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6·13 지방선거 D-30] 풀뿌리 민주주의가 썩는다

단체장들 각종 부패·비리로 줄 구속, 현행 선거제도 보완 시급

“지방자치 단체장들에겐 일반적으로 개인 활동비와 대외용 로비 자금, 선거철 사조직 운영비 등을 뒤에서 정기적으로 대주는 몇 명의 지역 경제인 스폰서가 있기 마련입니다. 선거운동 자금은 물론이고 해외출장비와 명절 떡값 등 사소한 잡비에서부터 이해관건이 걸려있는 각종 인ㆍ허가와 관련한 대가성 비자금의 커넥션인 셈이죠. 지방자치는 결국 단체장이 중앙 진출에 대한 야심을 키우며 개인적으로 경제적 자치(自治)를 통해 도약의 발판으로 활용되는 경우가 비일비재 합니다.”(한 지방 광역시 전 시청 고위 관계자)

‘풀뿌리 민주주의’로 불리는 지방자치제가 각종 부패와 비리의 온상으로 바뀌고 있다.


민선 2기 단체장 40여명이 유죄판결

광역자치 단체장들이 최근 잇따른 비리연루 혐의로 구속되거나 수사선상에 오르면서 1995년 도입된 지방자치제의 뿌리 자체가 크게 흔들리고 있다. 특히 10여일 앞으로 다가온 한일 월드컵 축구대회가 열리는 인천과 대구, 울산 광역시의 경우, 자치 단체장 모두가 검찰에 수사를 받고 있어 행사추진에 차질이 우려될 정도다.

행정자치부가 집계한 비리 연루 자치단체장 현황에 따르면 1998년 출범한 민선 2기 16개 광역단체, 232개 기초 단체장 중 이미 40명이 유죄판결을 받았다. 또 현재 진행중인 사건의 처리가 끝날 경우 민선 2기의 유죄판결 자치 단체장은 1기(23명)의 2배가 넘는 50명 선에 달할 전망이다.

중앙정계 진출의 의욕을 보여온 최기선 인천시장은 5월 9일 대우자판으로부터 3억원을 수수한 혐의로 구속됐다. 최 시장은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3월 인천 모 호텔 주차장에서 인천시 연수구 대우타운 건립 추진을 위한 용도변경 과정에서 대우측으로부터 각종 편의를 제공해 달라는 청탁을 받고 3억원을 받은 것으로 밝혀졌다.

인천시는 4월초 최 시장의 첫 검찰소환 통보 이후 고위직에 대한 후속인사와 김포매립지 개발 등 각종 사업 추진이 사실상 중단된 상태다. 인천시 공무원직장협의회 한 관계자는 “믿었던 최 시장이 수뢰혐의로 구속된 후 사기가 떨어진 공무원들이 사실상 일손을 놓은 상태”라며 “월드컵이 코 앞에 다가왔지만 각종 행사준비는 물론 중앙부처와의 원활한 교류도 어려울 지경”이라고 말했다.


행정공백사태 등 정책시행에 큰 차질

또 문희갑 대구시장은 5월 10일 지역 경제인으로부터 정기적으로 거액의 뇌물을 받은 혐의 등으로 구속영장이 청구됐다.

검찰에 따르면 문 시장은 1997년부터 5년 간 ㈜태왕의 회장으로부터 선거운동 자금과 해외출장비, 명절 떡값, 공사편의 대가 등의 명목으로 수십 차례에 걸쳐 9,500만원을 받은 혐의를 받고 있다. 문 시장은 또 1996년부터 4년간 제주도 남제주 군의 땅 4,000평을 측근을 통해 관리해 온 혐의도 받고 있다.

대구 광역시도 각종 시책사업의 차질을 우려하는 분위기가 팽배하다. 문 시장이 추진해 오던 롯데의 골프장 건설과 특급호텔 건립, 삼성의 전용 야구장 건설 및 첨단산업유치, 삼성상용차 협력업체 보상문제, 대형 쇼핑몰 건설 추진 등에 대한 계획차질이 예상되고 있다. 지역 섬유업계도 섬유산업 육성 방안인 ‘밀라노 프로젝트’ 추진이 어려울 것으로 보고 있다.

