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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물결, 태극 혁명, 그리고 R세대

세상의 중심으로 우뚝, 애국을 생동감 넘치는 '친근함'으로 승화시켜

태극 혁명(Revolution)! 붉은(Red)색 티셔츠과 페이스페인팅은 기본, 태극두건 태극망토 태극'배꼽티'로 멋을 낸 스무 살의 여성, 승리의 환희(Rejoicing) 속에서도 책임감(Responsibility) 있게 쓰레기를 줍는 고등학생, 386세대들이 비장하게 부른 애국가와 아리랑을 록(Rock) 리듬에 맞춰 머리를 흔들며 노래 부르는 대학생들.

프랑스와 멕시코 등 월드컵 개최국이면 어디 든 축구에 열광하고 애국심에 불타는 월드컵(W)세대는 있었다. 1998년 월드컵 당시 프랑스팀 '르 블뢰'를 연호하며 희망과 승리에 환호하던 젊은 ‘파리지앵’ 을 가리켜 ‘르 코크(Le Coq: 프랑스팀의 상징인 닭)세대’라고 불렀다.

2002년 6월. 전 세계는 우리나라 건국 이래 최고의 인파로 광장을 붉게 물들인 ‘붉은 악마 R(Red) 세대’ 젊은이들을 주목했다.


월드컵을 국민적 축제로 만든 붉은열정

서울 시청과 광화문을 넘어 전국 방방곡곡을 ‘붉은 바다’로 출렁이게 한 ‘R세대’. 이들이 뿜어내는 열기는 ‘대~한 민국’의 자신감으로부터 용솟음쳤다. 응원인파로 뒤덮인 거리, 그 역사적 현장 한 복판의 주인공으로 우뚝 선 이들은 ‘거리응원 세대’ 혹은 ‘대~한 민국 세대’ 로 불린다.

누가 말을 안 해도 그들은 ‘그 곳’을 찾았다. 이들에겐 더 이상 세상의 중심이 외부에 있지 않다. 자신들이 그 자리에 있어 역사의 관찰자가 되고 역사가 움직인다고 생각하는 새로운 로맨티스트인 ‘R세대’다.

이들은 딱딱한 ‘국가’와 ‘애국심'이란 교과서적 단어를 자신들의 체험 속으로 끌어들여 생동감 넘치는 감흥과 친근감으로 승화시켰다.

R세대는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월드컵 대회를 국민적 축제로 일궈냈다. 기성세대에겐 학연과 지연, 직업들이 인간관계를 엮는 코드라면 이들에겐 빨간 T셔츠와 ‘오~필승 코리아’, ‘아리랑’ 등 승리를 열창하는 랩소디(Rhapsody)가 바로 공통 관심사다.

배타적이기 보단 수용적(Receptive)이며 ‘비 더 레즈(Be The Reds)’를 향한 목적의식과 생각만 같다면 서로 쉽게 동화하는 붉은 열정으로 가득하다.

이들은 더 이상 밀폐된 사이버 공간에 매몰된 세대가 아니다. 극도의 개인주의로 치닫던 ‘모래알 세대’로 비쳐졌던 이들은 월드컵이란 세계적 스포츠 이벤트를 통해 낯설기만 했던 ‘나라사랑’의 벅찬 감동을 공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 경기가 끝나고 축제의 뒤풀이를 마친 R세대들은 인터넷에 몰려들어 축제의 여진이 오랫동안 계속되기를 기원했다. “우리가 하나라는 느낌을 잊고 있었는지 모르는 대한민국에 대한 뜨거운 사랑. 그러나 이젠 좀 걱정이 돼요. 우리가 하나된 이 감동과 느낌이 얼마나 오래갈지. 우리가 이런 느낌을 금새 잊어버리고 지나고 나면 또 다시 지역감정이나 학연 등으로 갈갈이 찢어지는 것은 아닐지…/ truth21” (다음 월드컵 사랑 카페)

이들은 또 태극기 패션으로부터 페이스 페인팅에 이르기까지 파격적인 문화현상을 창출해내고 유행시켰다.

