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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회 멀티 태극전사 정몽준

뜨거운 열정과 추진력으로 월드텁 성공 개최 견인한 일등공신

한국이 월드컵4강 신화를 이룩하기까지 한국 축구 팀을 전폭적으로 지원한 ‘13번째 선수’ 정몽준(51) 한국축구협회 회장을 빼놓을 수 없다.

정 회장은 한 마디로 ‘올 라운드 플레이어’다. 그는 48년 한국축구의 새 역사를 쓰기까지 치열한 세계 축구외교 그라운드를 태극전사 못지 않은 뜨거운 열정과 추진력으로 누볐다.

키스 쿠퍼 FIFA 대변인은 “한ㆍ일월드컵 대회 개막을 앞두고 양국공동 개최라는 점에서 대회 운영과 조직 등 각종 협력체계에 대해 우려하는 사람도 많았다“며 “그러나 월드컵 조직위원회 한국측 공동위원장인 정 회장의 남다른 노력과 공로로 이번 월드컵은 큰 성공을 거두었다”고 평가했다.

파이낸셜 타임스(FT) 등 세계 유수 언론들은 “한일월드컵 대회의 성공인 마무리와 한국팀의 4강 신화는 12월 대선을 앞둔 한국 정치권에 ‘정몽준 돌풍’을 몰고 올 수도 있다”고 보도했다.


그는 약속을 지켰다

정 회장은 이번 월드컵 대회의 성공적인 개최를 예감한 듯 대회 개막직전 주간한국(2002년6월6일자 1924호)과의 인터뷰에서 “2002 한일월드컵 대회의 궁극적 목표는 ‘대 국민 화합’의 축제를 만드는 일”이라고 밝혔다.

그는 당시 이번 월드컵 개최를 통해 자신이 지향하는 5가지의 개최 목표를 함께 설명했다. ‘대~한민국’이란 국가 브랜드의 제고 및 월드컵 이후의 경제적 효과, 대북ㆍ대일 관계 개선, 그리고 월드컵 개최를 대 국민 화합의 장으로 이끌어 내겠다는 야심찬 계획이었다.

결과는 기대이상의 대성공이었다. 월드컵 한국 4강 진출과 더불어 ‘대~한민국’에 대한 자긍심은 남녀노소, 사회 전반에 붉은 해일처럼 일었고, 4,700만 국민이 붉은 색으로 하나되는 대 화합의 장이 열렸다.


월드컵 준비 10년, 고난의 연속

1993년 대한축구협회장에 오른 정 회장은 2002년 월드컵 대회유치를 취임일성으로 밝혔다. 그러나 출발은 늦었고 경쟁자는 막강한 일본이었다. 일본은 2년 전부터 본격 유치 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일본과의 경쟁은 치열했다.

당시 “양국 국가대표팀이 경기를 치러 이긴 나라에서 월드컵을 열자”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양국의 경합 열기는 무르익어갔다.

개최국이 결정된 운명의 날은 96년5월31일. 국내에서조차 “애초 불가능했던 일이었다”는 비관론과 “아버지(고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가 올림픽을 유치했던 것처럼 아들도 해낼 것”이라는 낙관론이 엇갈렸다. 장시간 회의가 끝난 뒤 정 회장은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치며 공동개최를 발표했다.

그러나 공동개최 결정 발표는 바로 고난의 시작이었다. 외환위기 이후 경제난 극복과 더불어 열악한 국내 축구 인프라가 가장 큰 문제였다. 개최도시 선정과 경기장 건설은 당초 실현 불가능한 목표였다는 질타의 목소리가 컸다.

월드컵 조직위원회(KOWOC) 내부에도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유치는 했지만 제대로 월드컵을 치러낼 수 있을 지 우려도 높았다.

그의 앞엔 또 다른 고민거리가 놓여있었다. 기대 이하의 대표팀 성적이 그것이었다. 당시 한국대표팀은 2000년 시드니 올림픽 예선탈락에 이어 10월 아시안 컵에서도 3위에 그치는 안방 개구리에 불과했다.

팀을 지휘할 명장을 찾는 일이 시급했다. 2000년 11월15일 오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한 호텔 로비. 비가 내리는 가운데 가삼현 대한축구협회 국제부장(현 국제국장)이 정 회장의 특명을 받고 한 신사를 만났다.

당시 국내에선 외국인 감독 1순위로 98년 프랑스팀을 이끈 에메 자케가 유력하게 거론되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정 회장은 네덜란드의 한 축구 야인과 먼저 접촉을 했다. 거스 히딩크는 당시 스페인 레알 마드리드 감독에서 물러난후 유럽 곳곳을 누비면서 야인생활을 해왔다.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난 12월18일 히딩크는 대한축구협회와 계약서에 서명을 했다.


국민대화합ㆍ자긍심 심어줘

하지만 출발은 순조롭지 않았다. 월드컵 개막을 1년 앞둔 2001년 5월 31일 컨페더레이션컵에서 프랑스에 0대5로 대패한데 이어 그 해 8월 체코에도 같은 점수차로 무릎을 꿇었다.

당시 ‘오대영’이란 별명을 얻은 히딩크 감독을 영입한 정 회장에게도 비난이 쏟아졌다. 그러나 정 회장은 히딩크를 끝까지 신뢰하며 기다렸다. 정 회장은 당시 감독 경질설에 대해 “당신들은 달나라에서 왔는가”라고 일축하면서 월드컵 16강 진출의 확신을 피력했다.

정 회장은 뚝심으로 모든 난관을 극복했다. 멋진 월드컵 경기장과 한국대표팀의 눈부신 질주에 세계가 깜짝 놀랐다. 대회가 시작된 이후 일본은 뒷전으로 밀리고 늘 한국이 화제의 중심이었다.

정 회장이 장담했던 대로 월드컵은 스포츠 행사 이상의 대국민 화합을 이뤘고 길거리로 쏟아진 국민들은 민족적 자긍심으로 가슴을 활짝 폈다.

장학만기자 local@hk.co.kr

입력시간 2002/07/05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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