 회동'이 있는 날이면 어김없이 약속을 지킨다. 명예 총재가 골프 마니아인 자민련은 소속의원 20명중 19명이 수준급 골프 실력을 자랑해 '골프당'이라는 별명이 붙었을 정도다.

요즘 여야를 막론하고 최고위층간의 굵직한 현안 문제는 골프 회동에서 논의되는 경우가 많다.

오비이락인지도 모르지만 지난해 7월 JP와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의 골프 회동(폭우로 실제 골프는 치지 못했음) 이후 국회법 날치기 처리가 강행됐고, 올초 민주당의 '의원 꿔주기 '전후에도 관계자들간의 골프 회동이 있었다.

이제 골프를 못 치면 주요 정책 결정에서 왕따 당하거나 손해를 볼 정도라는 말이 나돌 정도로 정계에서 골프의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다. 최근에는 개혁의 선두에 섰다는 386세대 의원들까지도 골프를 배우느라 여념이 없다. 각 당의 고위층은 물론이고 사무처의 직원들까지 골프 클럽을 잡는다.

골프가 이처럼 갑작스럽게 정치 활동의 중심부로 들어오게 된 요인은 무엇일까. 무엇이 '골프 정치'를 가져온 것 일까.

총칼의 위협이 상존했던 1970년대말 군사 독재 시절까지만 해도 국내 정치는 '밀실 야합'의 수준을 넘지 못했다. 국가나 각 정당의 주요 의사 결정은 극소수 실권자들 간의 비밀 회합으로 결정됐다. 당시 정치인들이 밀실 대화 장소로 즐겨 찾던 곳은 요정.

삼청각 대원각 등 서울 시내 중심가에 있던 호화 요정들은 정치인들이 즐겨 찾는 그들만의 비밀 아지트였다. 밤늦은 시각 이곳에선 고급 술과 여자를 낀 질펀한 밤의 향연이 벌어졌고, 그 속에 국가 중대사가 좌지우지 됐다.


정치무대의 중심이 된 골프장

이런 '요정 밀실'정치는 1980년대 중반부터 자취를 감춘다. 86아시안게임, 88서울올림픽을 전후해 강남 지역에 현대적 시설을 갖춘 호화 룸살롱들이 대거 들어서면서 강북의 요정들이 외면 받기 시작한다.

요정들이 청와대나 보안사(기무사) 같은 정부 주요 시설에 인접해 있어 외부의 눈에 뜨일 우려가 있는데다 이미지도 좋지 않아 굳이 고집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요정 정치가 사라지고 '룸살롱'으로 밀실 정치의 무대가 옮겨지게 된다. 하지만 룸살롱도 시대 변화와 함께 또 한번 변화를 맞는다. 그 대안이 바로 골프 정치다.

정치인들이 골프 정치에 골몰하는 데는 여러 요인이 작용한다. 가장 큰 이유는 골프라는 스포츠가 지닌 원초적인 매력이다. 한번 빠지면 쉽게 벗어나기 힘들 정도로 재미 있는 스포츠다.

일본 모리 요시로 전 총리는 고교 실습선 충돌사고로 인명 피해가 났다는 보고를 받고도 골프를 계속 했고, 클린턴은 유고 공습 때도 안보회의를 마치면 골프장으로 달려 갔을 정도다.

건강에 도움이 되는 점도 크게 작용한다. 각 당의 고위층들은 대개 50대를 넘어선 장년층들이다. 나이에 걸맞지 않게 몸을 해쳐 가면서 굳이 룸싸롱에서 술과 씨름 하느니, 필드에서 4~5시간 동안 여유 있게 운동을 하는 편이 더 낫다는 판단이 선 것이다.

한 중견 정치인인 "새벽까지 술집에서 여자들을 끼고 몽롱한 상태에서 협상을 하느니, 밝은 대낮에 맑은 정신에서 자연을 벗하며 하는 대화와 협상이 훨씬 생산적이고 효과적이라 골프 회동을 선호하게 된다"고 말했다.

게다가 골프는 1인당 30만원 정도의 비용이면 충분히 접대가 가능해 경제적으로도 술 자리 보다 부담이 적다.

그리고 라운딩 후 옷을 훌훌 벗어 던지고 함께 목욕을 하며 정담을 나눌 수 있어 의견을 조율하거나 껄끄러운 관계를 개선하는데 골프만한 게 없다는 게 정치계의 중론이다.

골프 회동은 기존 요정이나 룸싸롱의 '밀실 정치'와 달리 대외적으로 대화와 개방의 '열린 정치'를 상징한다는 점 또한 매력을 끄는 요인의 하나다. 공개된 장소에서 정적이나 경쟁자들과 골프를 통해 상호 이견을 조정하는 대화 형식은 정치인들에게 그럴싸한 명분이 된다.

특히 도청 기술이 발달해 사무실이나 룸싸롱 같은 실내에서는 정보 누수의 위험마저 크다. 골프 회동은 이런 도청의 우려가 전혀 없다는 점도 고위 정치인들에겐 적잖은 위안거리가 되고 있다.