15~25세가 주축을 이룬 R세대는 거리 응원을 통해 기성 세대가 간과해온 국가에 대한 자긍심과 축제문화의 흥겨움을 동시에 만들어냈다.


한국인인 것이 너무 자랑스러워요

한국이 이탈리아와 스페인을 거듭 누르고 승리했을 때 서울 시청과 광화문에서는 수 십만 명의 젊은이들이 어깨를 걸고 한 목소리로 애국가를 4절까지 불렀다. 국경일에도 잘 내걸리지 않았던 태극기가 자동차와 건물 곳곳에 매일매일 휘날렸다.

안수진(17ㆍ서울예고 3학년)양은 “거리 응원에 동참하면서 한 동안 잊고 지냈던 대한민국과 우리 민족애의 무한한 자긍심이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솟구쳐 눈물이 쏟아질 정도였다”고 감동의 순간을 잊지 못했다.

R세대의 애국심은 민주화 투쟁이란 비장함 속에 느껴야 했던 386세대의 그것과 달리 정치ㆍ경제적으로 발전하고 스포츠에서도 기적을 일궈낸 데 대한 자신감에서 비롯된다.

열정적이면서 질서를 잃지 않는 축제문화를 만든 것도 R세대들이 품어온 자신감의 소산이다. 폴리스라인 안쪽을 따라 강강술래 놀이를 벌이고 ‘기차놀이’를 즐기며, 빗속에선 풀 죽이 된 종이를 쓰레기통에 담는 질서 정연한 모습으로 어른들을 놀라게 했다.

R세대가 외친 ‘대~한 민국’은 단순한 응원 구호도 아닌 기존의 국가 이미지에 대한 긍정도 아니다. 선수들의 움직임을 좇는 그들의 눈동자는 ‘깨끗하고 정정당당하며 성실하게 준비하는’ 국가의 이미지에 대한 갈망으로 가득했다.

이들의 거리 응원은 개인의 열정에 바탕을 둔 새로운 축제의 가능성을 열어 보인 역사적인 대사건이었다.


꿈★을 이룰 희망을 그들에게 찾았다.

태극기와 붉은 티셔츠 등 R세대가 만들어 낸 사회ㆍ문화적 파격은 기성 세대들에게 큰 충격이었고 새로운 희망으로 떠올랐다.

연세대 황상민 교수(심리학과)는 “R세대 젊은이들은 거리 응원을 통해 자신들이 좋아하는 것을 당당하게 표현하고 다른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인정할 줄 아는 성숙한 자세를 보여줬다”며 “이들은 개별적인 취향에 충실한 동시에 공통된 취향을 만들어 갈 줄 아는 세련되고 민주적인 문화적 감수성의 소유자”라고 지적했다.

이상민 삼성경제연구소 연구원은 “젊은 세대의 열린 개인주의와 취향의 민주주의가 기성세대까지 전파돼 남녀노소를 불구하고 누구든 거리로 불러내는 마술을 보여줬다”며 “문화적 참여에 대한 젊은 세대의 열정이 기성세대를 설득해 낸 역사적인 사건”이라고 말했다.

박원순 변호사는 “금기시됐던 붉은색을 전면에 내세우고, 신성시하던 태극기를 패션으로 만든 파격은 상상력 부재에 시달리던 우리 사회에 충격을 줬다”며 R세대의 창의성을 높이 평가했다.

또 ‘R세대’, ‘대~한 민국 세대’가 보여준 에너지와 자발성을 월드컵 이후에도 사회발전의 원동력으로 이어가야 한다는 기대 반 우려 반의 목소리도 흘러나온다.

‘꿈★은 이뤄진다’는 붉은 악마의 영원한 소망처럼 거리 응원이 한국인의 문화적 공통 체험이 되는 과정에서 젊은 세대들의 역할은 푸른 청춘만큼이나 눈부시다.

장학만기자 local@hk.co.kr

입력시간 2002/07/05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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