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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업씨와 돈, 그리고 권력] 재벌의 '보험들기'는 계속되고 있다

[홍업씨와 돈, 그리고 권력] 재벌의 '보험들기'는 계속되고 있다

삼성·현대 홍업씨에 거액 상납, 국민의 정부서도 정·경 유착은 여전

7월 10일 발표된 김대중 대통령 차남 홍업씨의 공소장에는 구속영장에 명시됐던 것 이외에 혐의 사실이 하나 더 추가됐다.

이른바 ‘조세범처벌법 위반’. 공소장에는 홍업씨가 1998년 6월부터 2000년 5월까지 삼성 현대 등 재벌 기업들로부터 22억원의 ‘활동비’를 받고도 이를 세무당국에 신고하지 않아 모두 5억8,000만원의 증여세를 탈루한 사실이 적시되어 있었다.

현 정부 출범 후 벤처기업과 권력이 유착한 비리가 터질 때마다 “최소 과거처럼 대기업에 손을 벌리는 일은 없어졌다”며 차별화를 시도해 온 정권 핵심 인사들의 항변이 거짓으로 판명 나는 순간이었다. 특히 그 주체가 대한민국 대표기업인 삼성과 현대라는 점에서 충격은 더욱 컸다.


현대 16억원, 삼성 5억원 활동비 지급

1998년 7월 현대그룹의 고(故) 정주영 명예회장은 동생인 정상영 ㈜금강고려화학 회장을 통해 홍업씨에게 활동비 10억원을 지급했다. 돈 심부름을 맡은 것은 홍업씨와 경희대 동문관계로 평소 친분이 있었던 금강고려화학 김춘기 부사장.

김 부사장은 10만원권 헌 수표 1만장, 도합 10억원을 들고 강남구 역삼동에 있는 홍업씨의 개인 사무실로 찾아가 전달했다. 정주영 명예회장과 현대의 ‘통 큰’ 스타일이 또 한번 유감없이 발휘되는 장면이다.

현대의 지원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99년 3월부터 2000년 2월에 이르는 12개월간 현대는 매달 한번도 빠짐없이 현금 5,000만원씩을 홍업씨에게 전달했다. 마치 월급을 주듯 돈 보따리를 싸들고 홍업씨 사무실로 찾아간 사람은 현대택배 강명구 부회장.

당시 현대전자 부사장이었던 강 부회장은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의 최측근으로 그룹내에서도 핵심으로 통하는 인물이다.

2000년 2월 이후 활동비 지급이 중단된 데 대해 수사팀 관계자는 “2000년 상반기 현대그룹 경영권을 둘러싼 ‘왕자의 난’ 등 내부분란이 생기면서 돈 전달이 중단된 것 같다”고 말했다.

현대가 정 명예회장 개인 돈으로 ‘보험료’를 지급한데 반해 삼성은 구조조정본부가 나섰다. 99년 12월 그룹 구조조정본부 김인주 부사장이 회사 자금으로 현금 5억원을 마련해 홍업씨에게 전달한 것이다.

검찰은 수사 발표에서 “김 부사장은 조사과정에서 ‘순수한 개인 판단으로 돈을 줬고 부사장 전결로 사용할 수 있는 회사자금이 5억원은 된다’고 주장했다”고 밝혔지만 믿기 어려운 해명이었다.

홍업씨의 변호인인 유제인 변호사는 재벌로부터 돈을 받은 데 대해 “아태재단 운영이 어렵던 차에 ‘돕겠다’는 기업들의 제안을 거절하기 힘들었던 모양”이라며 “돈을 받으면서도 ‘거절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었고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을 뉘우치고 있다”고 홍업씨의 심경을 전했다.

즉 활동비 제공은 홍업씨가 요구해서가 아니라 재벌들 스스로 제안해 이뤄진 것이라는 주장이다.


대가없는 자금, 누가 믿나

검찰은 재벌들의 활동비 제공과 관련, 증여세 포탈 이외에는 ‘혐의 없음’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청탁 등 특별한 대가성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당사자인 현대와 삼성측은 이번 사건과 관련, 돈을 준 이유 등에 대해 일체 공식적인 해명을 삼가고 있다.

현대의 한 관계자는 사견임을 전제로 “정권실세에 대한 정치자금 제공이 어제오늘 일이 아닌데 현 정부 들어 한번도 없었다면 그게 도리어 이상한 일”이라고 말했다.

또 삼성의 한 관계자는 “다른 기업들이 돈을 준다는 정보가 있는데 우리 회사만 안주기도 어려운 일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어쨌든 직접적인 대가성과는 무관한 관행에 따른 활동비 지급이었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IMF 체제와 동시에 출범한 현 정권이 집권기간 내내 각종 재벌관련 정책들로 기업들과 긴장관계를 형성했던 점을 고려하면 이들 기업들의 활동비 지급을 ‘무대가성’이라 예단하기는 어렵다.