6ㆍ13 자치단체장 선거에 불출마를 선언한 심완구 울산시장은 택지분양과 관련 3억원을 수뢰한 혐의로 검찰의 소환일자만을 기다리고 있다. 이에 따라 공직 내부의 기강이 흔들리는 울산시는 5월6일 사전 홍보 없이 택시요금을 16.56%나 기습 인상해 시민들의 원성을 사는 등 어수선한 분위기다.

그러나 시 공무원들은 심 시장의 수뢰혐의가 알려진 후 시장 후보에 대해 앞다퉈 줄서기에 나서 시 행정은 공황기에 빠져들고 있다.

유종근 전북도지사는 3월 전북도의 국제자동차 경주대회의 유치와 관련, 세풍 그룹으로부터 4억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됐고, 외환위기 이후 5개 은행의 합병 소용돌이가 몰아치던 1999년 서이석 전 경기은행장으로부터 1억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됐던 임창열 경기도지사까지 포함하면 16명의 광역단체장 중 5명이 구속됐거나 형사처벌을 앞두고 있는 상황이다.

전북도는 지사 사퇴를 거부한 유 지사의 ‘옥중결재’와 행정 부 지사마저 최근 시장 출마를 위해 자리를 떠나 도정(道政)이 공백 상태를 보이고 있다.

시민단체와 정치ㆍ행정학자들은 이 같은 단체장들의 잇따른 비리연루의 근본 원인으로 막대한 선거자금이 들어가는 선거제도와 감시장치가 결여된 단체장의 막강한 권한 등 복합적인 문제점을 꼽는다.

정세욱 명지대 교수(행정학)는 “부정과 비리의혹이 있는 자치단체장을 주민투표를 통해 해임시킬 수 있는 주민 소환제를 도입하고 주민이 해당 자치 단체 감사관을 직접 선출해 단체장의 비리와 전횡을 견제할 수 있는 제도의 도입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막대한 자금 소요되는 선거제도에 문제

지자체 선거에 나가기 위해서는 최소한 기초 단체장은 5억원, 광역 단체장은 50억원 정도의 선거자금이 필요하다는 것이 정당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하지만 현행 정치자금법에는 지구당 위원장말고는 정치자금을 모금할 수 없게 돼 있다.

이 때문에 단체장 후보들은 선거 때 마다 지역 경제인 등 지방 유지나 이권 관련 업자들에게 손을 벌릴 수 밖에 없다. 선거 이후에는 당선사례로 그들에 대해 ‘이권’으로 되 갚아야 하는 비리의 고리가 자연스럽게 형성될 수 밖에 없는 것이 ‘비리의 상도’인 셈이다.

서울의 한 구청장은 “선거비용은 물론 정당공천을 받는데도 막대한 돈이 들어가지만 단체장들은 정치자금을 모으는 길이 막혀있다”며 “지역 유지와 업자들에게 ‘총알’을 지원 받을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정당공천제도 문제다. 지자체 선거가 지역주의 구도로 변질 되다 보니 정당 공천이 곧 당선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아 당선이 확실한 지역에선 수 십억원의 공천 헌금을 중앙당에 받쳐야 한다. 결국 해결책은 단체장의 정치자금 모금 합법화와 정당 공천제 정비에 있다는 목소리가 높다.

광역단체 장 뿐 아니라 시장ㆍ군수ㆍ구청장 등 기초 단체장들의 비리는 한층 심각한 문제로 지적된다. 기초단체장들의 비리는 언론과 사정기관에 노출되기 쉬운 광역 단체장과 달리 잘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 그 원인.

특히 기초단체는 건축ㆍ위생ㆍ도시계획 등 시민 생활과 밀접한 부분의 인허가를 맡아 문제가 더욱 심각할 수 있다. 김박태식 참여연대 시민감시국 의정감시센터 간사는 “지방 단체장들의 비리를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서는 주민 발안제와 주민투표제, 주민 소환제 등 다양한 시민 감시 기능을 채택해 자치 단체장에 대한 견제와 책임 추궁을 할 수 있는 법적 장치를 마련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장학만 주간한국부기자

입력시간 2002/05/17 13:58


장학만 주간한국부 local@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