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현의 영화세상] 홍상수 감독과 ‘흉내내기’

홍상수 감독의 네 번째 영화 ‘생활의 발견’은 우리의 일상 속에,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나타나는 ‘모방’에 대한 조롱입니다.

홍상수 감독은 우리가 아주 익숙하다고 생각하는 일상의 사실성을 통해 오히려 그 일상을 아주 낯설고 새로운 것으로 느끼게 하는 놀라운 재주를 가졌습니다. 데뷔작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이 그랬고, 이후 정확히 2년마다 한편씩 나온 ‘강원도의 힘’ ‘오! 수정’이 그랬습니다.

그에게 일상이란 위선과 잘못된 기억과 자기중심주의 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아무런 의식 없이 받아들이고, 그 때문에 서로 얽히고 설켜 끔찍한 사건을 겪기도 하지만 결국은 아무런 변화 없이 다시 되돌아오는, 누구도 그곳에서 쉽게 탈출하지 못하는 그런 일상입니다.

그것을 적나라하게 까발리는 홍상수 감독. 그가 보여주는 일상에서 역설적이지만 우리는 자화상을 봅니다. 관습적 정서나 스토리의 극적전개를 쓰레기통에 던져버렸습니다. 드라마가 없고 일상만이 남아있는 삶. 홍상수 영화가 비슷한 삶의 구조를 가진 유럽에서 주목 받는 이유일 것입니다.

그의 영화는 아무런 극적효과를 기대하지 않습니다. ‘강원도의 힘’처럼 시차를 두고 그저 강원도로 여행을 떠난 여자와 그녀의 육체를 탐했던 유부남이 헤어지고, 여자는 남자가 기르던 금붕어 한 마리처럼 쉽게 잊혀지는 그런 일상입니다.

‘오! 수정’처럼 서로 거짓말을 하면서도 그것을 사실인 것처럼 믿는 그런 위선의 일상입니다.

홍상수 감독의 그 일상이 ‘힘’을 갖는 이유는 먼저 솔직함에 있습니다. 욕망을 감추지 않습니다. 예외 없이 남녀의 섹스, 그것도 주로 유부남이나 유부녀의 불륜이 등장합니다. 홍상수 감독은 섹스에 대한 집착이나 관심을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인간의 심리와 행동패턴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중요한 일상이라고 했습니다.

또 하나는 유머입니다. 꼼꼼한 묘사, 의사소통의 단절을 확인시켜주는 행동과 언어들이 유머로 살아납니다. 의외성과 우연성도 치밀하게 계산해 배치해 놓습니다. 비슷한 공간이나 시간의 반복을 통해 그는 의미의 고리들을 만듭니다. 그래 놓고는 마치 연출이 아닌 자연스러운 일상인 것처럼 위장합니다. 신인 배우들을 자주 등장시키는 것도 그들에 대한 관객의 낯설음이 일상성을 강화시켜주기 때문입니다.

‘생활의 발견’도 이런 그의 특징이 그대로 이어집니다. 연극배우 경수(김상경)는 여행을 떠나고, 6박7일 동안에 두 여자를 만나 섹스를 합니다.

그 중 한 여자 선영(추상미)은 유부녀입니다. 섹스를 하면서, 섹스에 대한 노골적인 대사를 통해 영화는 모방과 가식을 코믹하게 비웃습니다. 등장 인물들의 만남과 관계도 아주 우연인 것처럼 만들어 놓았습니다. 경수와 선영은 중학교 때 만난 적이 있으며, 선영의 남편은 경수가 춘천 소양호에서 한 여자와 오리 배를 타고 놀던 그 남자입니다.

춘천 소양호에 있는 오리 배는 경주 보문호에도 있습니다. 춘천 여자가 남긴 시적 표현을 선영도 똑 같이 씁니다. 이런 계산된 우연과 영화 감독의 말을, 선배의 버릇을, 춘천 여자의 사랑고백을 마치 자기 것인 양 흉내내는 경수를 통해 ‘생활의 발견’ 은 일상에서의 모방을 조롱합니다.

배우 김상경은 홍상수 감독과 비슷해 보일 정도로 분위기와 모습이 변해있습니다. 그 모방이야말로 어쩌면 홍상수 감독 자신에게도 해당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감독의 자기 복제조차 의도라고 말한다면 어쩔 수 없습니다. 그렇더라도 이제 그의 영화 역시 익숙하고 비슷비슷하게 보이는 것 또한 어쩔 수 없습니다.

‘강원도의 힘’에서 유부남을 사귀면서 꿈과 희망을 들먹이는 지숙에게 미선이 쏘아붙인 말이 다시 생각납니다. “너는 너 혼자 좀 특별하다고 생각하는데, 넌 하나도 특별한 거 없어. 다른 사람하고 다 똑 같아. 엄청 상투적이란 말이야.”

이대현 문화과학부 차장

입력시간 2002/03/19 1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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