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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시대의 巨匠] 연출가 오태석

[우리시대의 巨匠] 연출가 오태석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연극인생 40년'

여전히 그를 잡을 수 없다. 어디로 튈 지 모를 62살의 소년이다.

1963년 극단 회로무대를 창단, 40년 세월 동안 연극 한우물만 파고 들었다. 그 공력의 깊이를 보자면 중견을 넘어 원로다. 회의용 테이블이 딸린 방이 어울릴 나이다. 그러나 그는 오늘도 작업복 점퍼에다 운동화 차림을 고집한다.

다듬기 싫어 아예 짧게 깎은 머리카락 끝에 주렁주렁 매달린 장난기는 여전하다. 작업의 열기가 올라가니, 흰 수건을 목에 두르고는 땀을 훔쳐 낸다.

오늘도 손자 뻘쯤 되는 단원들과 입석 버스에 훌쩍 올라 타고 한남대교를 건넌다. 강북과 강남에 위치한 한국 최고의 공연장 두 곳이 양수겸장(兩手兼將)의 형국으로 그에게 잡혀 있다. 세월의 심술마저 제풀에 지쳐 포기했는가.


카랑카랑한 목소리, 넘치는 의지

“오늘은 런 쓰루(run through)로 가겠어요.”

3월 27일 오후 7시 30분 예술의전당 토월극장. 토막 토막으로 연습해 온 ‘로미오와 줄리엣’을 처음부터 끝까지 쭉 이어서 해 보는 전막 리허설의 첫날이다. 객석 가운데 앉아 마이크를 잡고 무대 위의 단원에게 몇 마디 지시하는 그의 자세가 왠지 거북해 보인다.

10여분 지났을까, 목소리를 뭉개는 마이크를 밀쳐 낸 그는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이것 저것 지시하기 시작한다. 대학로에 있는 자신의 소극장 아룽구지에서 연습을 지휘하던 모습이 살아난다. 스쳐 가는 영감을 놓칠세라, 움켜 쥔 노트에는 아이디어들이 굵직한 연필 글씨로 메모돼 간다.

이번 작품은 2000년 독일 브레멘시가 극단 브레머와 주최한 제 1회 국제 셰익스피어 페스티벌에 초청돼, ‘동양 어법으로 체화해 낸 셰익스피어의 진수’라는 호평을 받았다. 외국서는 오방색에 근거한 의상 등 볼거리와 우리 민요적 선율에 근거한 들을거리가 먼저 피부에 와 닿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우리 관객에게 돌아 온 이번 무대에서는 입에 짝짝 붙는 우리말맛이 전면에 나선다. 선명한 시각적 효과에다 흥겨운 덩더꿍 장단에 플루트 반주 등 동서양 음악이 혼재하는 음악은 이 작품이 얼마나 포스트모던적인지를 입증하는 대목이다.

극단 목화로 봤을 때, 이번 공연은 각별하다. 외국 공연이 거둔 푸짐한 성과 때문만은 아니다. 극단 내부적으로 작은 경사가 겹쳤다. 1973년 극단 창단 멤버였다, TV, 영화로 가 4년 동안 ‘외유’하고 돌아 온 노장 정진각(52)이 참여하는 무대다.

그는 “휴식도 모른 채 연극에만 몰두하는 게 오선생의 인간적 약점”이라며 “힘들지만 내가 살아 있다는 확인을 받고 싶어, 그의 극단 목화로 돌아 왔다”고 말했다. 돌아 온 대선배는 작품에 참가하는 30여명의 배우와 스태프에겐 여간 든든한 게 아니다.

소품을 보완하는 배우들 틈에 새끼 꼬는 덩치 큰 벽안의 남자 하나가 보인다. 존 신부역을 맡은 폴 매튜(25)는 오태석의 무대에 출연하는 최초의 외국인이다.

2년전 런던 미들색스대 연기과 재학중 오태석의 한영 교류 공연 당시 ‘태’에서 단역으로 출연했다, 오태석 연극에 홀딱 빠져 마침내 출연의 꿈을 이루게 된 것이다. 단 몇 마디 대사를 위해 그는 매일 오전 9시부터 밤 10시까지 목화 식구들과 아예 살고 있다.

그는 “오 선생은 외국서 ‘아시아의 브레히트’로 잘 알려져 있다”며 “한국 전통 연희와 현대극을 한 데 녹인 미학뿐 아니라, 극단 목화라는 독특한 연극 공동체를 이토록 오래 이어 온 그의 힘은 놀랍다”고 말했다.

1980년대 후반부터 연극계에서 생겨난 PD 시스템으로, 공동체로서의 극단이라는 개념은 급격 소진돼 갔다. 연극도 돈이 돼야 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밀양의 연희단거리패(대표 이윤택), 죽산 미추(대표 김아라)를 제외한다면 서울에 남아 있는 진짜 연극 공동체는 오태석의 목화 레퍼터리 컴퍼니뿐이다. 단원들은 요즘처럼 작품이 있는 때라면 오전 9시부터 극단 목화의 본부인 아룽구지 소극장 등지에 나와 개인 연습을 시작하고 오후 3, 4시부터는 극장에 나가 서로 호흡을 맞춘다.

오태석은 이 독특한 연극 공동체의 수장이다. 젊은이들과 몸을 툭툭 부딪쳐 가며, 온종일 연극만을 생각한다. 그는 결코 변화를 두려워 않는다. 연습할 때마다 뜯어고치는 작업 습관 덕에, 하루에 그의 연출 노트 서너장은 거덜난다. 철저한 아날로그 수작업이다.


‘기생비생 춘향전’에 몰두

‘기생비생 춘향전’. 그가 또 다시 신작으로, 고정 관념과 충돌한다. 익히 아는 춘향 이야기를 살짝 비틀어 만든 신작이다. 물론 연출도 한다.

