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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LP여행] 정태춘(下)

고독의 친구, 희망의 친구

데뷔음반부터 가해진 ‘공륜의 심의보류 조치’는 정태춘의 창작욕을 옥죄며 숨구멍을 막아왔다. 노래 ‘시인의 마을’중 ‘나는 고독의 친구 방황의 친구’라는 대목이 부정적이라는 이유로 심의에 탈락되자 음반사는 ‘나는 자연의 친구 생명의 친구’로 바꾸어 겨우 심의를 통과시켰다.

이후 1988년 6집 ‘무진 새 노래’를 낼 때까지 전면 개작지시 10곡, 부분 개작 지시를 20여 곡이나 받으며 그는 숨을 헐떡거렸다.

대중 취향의 달콤한 곡들만이 선곡된 데뷔음반 ‘시인의 마을-서라벌,SR0125,1978년11월5일' 은 빅히트를 했다. 수록곡 ‘촛불’등의 히트 퍼레이드로 달궈진 뜨거운 호응은 단번에 인기가수로 떠오르게 했다.

또한 신인가수 박은옥과의 꿈같은 연애는 정태춘에게 인생의 달콤함을 만끽하게 했다. 1집의 성공으로 음반사는 2집의 곡 선정을 가수에게 아예 맡겨 버렸다. 그러나 음악보다는 적응키 힘든 ‘명랑운동회’등 오락프로 출연을 강요하는 인기 가수생활은 체질에 맞지 않았다.

정태춘은 자기 색깔의 음악 찾기에 집착하며 주류가요계에 차츰 거리를 두었다. 그 결과물이 상업성이 철저하게 배제된 2집 ‘사랑과 인생과 영원의 시-서라벌, SR0183,1980년 1월30일’과 국악과 양악의 음악적 상관관계에 대한 실험을 꾀한 3집 ‘정태춘-대성, DAS0022, 1982년3월20일’이었다.

명반으로 손꼽히는 이 음반들은 ‘촛불’류의 달콤한 제2의 노래를 기대했던 대중들의 철저한 외면을 받았다.

음반사의 만류를 뿌리치고 1980년 5월 결혼한 정태춘에겐 경제적 파산이라는 불청객이 기다리고 있었다. 생활고에 시달리다 부부가 함께 지구레코드사와 4년 간 전속에 800만원이라는 굴욕적인 계약을 맺으며 발표한 1985년 5번째의 앨범 ‘북한강에서’는 ‘자연 속에 자신의 내면을 투영하는 사색적인 노래’로 주목받으며 다시 대중들의 환영을 받았다. 이때부터 역동적인 민요적 선율과 창법을 선보였다.

이후 1987년까지 3년 동안 전국의 소극장을 순회하는 라이브 콘서트 ‘정태춘, 박은옥의 얘기 마당’으로 음악적 변화를 꾀했다. 자신의 음악적, 사회적 고민들을 대중들을 직접 만나 얘기하면서 정태춘은 6번째 앨범 ‘무진 새 노래-1988년’으로 확연하게 변화된 음악세계를 공개했다.

수록곡 ‘고향집 가세’에서 보여주듯 ‘몸은 떠나와도 마음은 떠나지 못했던 과거의 고향에서 벗어나 비록 퇴락하고 노인들만 남은 고향이지만 애정을 가지고 그 속에서 희망을 발견하려고 애쓰는 현재적 시점의 고향’을 묘사하는 인식의 전환을 보였다.

1987년 겨울 서울 청계피복 노조의 작은 집회에서 시작된 현장운동 이후 그는 ‘송아지 송아지 누렁송아지’라는 전국 순회공연에서 20여 개의 북으로 춤과 반주를 같이 함으로써 신명성과 집단성까지 터득한다.

1989년 전국 각 대학 총학생회와 결합한 전교조 지지 공연은 20만 명이 넘는 민중들과 호흡한 대형 야외 공연이었다. 이때 그는 사회현실과 음악이 갖는 힘에 새롭게 눈떴다. 정태춘은 모든 것을 혼자 몸으로 부딪히고 습득해나가며 문제의식을 단련했다.

하지만 자신의 음악이 더 이상 제도권의 심의를 통과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되자 질식할 것 같았다.

1990년 마침내 사전심의 철폐운동이라는 정면대결로 들어간다. 비합법 음반인 1990년 ‘아! 대한민국’과 1993년의 ‘92장마 종로에서’는 제도권에 대항하는 적극적 행동이었다. 그는 공륜의 심의를 거부한 불법 카세트 테이프를 제작하여 대학가나 집회현장에서 판매하고 서명운동을 벌였다.

정태춘은 “가요사상 첫 사전심의 거부였는데도 1989년 이후 해금 분위기 때문인지 이상하게도 정부의 간섭이 별로 없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그러나 직설적인 사회비판을 담았던 1990년 음반과는 달리 서정성이 짙은 1993년의 두 번째 비합법 음반은 사정이 달랐다. 각 시도 경찰서로 ‘음반회수’ 공문이 나돌자 새마을체육관 등 공공성격이 짙은 곳은 여지없이 판매저지가 이어졌다.

1993년 말 문화부의 고발로 불구속 기소가 되자 정태춘은 위헌법률심판 신청을 냈고 1996년 마침내 음반의 사전심의폐지라는 성과를 얻어냈다. 또한 3가지 버전의 LP 재킷으로 발표된 ‘92 장마, 종로에서’ 음반은 가요음반 콜렉터들의 군침을 흘리게 하는 희귀 음반으로 대접 받고 있다.

1980년대 후반 전개된 민주화 운동이라는 시대적 상황을 외면하지 않고 음악을 통해 발언하는 실천적인 대중예술인의 면모를 보여주었던 정태춘. 1990년대에 들어 민주화 운동에 참가했던 사람들이 하나 둘 무기력에 빠질 때 그는 희망의 노래들로 자신이 한국포크의 진정한 계승자임을 보여주었다.

최규성 가요칼럼니스트 kschoi@hk.co.kr

입력시간 2002/08/04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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