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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식의 문화읽기] 흐린 날 블루스에 젖어…

1996년 늦은 여름의 어느 토요일이었다. 한 친구가 ‘죽이는 곳’이 있다며 앞장을 섰다.

그리고 이태원에 있는 라이브 카페 '저스트 블루스'로 갔다. 테이블은 이미 다른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었는데 대부분은 미군과 관련이 있는 외국사람들로 보였다. 어쩔 수 없이 바(bar) 앞의 높은 의자에 엉덩이만 대충 걸치고 앉아서 음악을 들었다. 정확하게 기억은 나지 않지만 키보드를 비롯한 다른 악기들은 외국인들이 연주를 했던 것 같다.

하지만 기타리스트는 자그마한 몸집의 토종 한국사람이었다. 안정된 느낌을 주는 기타 연주는 그의 음악적 연륜과 깊이를 대변하는 듯 했고 블루스 본연의 프레이즈들로 짜여진 즉흥연주는 참으로 압권이었다. 아마추어 음악 동호인에 불과한 필자가 듣기에도 그의 연주에는 엄청난 내공이 담겨 있었다.

솔직하게 말해서 낯선 곡들을 들을 때는 확신을 못 가졌던 것 같다. 그런데 비비 킹, 티본 워커, 지미 핸드릭스, 에릭 클랩튼 등의 노래가 연주될 때는 어떤 놀라움마저 느꼈던 기억이다.

연주자가 자신의 음악으로 완전히 소화하지 못한 상태에서 지미 핸드릭스와 같은 거장들을 카피(똑같이 연주하는 일)하게 되면 십중팔구는 실망하게 마련이다. 원곡의 분위기가 머리 속에 있어서 끊임없이 비교하며 듣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사람의 연주는 원곡과의 비교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래서 더욱 인상적이었다. 기타 위를 움직이는 손가락의 움직임(fingering)이 현란했기 때문이었을까.

결코 아니다. 그의 몸이 전달하는 그 어떤 느낌(feeling),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 어떤 느낌이 그곳을 가득 채우고 있었던 것이다. ‘중원’에는 고수가 많다더니, 과연 누굴까? 연주가 끝나고 팸플릿을 보고서야 확인할 수 있었다. '채수영과 친구들'.

그렇게 블루스 기타리스트 채수영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지난해에 출시된 채수영의 앨범을 최근에야 구해서 들어보았다. 선물할 CD를 사러갔다가 우연하게 발견했던 것이다. 허덕이며 살다보니 2년 가까이 '저스트 블루스'에 가보지 못했던 것 같다.

그래도 채수영과는 두 번의 우연이 겹쳐져서 가느다란 인연이나마 이어가나 보다. 지루한 일상 속에 생각지도 않게 주어진 작은 축복이었다.

음반의 표제는 '내가 사는 세상'. 예상대로 그의 기타 연주는 섬세하면서도 격정적이었다. 그리고 블루스의 원형인 12 소절 블루스만을 배타적으로 고집하지 않고 인접 양식들을 폭 넓게 수용하려는 의지를 진하게 느낄 수가 있었다.

동시에 블루스 본연의 느낌들을 중시하면서도 한국적인 그 무엇을 표현하고자 하는 태도가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블루스 음악의 유연함과 포용력에 대한 자기확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표제곡인 '내가 사는 세상'의 경우 앞 부분은 한글가사로, 뒷부분은 영어가사로 되어 있다. 개인적으로는 한글가사 부분이 조금은 어색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과정 없이 어떻게 우리말로 된 블루스 넘버를 가질 수 있을까.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블루스는 20세기 대중음악의 뿌리로 인정된다. 하지만 한국에서 블루스 음악은 여러 가지 이유에서 대중들의 외면을 받아왔다. 그리고 대중의 취향과 의식적으로 거리를 둠으로써 블루스의 진정성과 음악성을 입증하고자 하는 경향도 있었다.

그 와중에 블루스는 절규하는 비가(悲歌)이거나, 에로틱한 장면의 배경음악이거나, '빠다' 냄새가 심하게 풍기는 서양음악 정도로만 치부되어 왔다. 필자는 블루스 마니아가 아니다. 하지만 블루스를 좋아한다. 이유는 소박하다.

블루스는 인간의 몸이 얹힌 음악이고, 기계적 조작으로는 만들어낼 수 없는 음악이기 때문이다. 스튜디오(녹음실)와 매니지먼트가 음악의 주체가 되어버린 대중음악의 지형도 속에서, 블루스는 특유의 꺼칠한 목소리로 말하는 듯하다. 음악은 몸과 영혼의 미세한 떨림과 운동성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채수영에 의해서 또는 '저스트 블루스'에 모이는 젊은 연주자들을 통해서 한국적인 블루스를 들을 수 있게 된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이 또 있을까. 진정 자기자신을 표현하고자 하는 음악으로 한국에서 블루스의 위상이 정립될 수 있기를 희망한다.

그리고 황지우의 시를 빌자면 어느 날 블루스가 연주되는 흐린 주막 '저스트 블루스'에 앉아 있을 거다. 블루노트(블루스의 기본 음계)를 모르면 어떻고, 펜타토닉(5음계) 스케일을 모르면 또 어떨까. 그저 몸으로 느끼면 되는 것을.

김동식 문화평론가 tymtan@empal.com

입력시간 2002/04/23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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