“나는 기생이 아니다, 그러므로 나는 나의 본모습을 찾아야 한다는 춘향의 분투가 차곡차곡 쌓여 가는 무대”라고 그는 새 작품에 대해 압축했다. 억울한 3년 옥살이를 버티게 해 준 오기의 근원은 과연 무엇인가에 초점을 맞춰, 개작했다. 제목은 ‘기생이 아닌 춘향이’란 뜻으로, 주체적 여성으로의 자신을 발견하고 주장해 나가는 춘향의 모습이다.

이번은 극단 목화를 벗어나, 우리 시대 최고 기량의 연기진 국립극단 소속 배우 50여명과 함께 한다. 탄탄한 연기력과 풍성한 하드웨어를 구비한 국립극단과의 작업은 그 자신부터가 반긴다.

1978년 ‘물보라’를 기점으로 시작된 국립극단과의 작업은 모두 여섯번째를 헤아린다. 국립 무용단의 ‘춘당춘색고금동’ 연출까지 합하면 국립극단과의 작업은 통산 7회째다.

특히 ‘춘당…’은 무용극 버전의 ‘춘향전’이다. 그는 이런 식으로, 저런 식으로 ‘춘향전’에 애정을 표해 오고 있는 것이다.

“확정된 게 하나도 없어 걱정이 태산이에요.” 분장 담당 손진숙의 말은 엄살이 아니다. 매일 오후 3시부터 국립극장에 나와 연습을 지켜보지만, 연습할 때마다 번번이 고치는 오태석은 특히 스태프에게 난적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같은 자세 덕에 객석은 같은 제목의 작품이라도 최신 버전만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가 잡히지 않는다는 것은 그래서다.

“다가오고 있는 죽음을 즐긴다고나 할까, 살아보려 아둥바둥 댄다고나 할까? 춘향전에서만 할 수 있는 일이지, 실제로는 불가능한 거 아녀?” 고향인 충남(서천) 사투리가 자꾸 나온다. 신이 올랐다는 말이다. 백전노장이 모인 국립극단은 과연 그의 마음을 편하게 한다. 아직은 간단한 세트를 갖다 놓고 대본 읽기(리딩)하는 수순이지만, 이들의 노련한 앙상블은 리딩만으로도 극장을 지었다 허문다.

무대는 이몽룡이 과거를 보러 한양으로 떠나는 날부터 돌아 오기 바로 전날까지이다. 몽룡과 방자가 빠진 ‘춘향전’이다. 젊은 남자가 빠진 ‘기생비생 춘향전’은 그러나 여인의 기다림, 남성중심적 세계의 폭력성이 더욱 불거져 페미니즘의 본래적 의미에 닿아 있다.


춘향에 이어 ‘로미오와 줄리엣’과 봄나들이

일본 유학파들이 수절 등 남존여비 사상에 초점 맞춰 널리 통용시킨 현존 ‘춘향전’에만 길들여진 사람들에게는 낯설 수도 있다.

‘남원 고사본 춘향전’을 텍스트로 해 재구성된 오태석의 신작은 고전 다시읽기의 모범을 보여준다. 도입부 배경이 일체 생략했다. 계급과 신분 등의 문제도 곁다리로 흘려 보냈다. 대신 춘향이 왜 수절하게 됐는지, 보다 사회성 짙은 문제에 초점을 맞췄다.

아까는 서태지의 랩이 흐르는가 싶더니 이번에는 이선희의 노래다. 한 번은 ‘비내리는 호남선’에, 또 다른 한 번은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다. 연극은 즐거운 유희라는 오태석의 신념은 저렇듯 곳곳에서 확인된다.

걸쭉한 놀음판 같던 무대에 찢어질 듯한 비명이 들린다. “엄마가 날 버리려고 해. 천한 기생 만들랴고 해. 귀에서도 눈물이 나게 울거야. 아, 으아- 수청, 아나 수청.” 옥살이 말고 수청 들라는 월매의 권유에 춘향이 내지르는 대꾸다.

이 연극의 테마가 강렬하게 드러나는 부분이다. ‘아나’라는 말은 “그래, 먹고 떨어져라‘라는 정도의 뜻을 가지는 사투리다. 생활에서 잊혀져 가는 우리말을 살리려는 노력이다.

“춘향이, 재건이 형과는 밤샘 작업으로 해야 할 것 같아요.” 재건이 형이란 사령1역의 고참 배우 김재건의 이름이다. 스스로 만족하지 못 하면 관객도 만족할 수 없다는 고집에는 누구도 토를 달 수 없다. 밤샘 작업도 서슴지 않는 것은 그래서다.

젊음이 약동하는 서울 우면산 자락에서 새 힘을 얻을 ‘로미오와 줄리엣’은 봄나들이 전국 유람도 갖는다. 현지 요청을 이번에는 거절할 수 없어, 극단 목화가 모처럼 갖는 지방 순회 공연이다.

오태석은 “우리 극단 목화는 배우가 곧 스태프라 고생도 두 배, 즐거움도 두 배”라며 모처럼의 지방 나들이에 기대를 건다. 4월 28~5월 13일 대전, 춘천, 전주의 시민문화회관 회관에서 갖는 공연이다.

오늘도 그는 젊은이들과 밤들이 노닐 작정이다. 29일 막을 올린 ‘로미오와 줄리엣’은 4월 14일까지 예술의전당 토월극장에서, ‘기생비생 춘향전’은 4월 9~21일까지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02)745-3967 www.mokwha.com

장병욱 주간한국부 차장 aje@hk.co.kr

입력시간 2002/04/04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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