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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를 여는 사람들](25) 서울대 물리학과 노태원 교수(下)

[미래를 여는 사람들](25) 서울대 물리학과 노태원 교수(下)

전화위복된 F램용 신물질 연구

“창피한 이야기이지만 연구비가 없어서 신물질을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비스무스 란타늄 타이타늄(BLT)이란 차세대 메모리 반도체인 F램 신물질을 개발, 세계적인 주목을 받은 노태원 교수의 원래 주전공은 고체분광학이다.

고체의 물질에 빛을 쏜 뒤 흡수 또는 반사된 빛의 파장을 가지고 물질의 속성을 규명하는 학문이다. BLT란 신물질을 개발하기 전까지만 해도 노교수는 고체분광학 연구자로서 국제적인 명성을 쌓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돈과 기자재였다. 박사학위를 받은 미국 오하이오주립대학이나 박사후과정을 밟았던 코넬대학에서는 연구에 큰 어려움이 없었다. 그는 연구실에서 살다시피 했다.

그러나 1989년 서울대 교수로 귀국한 뒤부터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실험물리학자인 그가 사실상 실험을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부임하면서 배정받은 실험실은 이름만 실험실일 뿐 텅 빈 공간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동료 교수들은 그에게 “(실험실에) 탁구대 놓고 게임 한번 하자”고 농담을 건넬 정도였다. 게다가 고체분광학에 필요한 연구기자재는 분광계 같은 고가품들이어서 당시로서는 구매할 엄두조차내기 힘들었다.


돈 없어 시작한 연구, 차세대 메모리 개발

그러나 열악한 연구환경과 기초과학에 대한 박대도 그의 연구 열정을 꺾지는 못했다. 그는 성균관대 수원캠퍼스와 LG기술연구소를 ‘전전’하며 돌파구를 모색하고 있었다.

“공학자들이 기존에 나와있던 신물질의 약점에 대해 이야기하는것을 들었지만 처음에는 큰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여건으로는 본격적인 고체분광학 연구가 어렵고, 제 나름대로 노력해서 연구여건을 갖추어간다 해도 상당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점차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돈 없이 할 수 있는 연구를 찾아 나섰고 그 대상이 바로 F램용 신물질이었습니다. 주먹구구식으로 그냥 시작한거죠.”

F램(Ferroelectric RAM)은 정보를 기억하는 소자에 강유전 물질을 사용한 강유전체 메모리 반도체. 대용량의 정보를 처리할 수 있는 D램과 정보를 빠른 속도로 처리할 수 있는 S램, 전원이 꺼져도 정보가 지워지지않는 플래시 메모리 등 현존 메모리의 거의 모든 장점을 가지고 있는 꿈의 메모리다.

컴퓨터를 사용하다가 정전으로 작업내용을 잃어버리거나 컴퓨터를 켜고 나서 실제 작업을 할 때까지 30초에서 1분가량 기다려야 하는 단점을 개선한 것이어서 반도체 업계는 F램을 차세대 메모리로 꼽고 있다.

특히 최근 각광을 받기 시작한 휴대용 전자 정보통신 기기에 최적의 메모리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당시 개발되어 있던 F램용 강유전체(전압을 가하지 않아도 스스로 자기를 띠는 소재)에도 치명적인 문제점이 있었다.

기존의 레드 질리코니움 타이타늄(PZT)은 정보를 읽고 지우는 과정을 일정 횟수 이상 반복할 때 저장된 정보를 잃는 등 성능이 저하되는 이른바 피로(Fatigue)현상‘이 나타났고, 스트로시움비스무스 탄타레이트(SBT)는 특성상 고온에서 제조돼 제조시간이 길어지고 비용이 올라가는 단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맨주먹으로 시작한 연구는 쉽지 않았다. 91년부터 시작한 연구는 97년 LG기술원 방문교수로 안식년을 보내면서 본격적인 연구에 돌입할 때까지 기반연구에 머문 채 제자리 걸음을 했다.

마침내 그는 97년 새로운 모델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고, 연구결과를 학술지에 발표했다. 여기서도 ‘원리탐구’를 즐기는 그의 장점이 발휘됐다. BST의 약점이 알려지면서 세계 각국의 연구진들은 피로상을 없애는데 주력한 반면 그는 ‘그들과 다른 시각, 다른 방법으로 모색하자’는 취지 아래 피로현상이 생기는 원인을 물리학적으로 규명하는 모델연구에 들어갔다.