특히 현대의 경우 현 정부 초기에 끊임없이 정권과의 유착설이 흘러나왔던 기업이라는 점에서 DJ정부의 현대에 대한 특혜시비가 다시 쟁점화할 가능성도 점쳐진다.

현대가 홍업씨에게 활동비를 제공했던 시점은 금강산 관광사업 등 현대의 활발한 대북사업 추진과 정 명예회장이 소떼를 몰고 북한을 방문했던 기간과 맞물린다.

또 시행단계서부터 특혜시비를 낳았던 LG반도체의 현대전자(하이닉스반도체) 인수, 현대건설에 대한 출자전환 및 12조원대 공적자금 지원 등도 활동비 지급 사실이 드러나면서 새삼 의혹의 대상으로 떠오르고 있다.

검찰은 그러나 “정 명예회장이 이미 작고해 홍업씨에게 준 돈이 대가성이 있었는지에 대한 판단이 불가능하다”고 밝혔다.

삼성의 경우 활동비 전달주체가 구조조정본부 관계자라는 점에서 그룹 구조조정 과정에서의 특혜를 염두에 둔 자금지원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사고 있다.

현 정부는 집권 초부터 선단식 경영해체를 목표로 재벌의 구조조정을 압박했었고 이 과정에서 상당한 알력을 빚었다. 따라서 삼성측의 5억원 제공은 일종의 구명성 로비자금이 아니겠느냐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막후 실세…현대ㆍ삼성 뿐일까

홍업씨가 아태재단 부이사장으로 활동하며 사실상 현 정권의 ‘막후 실세’로 행세해 왔다는 점에서 돈을 건넨 재벌이 삼성 현대뿐이겠느냐는 의혹이 제기된다.

재벌 1,2순위를 다투며 ‘잘 나갔던’ 삼성 현대가 그만한 성의를 보였다면 정권에 바라는 것이 더 많았을 나머지 그룹들은 더 적극적으로 나섰을 것이라는 얘기다.

홍업씨의 각종 기업체 이권청탁 개입 행태로 볼 때 정교한 돈세탁 때문에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지 실제로는 다른 대기업들도 돈을 건넸을 것이라는 추측. 이와 관련해 대검 중수부는 홍업씨가 A그룹과 D그룹, 3개의 H그룹, L그룹 등 10여개 그룹의 2세 경영인 및 임직원으로부터 금품과 향응을 제공받았다는 의혹에 대해 보강수사를 벌이고 있다.

이중 H그룹의 C부회장의 경우 홍업씨의 술자리 비용과 해외여행 경비를 부담했으며 다른 그룹 관계자들로부터도 아태재단 후원금과 개인활동비 등 명목으로 금품을 챙겨온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검찰 조사를 받은 모 그룹 임원은 “김성환씨 등의 주선으로 10여개 그룹 관계자들이 역삼동 홍업씨 사무실로 불려와 금품을 제공하고 별도의 향응도 제공한 것으로 알고 있다”며 “이들 그룹은 ‘피해는 보지 말아야겠다’는 보험차원에서 홍업씨와 어울린 측면이 강하다”고 말했다.

검찰 관계자는 “홍업씨 관련자금은 대부분이 추적이 힘든 수표와 현금이어서 다른 그룹의 금품제공 여부는 홍업씨의 추가진술이 있어야 드러날 것”이라고 밝혔다.


상납관행의 끈질긴 생명력

홍업씨에 대한 재벌의 활동비 지급은 돈을 매개로 한 ‘권력-재벌’의 유착이라는 군부독재시절의 음습한 관행이 여전히 살아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일해재단 등 각종 모금이나 국책사업, 대형공사 등을 수주하는 대가로 기업들로부터 한번에 수 십억원씩 재임기간 모두 1조원의 비자금을 만들었고 그를 이은 노태우 전 대통령은 대우그룹으로부터 250억원을 받는 등 30대 기업으로부터 2,358억원을 끌어들였다.

문민정부 출범이후 김영삼 전 대통령은 “기업들로부터 단 1원도 받지 않겠다”고 천명했으나 그의 차남 현철씨는 김덕영 두양그룹 회장 등 기업인 6명에게서 32억원을 받아 증여세 포탈혐의로 구속됐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정권이 바뀌어도 권력의 속성은 변하지 않았다”며 “요구하는 권력이 존재하는 한 재벌의 ‘상납’ 관행은 근절되기 어렵다”고 말했다.

노원명기자 narzis@hk.co.kr

입력시간 2002/07/19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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