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LP여행] 타악기 연주가 박재천(上)

무한의 소리로 빚어낸 전통가락의 재발결

재즈 색소폰의 명인 네드 로덴버그, 야니 등 수많은 세계적인 아티스트들과의 협연과 끊임없는 실험적 음악공연을 통해 한국 가락을 짐작할 수 없는 무한의 소리로 표현해내고 있는 타악기 연주가 박재천.

그가 두들겨 울려대는 순백의 난타소리를 듣다 보면 음악적 자유로움에 취해 환상리듬여행에 동승하게 된다. 그는 요즘 한국 프리 재즈계의 떠오르는 태양에 비유될 만큼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월드 뮤직 아티스트이다.

대중가요로 음악여정의 첫발을 디디고 대학에서 작곡을 전공했었다는 특이한 이력은 신비감과 더불어 호기심을 발동시키기에 충분하다. 학창시절 정상적인 교육과정에 반항하며 괴팍하리만치 자유로운 영혼에만 본능적으로 순응했다.

청소년기는 밴드부, 청년기는 록그룹들의 드러머로 방랑하며 자칫 무책임해 보였던 자유혼은 방탕의 나락으로 추락할 수도 있었지만 진지하게 추구했던 한국 가락을 온갖 장르에 접목한 음악적 실험은 언제나 팽팽한 삶의 긴장감을 잃지 않게 해주었다.

놋그릇, 꽹과리, 장구, 북 등 한국 토속 타악기 소리를 근간으로 직접 구성한 드럼, 봉고, 오카탐 등 외국의 타악기와 버무린 독특한 소리탐닉은 세계인이 공감하는 독특한 한국의 월드 뮤직으로 거듭났다.

1961년 서울 영등포에서 경찰 공무원이었던 부친 박일상과 모친 이종순의 2남 4녀 중 넷째로 태어난 박재천. 음악과의 인연은 유년시절에 이루어졌다. 6살 때부터 살아오던 봉천동 집의 옆방에는 영등포고 3학년 밴드부형이 살고 있었다.

은천초등학교 2학년 때 당시 유행하던 팝송 <뷰티플 선데이>를 드럼을 치고 노래하는 밴드부형의 소리가 갑자기 어린 가슴을 요동치게 했다.

정신이 몽롱했다. 매일같이 찾아가 작은 스내어를 치면서 두들기는 재미에 빠져들었다. 1970년, 박정희 정권에 의해 각급 학교에 고적대가 장려되자 은천초등학교에도 고적대가 생겼다. 일착으로 들어가 초등학교 연합대회에 출전 입상하면서 친구들 사이에 일약 영웅으로 통했다. 비교적 자유로운 집안 분위기는 아무런 제약을 주지 않았다.

신용산중에 들어가면서 좀더 대담해졌다. 용산역 앞에 위치한 음악학원에 나가 라면을 끓여주고 담배 심부름 등 잡일을 하며 펑키, 소울 등 그룹사운드 음악을 귀동냥하면서 드럼 치는 법을 어깨너머로 배웠다.

용산고에 입학, 규율이 엄해 누구나 기피하는 밴드부에 자발적으로 들어가 단숨에 드럼을 맡고 2학년 때는 용산고 5인조밴드 를 결성 각 학교 축제 때 레드 제플린, CCR등의 외국곡을 연주했지만 실력은 그저 그랬다.

고3때는 서라벌, 대신고 학생들과 6인조 서울시내 고교 연합밴드 <아우성>을 결성했다. 2명은 이미 퇴학을 당한 아이들이었을 만큼 사고 뭉치 밴드였다. 이때 멤버 중 경신고의 김정욱은 훗날 김종찬이 대히트를 기록했던 <사랑이 저만치 가네>를 작곡했을 만큼 음악실력은 제법 탄탄했다.

주로 여고축제무대에서 최고의 인기몰이를 하자 박재천은 프로로 나서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졸업을 앞두고 곧바로 음악생활을 하자는 멤버와 대학에 가서 대학가요제에 나가자는 의견으로 양분되자 팀은 분열되었다.

80년 대학 입시에 떨어진 박재천은 재수를 했다. 당시는 광주사태로 계엄령이 내려져 온 나라가 시퍼렇게 멍든 암흑시기.

군인들에게 얻어 맞지 않기 위해 <아우성> 밴드 멤버들과 함께 치렁치렁한 장발을 자르고 강릉 경포대 나이트클럽으로 도망갔다. 짧은 머리로는 하드록 분위기가 살지않자 팀은 <빌리지 피플>같은 뉴 웨이브와 당시 유행하던 디스코 음악으로 색깔을 바꾸자 드러머 박재천은 할일이 없어졌다.

장발로는 길거리에 나다닐 수도 없는 살벌한 상황때문에 음악을 포기하고 대신 입시에 전념, 중앙대 작곡과에 입학했다. 이미 밤무대 활동으로 제법 이름을 날리던 박재천은 나이트 클럽 밴드로는 최정상인 <신중현과 뮤직파워>의 후기 드러머로 스카웃되어 2년간 활동을 했다.

하지만 디스코 음악만이 주류인 소모적 대중음악에 진절머리가 났다. 이때 신중현은 '세상의 모든 음악을 다 해보았지만 캐나다 RUSH의 음악은 못해봤다. 나와 베이스 김영진하고 3인조그룹을 해보지 않겠냐'고 제의해 왔다.

진정한 음악을 하고픈 욕망이 꿈틀거렸던 박재천은 대선배의 청을 물리치기가 어려워 붕대를 양손에 감고 다친 척 해버렸다.

학업을 등한시 했던 박재천의 대학성적은 거의 F학점. 교무처장에게 학교에 나오지 말라는 심한 질책을 듣자 드럼을 팔아버리고 강남역 옆 지하실을 얻어 클래식 작곡공부에 전념했다. 3학년 때는 인간 문화재인 명창 박귀희 선생으로부터 국악 공부를 하면서 우리 가락의 오묘함에 매료되었다.

졸업을 앞두자 군대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창작곡을 만들어 현대음악, 동아, 중앙콩쿠르에 참가 모두 본선에 진출하는 입선의 영광을 안았다.

단숨에 작곡과의 영웅으로 떠오른 박재천에게 지도교수 김동환은 “머리갂고 정상적인 학업생활을 하면 교수도 시켜줄 수 있다”고 제의했다.

음악을 버리고 군에 가기는 죽기보다 싫었다. 대학원에 진학하고 두 번의 가짜 결혼식을 한 것도 그 때문. 11번씩이나 입대 영장을 기피하며 숨어 지냈다.

그러나 당국에서 공무원 친척들에게 간접적으로 군 입대를 해야 한다고 압력을 넣자 86년 7월 여호와의 증인, 전과자 등 다른 군 기피자들과 함께 헌병감호 특별 호송차량에 실려 육군에 입대했다.

험난함이 예상되었던 군생활 시절, 군의 지원 하에 첫 데뷔 음반 발표를 하게 될 줄은 본인도 몰랐다.

입력시간 2002/03/06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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