대부분 연구팀들이 공학적 접근을 한 반면 그와 그의 연구팀은 기초과학에서 접근해 들어간 것이다. 그러나 국내 학계는 이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고, 해외의 반응도 회의적이었다. 30여년간 문제점으로 지적되어 온 피로현상의 기존 모델과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저보고 뚝심이 있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있지만 사실 저는 뚝심보다는 황소걸음 쪽에 가깝습니다. 처음에 문제를 정할 때는 시간을 많이 들이지만 정하고 나면 황소처럼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시간을 들여서 파고드는 편입니다.

97년에 발표한 BLT에 대한 첫 연구결과가 회의적인 반응을 받았을 때 정말 답답했습니다. 검증된 데이터를 바탕으로 하는 과학의 세계에서도 전혀 새로운 것을 연구하고 주장하는 것은 기존의 것을 수정ㆍ개선하는 것보다 어렵다는 것을 절감했죠. 어쨌든이 답답함을 풀기 위해서라도 더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반도체 선진국으로 도약 디딤돌 마련

후속연구를 계속했다. 그 결과 피로현상을 없애고 D램 공정에서도 사용할 수 있는 신물질 BLT를 예측하고 합성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해냈다.

그를 중심으로 한 연구팀의 연구결과는 99년10월 영국의 세계적 과학잡지인 네이처지에 소개됐다. 앵거스 킹언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대학 교수는 비평논문에서 “노 교수팀은 F램 분야 연구에 걸림돌이 돼왔던 피로현상을 극복하는 새로운 접근을 시도했다”며 “가능성이 무한하지만 그 개발과정이 험난한 F램 분야 연구에서 진일보가 이뤄졌다”고 평가했다.

BLT는 PZT의 피로현상과 SBT의 고온제조 등 기존 신물질의 약점을 극복한 신물질이다. 다시 말해 반복적으로 정보를 읽거나 쓰더라도 성능이 떨어지지 않고, 기존의 메모리 소자 공정온도에서도 제조할 수 있어 제조시간과 제조단가를 떨어뜨릴 수 있다.

특히 반도체 생산 규모면에서는 세계정상이면서도 원천기술이 없어 거금을 로열티로 지불하고 있는 우리나라 입장에선 노 교수의 F램 신물질 개발은 명실상부한 반도체 선진국으로 발돋움하는 디딤돌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실용화까지는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적지 않은 시간과 수많은 좌절이 수반되는 공정기술이 개발되어야 한다. 효과적인 공정기술을 개발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뛰어난 신물질이라도 빛을 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실용화까지 연결된 특허가 1만건중 5건에 불과한 것도 이 때문이다. 하이닉스와 이야기가 한창 진행되기도 했으나 하이닉스가 심각한 위기에 빠지면서 공정기술개발 등 실용화 작업은 답보 상태에 머물고 있다.

“기초과학을 하는 사람이 실용화에 까지 깊이 참여하지 않아 구체적인 사정은 잘 모르지만 회사 입장에선 공정상의 문제가 없는지, 경제성은 있는지 여러 가지를 따져봐야 겠지요. 실용화는 그만큼 어렵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많은 분들이 긍정적으로 봐주고 있으니까 잘됐겠죠. 국제 학회에서도 BLT에 대한 관심이 대단합니다.”


논문게재 100년 넘는 '신바람' 연구

그는 “연구가 재미있다”고 말한다. 이런 신바람 때문인지 그의 SCI(과학인용지수) 논문 게재 편수가 100편이 휠씬 넘는다.

한국과학기술원이 지난해 집계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연구의 질적 수준을 가름할 수 있는 논문인용횟수에서도 그는 2위에 올랐다.

특히 그는 자신이 이끌고 있는 산화물전자공학연구단이 지난해 과학기술부의 창의적 연구과제의 연구단으로 지정받아 ‘괜찮은’ 연구환경을 갖추게 됐었다며 주전공인 고체분광학도 본격적으로 연구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경철 주간한국부 차장 kckim@hk.co.kr

입력시간 2001/11/14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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