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현의 영화세상] 드림웍스의 ‘뒤집기’와 디즈니의 ‘변신’

어차피 승부란 뻔했다. 사람들은 ‘반란’을 좋아한다. 기존 질서와 전통과 권위를 한번 뒤집어보는 것. 현실에서는 불가능하지만 영화는 가능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간접적이나마 아니면 잠시 ‘행복한 반역자’가 되기를 즐거워한다.

‘뒤집기’는 쉽고, 변신은 어렵다. 씨름의 기술처럼 ‘뒤집기’는 단 한번으로 역전이 가능하지만, 변신은 그렇게 안된다.

여러 번의 시행착오를 거쳐야 가능하다. ‘변신’은 모험이다. 지금까지 쌓은 것들, 그 위에서 쉽게갈 수 있는 길을 버리고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한다. 조금의 변신으로는 그 변화가 나타나지도 않는다.

오히려 어설프고 허술하고 어색하다. 반면‘뒤집기’는 대상이 분명하다. 기존의 모델들을 하나하나 재치있게 뒤집기만 하면 어느 정도 성공이 보장된다.

올 여름, 그 차이를 두 편의 애니메이션이 극명하게 드러내 준다.

드림웍스의‘슈렉’과 디즈니의 ‘아틀란티스, 잃어버린 제국’ 의 명암. ‘슈렉’이 현재 미국에서 2억4,000만달러의 수익을 올리며 올해 개봉작중 최고 흥행성적을 거두고 있는 반면, ‘아틀란티스…’는 2억달러도 돌파하기 힘든, 디즈니 애니메이션 사상 최악의 참패를 기록할 운명이다.

국내에서도 그 명암이 그대로 이어질 조짐이다. ‘슈렉’이 130개 상영관을 점령하면서 첫 주말 22만명을 기록한데 비해 ‘아틀란티스…’는 시사회에서부터 시큰둥했다.

드림웍스와 디즈니. 둘은 애니메이션에서는 태생적으로 ‘개와 원숭이 사이’이다. 디즈니에서 쫓겨나다시피 한 제프리 카젠버그가 스필버그와 손잡고 드림웍스를 세울 때 그는 이미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공략을 목표로 삼은 셈이다. 당연하다.

개인적 감정을 떠나, 디즈니의 아성을 무너뜨리지 않고는 정상에 설수 없기 때문이었다. 처음 드림웍스는 디즈니와 다른 연령층을 위한 작품으로 그것을 이루고자 했다.

이를테면 ‘개미’ ‘이집트왕자’ ‘엘도라도’ 같은 다분히 성인취향의 애니메이션. 그러나 그것은 결국 ‘나눠가지기’일뿐이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디즈니 뒤집기를 통한 디즈니 영역 빼앗기. ‘슈렉’은 철저히 디즈니의 역사이자 전통인 동화세계를 뒤집는다.

“옛날 예쁜 공주가 살았는데…” 라는 식의 시작과 “야수는 멋진 왕자로 변해 둘은 행복하게 살았단다”는 식의 결말을 부정한다. 못난이들의 유쾌한 사랑과 해프닝, 그리고 기존 영화의 기발한 패러디는 그동안 디즈니 동화세계가 구축해온 ‘계급 우월주의’ ‘인종우월주의’ ‘미적 아름다움의 우월주의’ 와 환상을 일시에 깨뜨리며 그것에 못마땅한 사람들에게 반란의 대리만족을 준다.

디즈니도 잘 안다. 이제 그런 동화는 더 이상 사람들을 꿈에 빠져들게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사실은 디즈니로서는 더 들어갈 그런 동화세계도 없다.

디즈니의 변신은 여기서 출발했다. 그렇다고 스스로 자기를 부정하는 ‘뒤집기’를 할 수도 없다. ‘아틀란티스…’에는 그런 고민이 보인다. 그래서 마치 ‘잃어버린 제국, 새로운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제국’ 을 찾아 떠나는 듯한 여행.

거기에는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트레이드 마크인 흥겨운 뮤지컬도, 신나는 군무도 없다. 신데렐라나 백설공주 같은 아름다운 공주도 없다. 주인공인 마일로는 큰 안경을 쓴 투박하고 평범한 얼굴이고, 게다가 아틀란티스 공주 키다는 일본만화 주인공 ‘나디아’를 닮았다.

실사 만큼 생생한 바닷속 풍경과 다양한 소품들이 디즈니의 기술을 자랑하고, 동화의 환상과 음악이 떠난 자리에 ‘인다아나 존스’ 식의 액션과 스릴을 집어넣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독창적인 변신이 아니다. 독창성을 잃어버리면 감동도, 짜임새도 자연히 잃는다. 그렇더라도 변신만이 살 길이다. 영화 뿐만이 아니다. 뒤집기는 한 번의 반란일 뿐이다. 진정한 자신의 모습이 아니다. 새로운 자기를 만드는 일. 어렵다고 포기하면 ‘새로운 제국’은 영원히 찾지 못한다.

입력시간 2001/07/19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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