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 ‘거짓말’

■‘거짓말’
(구경미 등 지음/문학동네 펴냄)

“여관 가자. 비디오 방 포기할게, 그 대신 여관 가. 하고 싶어.” 한치현의 ‘메모리즈 아 메이드 오브 디스’의 한 구절이다. 스물 여섯의 남자와 열 아홉의 여자가 주인공이다.

여자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육개월이 지나지 않았고 남자는 대학을 졸업하고도 삼년을 허송했다. 이들에게 사람들이 말하는 생활이란 없다. 1950년대 팝송을 제목으로 한 이 단편은 의미를 잃고 헤매는 젊은 남녀들의 나른한 일상을 도발적 표현해 보인다.

젊은 작가 11인의 단편을 묶은 ‘거짓말’은 새로운 상상력과 감수성의 잔치 마당이다. 현실과 가상, 남성과 여성을 가르던 벽 등 전통적 경계가 허물어져 버린 이 시대를 문학적으로 어떻게 재현해 낼 것인가에 대한 보고서이기도 하다. 영화 ‘거짓말’이 보여주듯 생활은 없고 감각에의 탐닉만이 남은 이 시대의 젊음을 서술적으로 재현한다.

정신병에 시달리는 ‘나’가 진술해 가는 불안한 현실 풍경은 비루한 현실에 맞서가는 방식이기도 하다. 구경미의 ‘광대버섯을 먹어라’는 이 시대 젊음이 현실에 맞서기 보다는 왜 환각의 세계를 탐닉하는 지를 말해준다.

‘쉰 한개의 시퀀스를 가진 한편의 농담’은 익명화, 기호화한 우리 시대의 관계 맺기 방식을 묘사하고 있다.

몸져 누워 있는 아버지를 간호하며 군대 간 남편을 기다리는 여자, 그녀에게 조금씩 이끌리는 옆방 남자, 남자가 취직한 출판사의 사장, 돈을 받고 사장과 관계를 갖는 여자 등 서로 맞물려 돌아 가는 관계들이 엉켜 있는 현실이다. 모든 등장 인물은 710121라는 남자, 761225라는 여자처럼 철저히 코드화돼 있다.(김도언 작)

김도연의 ‘아침못의 미궁’은 기억을 찾아 가는 남자의 이야기다. 간밤을 함께 보내고는 물에 빠져 죽은 여인의 실체를 파고 들면서 마주치게 되는 암담한 이야기다. 50년 동안 냉동됐다 살아난 인간들이 자신들의 성적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는 모습을 그린 김문숙의 ‘냉동 인간의 최후’는 전통적 성관념이 해체돼 가는 시대적 추세와 정확히 조응한다.

김숨의 ‘골목’은 식구들이 하나 둘씩 가출해 버려 해체된 가정의 쓸쓸한 풍경을 어린 딸의 시선으로 비쳐 준다.

신승철의 ‘연세고시원 전말기’는 필생의 역작 소설을 쓰기 위해 고시원 구석방에 처박힌 한 남자의 일상과 의식을 세밀하게 파고 들었다. 양선미는 아파트 촌의 무료한 중국집 이야기를 그린 ‘어드벤처 그린 반점’으로 동참했다. 쓰레기 봉투 속에서 수표를 발견한 중국집 주인 부부의 백일몽이다.

오현종의 ‘미호(美虎)’는 지금껏 어느 누구와도 깊은 인연을 멪어 오지 않았던 그녀가 누군가를 받아 들이게 되기까지의 이야기다. ‘미호(美虎)’는 여인이 자신의 욕망을 인정하고 진정한 사랑을 만나 그를 완성하기까지의 이야기를 감각적 문체로 들려준다.

태기수의 ‘마로니에 공원엔 아구아나가 산다’는 한국에서는 살지 않는 동물 아구아나의 환각을 통해 현대인의 존재를, 한지혜의 ‘햇빛 밝은’에서는 동반 자살을 꿈꾸는 자살동호회 회원을 그리고 있다.

수록작들에서 기승전결에 입각한 어떤 이야기를 찾기란 불가능하다. 사실의 편린과 단편이 산재할 뿐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소설적 현현이다. 소설가 이승우(조선대 교수)는 “열 한 명의 개성들은 위기에 처한 우리 소설을 구할 차세대”라고 평했다.

장병욱 주간한국부 기자

입력시간 2002/04/16 14:15


장병욱 주간한국부 aj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