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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일본(75)] 이에(家)

[재미있는 일본(75)] 이에(家)

아이를 죽음으로 모는 부모의 학대나 노인의 고독사 등 일본의 사회 문제는 일본의 가족이 붕괴하고 있는 단면이다.

노인의 고독사는 그렇다 치더라도 아이의 학대사는 단순히 핵가족으로 이행한 결과만으로 보기도 어렵다. 같은 핵가족이지만 일본 가족의 모습은 우리 눈에도 낯선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일본 주부들의 중요한 일과의 하나는 해가 뜨면 베란다에 이불과 요를 널었다가 해지기 전에 먼지를 털어 걷는 일이다.

해질 무렵이면 아파트 단지는 먼지를 턴다고 이불과 요를 때리는 소리로 진동한다. 자세히 보면 부부의 이불과 요가 한결같이 1인용이다. 침대 생활을 하는 경우에도 대부분 더블이 아닌 트윈을 고른다.

이런 잠습관은 부부의 모습과도 겹쳐진다. 퇴근후 술자리를 앞두고 집에 전화를 거는 일본인들은 참 드물다. 술자리가 늦어져 전철이 끊기는 바람에 회사 휴게실이나 이른바 '캡슐 호텔'에서 자게 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거의 연락을 하지 않는다.

그만큼 아내의 바가지나 잔소리가 없는 셈이지만 정년 퇴직후 돌연 이혼장을 내미는 '데이넨 리콘(停年離婚)'의 만연으로 보아 그리 부러워할 일도 아니다.

부모와 자녀 관계도 비슷하다. 자녀가 일단 결혼하거나 독립하면 의외로 냉담한 관계가 된다. 자산 자체의 유지가 사회적 의미를 갖는 거액의 자산가를 빼고 자식에게 재산을 물려 주겠다는 노인들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결혼한 자식이 경제적 곤란을 겪어도 경제적 도움을 주지 않고 마찬가지로 자식들도 부모의 경제적 어려움에 무관심하다.

도쿄(東京)교육대학의 야마다 마사히로(山田昌宏)교수는 '기생충'과 '독신'을 뜻하는 영어를 조합해 '패러사이트 싱글(Parasite Single)'이란 말을 만들었다.

굳이 우리말로 옮기자면 '기생 독신족' 정도로 경제력을 갖고도 부모에 빌붙어 사는 독신족을 뜻한다. 결혼을 하지 않은 자녀는 으레 부모와 같이 사는 우리로서는 이런 비난을 담은 말을 쓰기 어렵다.

이런 차이는 일본 전통의 '이에'(家) 개념에서 어렴풋한 흔적을 더듬을 수 있다. 이에(家)는 가족이 거주하는 공간, 또는 집안이나 가문을 뜻한다.

그러나 고대 일본에서 개별 건물은 '야'(屋)·, '무로'(室), '구라'(倉)로 불렸고 이에는 건물이나공간을 뜻하는 말로는 쓰이지 않았다.

대신 시설을 가리키는 말로는 '야케'(宅·家)라는 말이 쓰였으나 가족 단위의 거주 공간은 아니었다.

야케는 기본적으로 도랑이나 담으로 둘러 싸이고 '야'(宅) 와 '구라'(倉)를 갖춘 한 구획의 시설을 가리켰다. 소규모 공동체의 중심 시설이자 그 공적 기능을 뜻했다는 것이 통설이다.

야케 가운데 큰 것을 '오야케'(大宅家)라고 불렀는데 이는 지방의 지배세력인 호족이 머물던 시설이자 그런 호족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했다. 오야케라는 고유어 표기에 공(公)이라는 한자를 채용한 것도 오야케가 지역 공동체의 공적 기능을 맡았음을 뒷받침한다.

야케의 공적 개념은 나중에 혼인관계를 축으로 가족 집단, 또는 그 거주 공간인 '이에'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가장 사적인 공간에 공적 잠재 의식이 스며 든 결과, 가족 구성원의 친밀도도 그만큼 희석됐을 가능성이 있다.

일본에서 이에가 중시되기 시작한 것은 중세 무사 계급의 성장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당시 빈번한 전쟁에서 전투력의 기본 단위는 친족집단이었기 때문에 대규모 혈연집단, 즉 대가족의 의미가 부각됐다.

그러나 그도 잠시, 근세 들어 무사의 주종관계는 영지와 녹봉에 의한 관계였을 뿐이어서 대가족의 의미는 희석됐다.

에도(江戶)시대 들어 이에는 엄격한 신분제도하에서 주어진 사회적 역할을 강조하기 위한 장치였을 뿐 혈연집단의 결속력과는 거리가 멀었다.

또 집안이 맏아들에게 이어진 우리와 달리 일본의 이에는 둘째·셋째 아들은 물론 양자나 데릴사위에게도 흔히 계승됐다. 이에의 유지·발전 능력을 잣대로 삼은 것은 이에가 기초적 혈연집단이기도 했지만 가업이라는 공동 이익을 위한 소규모 사회집단이었음을 보여 준다.

근대화 직전까지 혈연집단인 가문을 중시한 한중 양국과 달리 일본에서 혈연이 특별한 의미를 갖지 못했던 것은 친척의 호칭에서도 드러난다.

우리는 친·외가를 구분하고 촌수까지 따지지만 일본은 극히 단순히 상하만을 구분한다. 숙부·백부·당숙·재종숙·3종숙은 물론 외숙, 외종숙을 모두 '오지'(아저씨)라로 부르는 것은 대가족 제도와는 거리가 멀다.

우리는 전통적 대가족이 근대화 이후 직계 3세대의 중가족으로 넘어 왔다. 그것이 핵가족으로 이행하면서 고부문제등을 빚고 있다. 반면 일본은 중가족에서 일찌감치 핵가족으로 넘어 왔고 이제는 그마저 흔들리고 있다.

황영식 도쿄특파원 yshwang@hk.co.kr

입력시간 2001/09/11 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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