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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를 여는 사람들](16) 서울대 물리학부 임지순 교수(上)

[미래를 여는 사람들](16) 서울대 물리학부 임지순 교수(上)

"탄소는 과학의 획기적 변화 이끌 소재"

“나노 기술의 진흥으로 21세기는 ‘실리콘 밸리’에서 ‘카본 밸리’로 과학산업의 대명사가 바뀔 것입니다.”

새천년준비위원회와 청와대 정책기획위원회 공동주최로 지난해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열린 새천년 국가운영전략과 비전을 마련하기 위한 대토론회에서 한 발표자가 이런 전망을 했다.

과학기술의 선진국이라고 할 수 없는 우리나라에서 이 같은 메가트렌드를 예측하는 것이 어색하게 보일 수 있었다. 그러나 수긍하는 듯한 분위기였다. 왜 그랬을까.


탄소나노튜브 연구경쟁 촉발

발표자가 임지순(任志淳ㆍ50) 서울대 물리학부 교수였기 때문이다.

임 교수는 지금의 실리콘 반도체보다 월등하게 우수한 탄소 반도체의 가능성을 입증해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고 있는 물리학자이다. 그래서 한국 과학자 중 노벨상에 가장 근접한 연구자 중 한명으로 꼽히고 있다.

“그 때 그런 말을 사용했지요. 심각한 의미까지 둔 것은 아니고, 단지 나노 기술과 카본, 즉 탄소의 잠재력을 알리고 우리가 이를 슬기롭게 활용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입니다.”

임 교수의 서울대 교수연구실은 생각과 달랐다. 전자현미경 같은 ‘굉장한’ 연구장비를 갖추고 있을 줄 알았는데 조금 전 누군가와 토론을 한 듯 숫자와 각종 수학기호가 마치 난수표처럼 쓰여져 있는 백판과 평범한 데스크탑 컴퓨터, 연구서적, 메모지 정도가 전부인 듯했다.

특이한 물건이 있다면 어린이 장난감 같이 생긴 아담한 크기의 플라스틱 조형물이었다. 이 조형물이 바로 그가 연구하고 있는 탄소나노튜브를 본떠 만든 것이다.

“저는 물리학을 연구하는 사람이지요. 그래서 실험장비보다는 계산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또 계산보다는 생각하는 데 시간을 더 할애하고 있습니다. 일반 사람들은 열심히 실험과 계산을 한 결과 훌륭한 연구성과가 나온다고 생각하지만 저 같은 기초 과학자들은 아이디어에서 먼저 출발합니다. 그만큼 생각이 중요한 것이지요.”

세계 각국이 경쟁적으로 탄소나노튜브를 연구하고 있다. 이 경쟁을 촉발한 주인공이 바로 임 교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탄소나노튜브는 탄소 원자들로 이루어진 나노미터(nanometer : 10억분의 1㎙) 크기의 원통 형태(튜브)의 물질이다.

탄소 원자가 3개씩 결합해 벌집모양의 구조를 갖게 된 탄소평면이 도르르 말려서 관 모양이 됐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1991년 초. 일본 NEC연구소의 이지마 박사가 전자 현미경을 들여다 보다가 이 신비한 튜브 형태의 탄소분자를 발견했다.

탄소나노튜브는 튜브의 지름이 얼마나 되느냐에 따라 도체가 되기도 하고 반도체가 되는 성질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세계가 흥분하기 시작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흑연 덩어리이나 숯 검덩이에 불과한 이 물질을 반도체 소자로 가공할 수만 있다면 실리콘으로 만들어지고 있는 메모리 칩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의 놀라운 메모리 칩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이론적으로 실리콘을 이용한 메모리칩은 16기가바이트 이상의 집적이 불가능하지만 탄소나노튜브를 활용하면 기가의 1,000배인 테라바이트 급의 집적도를 가진 메모리 칩을 만들 수 있다.

