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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식의 문화읽기] 진짜공부와 가짜공부

[김동식의 문화읽기] 진짜공부와 가짜공부

보다 면밀한 조사를 통해서 밝혀져야겠지만 대통령의 3남이 유학생 신분으로는 분에 넘치는 생활을 한 것은 사실인 듯 하다. 물론 집안이 좋아서 풍족한 환경에서 공부하는 것을 누가 마다할 것이며 누가 시비를 걸 수 있겠는가.

다만 국제학을 전공했다는 걸 보면 '신지식인'과는 거리가 먼 것 같은데 어디서 그 많은 경비들을 동원할 생각을 했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필자처럼 100년 전의 신문기사나 뒤적거리면서 공부를 하고 있고 주변에 유학을 나가 있는 몇몇의 선후배를 알고 있을 따름인 일개 백면서생으로서는 가늠하기조차 어려운 경지이다. 더 이상 고통을 받지 않으려면 사람이라고 해서 모두 같은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리라.

만약 문화가 영화 문학 음악 미술 건축 연극 등으로 한정되지 않고 사람 사는 모습과 관련되는 것이라면 이 소중한 지면을 빌려 공부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조금 하고 싶다. 대학로에 가면 바탕골극장 뒤편으로 '수유연구소+연구공간 너머(transs)'라는 문패를 붙이고 있는 공간이 있다.

수유연구소라고 하면 모유 권장하는 시민들의 모임일 것 같고 트랜스젠더(하리수처럼 자신의 타고난 성(性)을 바꾼 사람)가 연상되는 너머(transs)라는 이름에서는 뭔가 묘한 분위기가 담겨있을 것만 같다.

하지만 웃자고 한 소리였고 연구소가 처음 수유리에서 시작되었기에 수유연구소이고 서로 다른 학문영역 사이에 설정되어 있는 경계를 넘어서 통합적인 연구를 수행하자는 의미에서 연구공간 '너머'라는 이름이 주어졌다고 한다.

수유연구소의 고참 연구자들은 이진경 고미숙 정선태씨 등이다. 이진경씨는 1980년대 <사회과학과 사화과학방법론>(일명 사사방)으로 명성을 떨쳤던 경제학자이고 고미숙씨는 고전문학을 전공하는 열정적인 국문학자이며 정선태씨는 도스토옙스키 강의로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던 연구자이다.

현재 연구소에는 50명의 일반회원과 90명의 세미나 회원이 수시로 드나들고 있다. 대학로에 소재하고 있는 빌딩의 4층과 5층을 사용하고 있는데 5층 전체와 4층의 절반은 연구공간이며 4층의 나머지 절반은 카페 겸 식당으로 운영하고 있다. 개별 주제들을 중심으로 25개의 세미나 진행 중이며 인문사회과학과 일반대중 간의 대화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7개의 대중강좌가 개설되어 있다.

연구공간에는 <독립신문> <황성신문> 등과 같은 인문사회과학 연구자들을 위한 자료가 구비되어 있으며 유흥공간에는 가끔 에로비디오도 섞여 있기는 하지만 영화사에서 중요성을 인정받은 작품들을 비디오와 CD로 구비해 놓고 있다.

이와 같은 문화적 환경에 힘을 입었기 때문일까. 최근에는 <이것은 애니메이션이 아니다>라는 책을 공동으로 집필해서 애니메이션에 대한 철학적인 읽기를 선보인 바 있다. 금요일 오전에 세미나에 참여하는 필자가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곳은 카페 트랜스이다.

저렴한 가격의 커피와 음료, 원가에 가까운 술값, 공짜로 볼 수 있는 만화들, 정선태씨가 가져다 놓은 2,000 여장에 달하는 음반들이 필자를 반기기 때문이다. 카페는 카페지기를 두어서 자율적으로 운영하고 있는데 자신이 사용한 컵은 세면대에서 씻은 후 반납하게끔 되어 있다.

한국의 인문사회과학 연구자들이 지을 수 있는 가장 행복한 표정이 수유연구소에 있다는 생각을 가끔 한다. 만약 100만 달러가 주어진다면 아마도 그들은 적절한 곳에 독자적인 연구공간을 마련하고 책, 음반, 영화, 만화 등의 문화적 콘텐츠를 보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느라 골머리를 썩게 되지 않을까.

수유연구소를 소개하는 이유는 다른 곳에 있지 않다. 대통령 아들이 사용한 엄청난 액수의 돈이면 국내의 많은 연구자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자 함이 '결코' 아니다.

전형적인 '구지식인'들의 모임인 수유연구소가 외부의 지원 없이 자체적으로 자신들의 공간을 마련하고 학문적 영역을 넘어 서로 소통하고 있으며 일반대중과의 대화의 장을 끊임없이 시도하고 있다는 점을 말하고자 했을 따름이다. 그들이 보여주고 있는 자립성은 그깟 돈 몇 백 만 달러와는 결코 바꿀 수 없는 것이 아닐까.

모든 사람이 공부할 필요는 없다. 공부는 정말 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해야 한다. 그리고 좋은 사회는 공부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기회와 지원을 아끼지 않는 사회가 아닐까 한다. 내가 살고 있는 곳이 정말 최소한의 합리성이라도 있는 사회인지 의심스러운 날들이다.

김동식 문학평론가 tymtan@empal.com

입력시간 2002/05/05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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