최근 골프가 대중화하면서 예전처럼 골프 치는 정치인을 백안시 하는 풍조가 사라진 점도 '골프 정치'를 앞당긴 이유 중 하나다.


정치 뒷전으로 밀어낸 '골프정치인'이 문제

국내 골프 정치사에서 앞서 언급한 1990년 YS와 JP의 3당 합당 회동이 첫 결실이라 할 수 있다. 이 회동으로 YS는 평생의 숙원이던 대통령 자리에 오를 수 있었고, JP는 꺼져가는 정치 인생의 불씨를 되살릴 수 있었다.

하지만 YS는 집권 후 대권을 안겨주는데 일조 했던 골프를 금지하는 조치를 내렸다. 한 때 '골프는 너무 재미있는 게 단점'이라고 말했던 YS는 이런 이유 때문인지 대통령 재임 기간에 공직자 골프 금지령을 내렸다.

당시 YS는 몰래 필드에 나간 최선정 보건복지비서관을 대기 발령 낸 것을 비롯해 전두환 전대통령과 평일 골프를 친 강원 경찰청장을 좌천시키는 등 골프에 관해서는 엄격한 조치를 내렸다. 이로 인해 태동기에 있던 골프 클럽과 의류, 골프장 등 국내 골프 관련 업계가 한때 위축되기도 했다.

요즘 국산 골프 용품으로 각광을 받고 있는 랭스필드(주)는 YS 집권 당시 골프업계에 대한 은행권의 대출이 전면 금지되는 바람에 부도가 나는 불운을 겪어야 했다. 랭스필드는 그러나 국민의 정부 들어 재기에 성공, 현재는 국산 골프 용품 1위 자리로 올라 섰다. 랭스필드의 재기에는 JP의 지원이 큰 힘이 됐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살얼음 형국에서도 골프에 빠져 있던 일부 공직자들은 기발한 아이디어로 '도둑 골프'를 쳤다. 이때 유행한 것이 △가명으로 부킹 하기 △인적이 드문 새벽 첫 팀이나 오후 막 팀으로 치기 △골프 가방에 가짜 이름표 달기 △동반자의 차동차 이용 하기 △해외 원정 골프 하기 등의 다양한 위장술이 등장 했다.

이어 집권한 김대중 대통령은 야당 총재시절 "골프장을 논밭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말을 했을 정도로 골프에 부정적이었다.

하지만 1997년 대선 때 공동 여당의 한 축인 JP에 대한 배려의 뜻과 상류층 민심을 잡기 위해 '골프 대중화'를 선언했다.

집권 후에도 본인은 안 하지만 YS와 달리 골프에 대해 개방적인 입장을 취했다. 특히 김대통령 취임 초기 IMF 한파로 국민들의 사기가 꺾여 있던 때 '골프 신동'박세리(삼성전자)가 세계 최정상의 무대인 미국 여자프로골프협회(LPGA) 투어에서 잇단 승전보를 전하며 낭보를 알려준 것이 계기가 되어 오히려 골프를 장려하는 정책을 폈다.


참을 수 없는 골프의 매력

'골프 정치'의 유행으로 야밤 밀실 정치의 무대가 대자연이 숨쉬는 광활한 필드로 나온 것은 어떤 면에서 바람직한 현상이다.

하지만 최근 정치권의 도를 넘어선 골프 정치의 양태는 우려할 만하다. 골프 정치의 선두 주자임을 자임하는 JP는 정치적 위기에 몰려 칩거할 때 마다 골프로 자신의 마음을 다스릴 정도로 골프에서는 경지에 올라있다.

그는 "공직자가 골프를 치더라도 남의 눈썰미에 벗어나지 않게 분수에 맞게 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JP는 지난해 자신의 골프 약속을 맞추기 위해 민생 법안 처리를 위한 단독 국회 개회 시각을 연장하게 했는가 하면, 집중 호우로 물난리가 난 용인 지역에서 수중 골프를 쳐 국민의 비난을 받았다.

골프에서는 야권도 역시 자유롭지 못하다. 한나라당 중진 의원들은 최근 여권 지도부의 고액 골프 파동으로 국민 감정이 고조돼 있는 것도 아랑곳 않고 단독 국회 소집중인 7일(월요일)과 11일(금요일) 거푸 골프 회동을 가졌다.

여야 전체로 놓고 보면 오히려 골프를 치는 인원은 한나라당이 더 많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이유로 지난번 내기 골프 파동이 났을 때도 한나라당은 다른 때와 달리 강력한 대여 공세를 취하지 못했다.

골프는 스포츠 중에서 유일하게 심판 없이 경기하는 신사 운동이다. 신사적인 운동을 한다고 모두가 신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아직도 우리 국회는 파행과 날치기, 욕설이 오가는 비신사적인 행위가 끊이지 않고 있다. 기왕 골프 정치를 한다면 의정활동에 영향을 주지 않는 범위에서, 최소한의 정치 신사도를 배울 수 있기를 국민들은 바란다.

송영웅 주간한국부 기자 herosong@hk.co.kr

입력시간 2001/05/16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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