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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 세상] 고통받는 여성들을 위하여

[라디오 세상] 고통받는 여성들을 위하여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강경한 이슬람 율법 때문에 무고한 여학생 40여명이 목숨을 잃는 사건이 발생했다. 얼마전인 3월 11일 사우디아라비아 메카의 한 여학교에서 불이 났다. 수업을 받던 학생들이 탈출하려고 하자 종교 경찰들이 탈출구인 문을 열지 못하게 했고 구조에 나선 소방대원들까지 가로막았다.

이로 인해 사망 41명, 부상 50명이란 대규모 인명피해가 났다. 경악할 일이다. 구조를 도와야 할 경찰이 오히려 구조를 저지하고 나선 이유는 여학생들이 머리에 베일을 쓰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란다.

이슬람 율법에 따르면 13세에서 17세의 여학생들은 머리에 베일을 쓰지 않고서는 건물 밖으로 나올 수 없다. 요르단 형법 340조는 '친인척 여성의 부정한 행위를 처벌하는 것은 면죄 또는 감형이 된다'고 명시하고 있다.

즉 가족의 명예를 더럽힌 여성을 가족들이 죽여도 큰 죄가 되지 않기 때문에 부정을 저지른 여성을 명예라는 이름으로 죽이는 이른바 ‘명예범죄’가 요르단에서 쉽게 저질러지고 있다.

1998년, 임신한 언니를 도우러 갔던 여동생이 형부에게 강간당하자 이를 알게 된 친오빠가 여동생이 가문의 명예를 더럽혔다며 여동생을 총으로 쏴 죽인 명예범죄 사건이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형부는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고 여동생을 죽인 오빠는 6개월 감옥살이만 하면 됐다.

더욱 놀라운 것은 가족과 이웃조차 오빠의 행동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고 심지어 영웅대접을 했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명예를 이유로 여성에게 죽음을 강요하는 나라가 있는가 하면, 결혼 지참금이 너무 적다며 어린 신부를 불태워 죽이거나 신부의 얼굴에 황산을 뿌리는 나라도 있다. 인도에서는 연간 5,000여명의 여성이 '다우리'(결혼지참금)가 없어 죽임을 당하기도 한다.

또 아기가 딸일 경우에 딸을 유기하는 부모를 처벌하지 않는 나라도 있다. 지구촌에는 이렇게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는 학대, 폭력, 성차별로 고통을 받는 여성들이 적지 않다. 실제로 학교교육을 받지 못하는 지구촌 1억1,000만명의 어린이 중 3분의 2가 여자 아이고, 전 세계적으로 절대빈곤층의 70%가 여성이다.

3월 8일 제94회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엘리자베스 2세, 코코 샤넬, 헬렌 켈러, 마릴린 먼로, 마돈나, 매들린 올브라이트, 힐러리 클린턴 등 현대 여성사를 대표하는 인물들이 미국의 시사주간 타임지를 화려하게 장식했다.

그러나 정작 내 마음을 잡아 끈 것은 세계 여성의 날 행사를 맞는 아프간 여성들이란 조그마한 기사였다. 탈레반 정권이 물러갔음에도 불구하고 아프간 여성들은 아직도 인권의 사각지대에서 고통을 받고 있었다.

강렬한 초록빛 눈으로 전 세계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85년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표지 모델 샤르바트 굴라를 기억하는가? 17년 전 사진을 찍었을 때 12살이었던 굴라는 그 사이 결혼해 모두 4명의 아이를 낳았다.

이 가운데 1명은 먹을 것이 없어 죽었고 이제는 세 딸만 남았다. 17년만에 다시 내셔널 지오그래픽 표지에 실린 그녀의 얼굴은 전쟁과 가난에 찌들려 있었다.

같은 지구촌에 함께 살면서 너무나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는 여성들을 보며 많은 생각이 떠오른다.

만약 타임지를 장식한 여성들이 사우디아라비아, 요르단, 인도, 아프가니스탄과 같이 여성의 인권과 생명의 존엄이 지켜지지 않는 곳에서 태어났더라면 그들 역시 부르카를 뒤집어쓰고 전쟁의 포화에 떨며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있을지 그 누가 알겠는가.

지난 해 11월 13일 아프간의 수도 카불이 반군에 함락되고 탈레반 정권이 물러난 직후 라디오 아프가니스탄 방송에 1996년 이후 5년 만에 처음으로 여성 아나운서가 등장했다. 가슴 벅찬 마음으로 마이크 앞에 섰을 그녀의 모습을 떠올리면 매일 아침 마이크 앞에 설 수 있는 나는 정말 복을 받았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그리고 이 시각에도 고통을 받고 있는 지구촌 여인들을 대신해 내가 어떤 목소리를 낼 수 있을까 생각해본다.

성기영 KBS 아나운서

입력시간 2002/04/08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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