탄소나노튜브를 반도체 소자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도핑(dopping : 소량의 불순물을 섞어 전기가 통하게 만드는 것)을 해야 한다. 그런데 탄소나노튜브를 도핑하는 작업이 너무나 어려워 실용화가 사실상 불가능한 것으로 전해지면서 탄소나노튜브에 대한 열기도 식기 시작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임 교수가 돌파구를 열었다. 그는 여러 가닥의 나노튜브를 붙여 일종의 밧줄로 만들면 나노튜브 간의 상호작용에 의해 전기적 성질이 바뀌면서 저절로 도핑이 된 것과 같은 효과가 나타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탄소나노튜브를 다발로 묶으면 도핑이란 어려운 과정을 거치지 않고도 바로 반도체가 된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좌우가 똑 같은 나노튜브가 서로 포개지면서 튜브 형태가 일그러지고, 이 바람에 대칭성이 깨어져 불순을 섞은 것과 같은 효과가 나는 것이지요. 거울 대칭성(mirror symmetry)의 붕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같은 내용을 담은 임 교수의 논문이 1997년 저명한 학술지인 네이처 지에 발표된 이후 세계 각국은 탄소나노튜브를 꼬아 만든 밧줄을 반도체 소자로 이용하기 위한 경쟁에 속속 뛰어들었다.


벽시계 크기의 슈퍼컴퓨터 가능

이에 따라 실용화도 점차 앞당겨 지고 있다. 임 교수 자신이 지난해에 미국 UC버클리(캘리포니아 버클리 주립대학) 연구팀과 공동으로 트랜지스터를 제작했고, 미국 IBM사의 알마덴 연구센터는 지난 5월 전기충격을 이용해 탄소나노튜브를 분해, 트랜지스터를 대량으로 생산하는데 성공했다.

IBM은 이 기술이 본격 개발되면 현재의 반도체의 집적도가 획기적으로 높아져 초대형 슈퍼 컴퓨터를 가정용 벽시계 정도의 크기로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탄소나노튜브가 엄청난 집적도 뿐만 아니라 강철보다 100배 강하고, 섭씨 3,593도에서도 끄덕하지 않는 특성을 가지고 있어 고열(高熱)발생 같은 메모리 칩 설계의 난제를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임 교수는 그러나 “탄소나노튜브를 메모리 칩으로 활용하기까지 넘어야 할 산이 많다”고 말했다.

“탄소나노튜브는 2억 개를 한다발로 묶어야 겨우 머리카락 굵기가 될 정도로 몹시 작습니다. 따라서 지금처럼 실리콘 위에다 회로를 그려넣는 현재의 반도체 기술로는 설계가 어렵습니다.

또한 탄소나노튜브 밧줄을 원하는 형태 대로 배열하는 기술도 필요하구요. 물리학적으로 접근할 뿐 직접 실용화에 참여하고 있지 않아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10년 뒤인 2010년쯤 되어야 탄소나노튜브 반도체가 실용화될 것 같습니다.”

초전도체(그는 지금도 전체 연구의 20%를 초전도체에 할애하고 있다고 한다)와 물리학과 생물학의 공통영역에도 관심을 가졌던 그가 탄소나노튜브에 본격적으로 몰입한 것은 안식년이었던 96년, 교환교수 자격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던 UC버클리로 떠나면서부터였다.

“안식년에 재충전하는 것도 좋겠지만 여유가 있을 때 뭔가 새로운 연구를 하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한 그는 당시 연구가 답보 수준에 머물고 있던 탄소나노튜브를 주목했고, 이후 1년을 안식년이 아닌 연구의 해로 보냈다.

그런데 정작 탄소나노튜브의 첫 실용화 상품은 반도체가 아니라 TV브라운관 같은 디스플레이 장치가 될 것 같다.

삼성종합기술원이 얼마전 전계방출표시장치(FED)에 탄소나노튜브를 사용해 세계 최초로 빛의 3원색을 4.5인치 크기의 화면에 가득 발현시키는데 성공하면서 시제품이 2~3년 내에 나올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삼성의 FED 연구를 자문하고 있는 임 교수의 설명.

“동그랗게 말려있는 탄소나노튜브의 끝은 주사침처럼 구멍이 뚫려 있어 탄소나노튜브 하나하나가 전자를 방출시키는, 훌륭한 전자총 역할을 하게 됩니다. 만약 관 형태인 튜브가 아니라 평면이라면 이런 요술을 부리지 못하겠지요. 연구를 할수록 자연이 더 오묘하게 느껴집니다.”<계속>

김경철 주간한국부 차장 kckim@hk.co.kr

입력시간 2001/09/04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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