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와 오늘] 헐뜯기 정국

21일간 총리 서리를 지낸 장상 전 이대 총장은 국회 청문회에서 “(가정법을 근거로 한) 질문에 대해서는 답변을 못 하겠다”고 했다. 물론 이 같은 이유만으로 그녀는 신임을 얻지 못한 것은 아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임기 마지막 휴가 중 이 소식을 듣고 “이런 결과가 나온 것에 대해 ‘애석’함을 금할 수 없다”고 했다. ‘동아 국어 새사전’에 따르면 ‘애석’이란 말은 두 가지의 뜻을 가지고 있다.

애석(哀惜)은 ‘슬퍼하고 아깝게 여김’을, 애석(愛惜)은 ‘무엇을 잃거나 누구와 헤어지거나 무슨 일에 슬퍼 하거나 하여 몹시 아쉬움’을 뜻한다고 풀이 되어 있다. 김 대통령은 과연 어느 쪽을 썼을까.

박선숙 청와대 대변인은 나이 답지 않은 침통한 표정으로 “통절(痛切)한 심정을 금할 수 없다”고 했다. 통절은 이 사전에 ‘몹시 절실함, 몹시 고통스러움’이라고 풀이 되어 있다. 박 대변인의 심정과 김 대통령의 애석 표현에는 슬퍼하는 아픔이 같이 있기에 애석(哀惜)이 아닐까.

그러나 불신임 파동 후 한나라당과 민주당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이회창 대통령 후보의 아들 병역 문제를 둘러싼 험구 공방전은 ‘애석’정국을 ‘헐뜯기 정국’으로 바뀌어 놓고 있다.

이런 때에 엉뚱한 가정을 해본다. 요즘 미국에서 5주째 뉴욕 타임스 논픽션 부문 베스트 셀러 1위에 올라있는 ‘헐뜯기-자유주의자들의 미국 우익에 대한 거짓말’의 저자 앤 커트러에게 우리의 정국을 진단 시켜 봤으면 하는 것이다.

커트러는 미시간대 법대를 나온 여성 변호사로 상원 법사위원회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법조인이다. 법조 잡지 ‘휴먼 이벤트’의 기고가에서 출발해 지금은 미국의 저명 저술가 100명에 들 정도로 명성을 쌓았다. 그녀가 6월에 낸 ‘헐 뜯기’는 그녀의 두 번 째 책이다. 빌 클린턴 대통령의 재임 중 ‘공적범죄와 비행’이란 책을 내 베스트 셀러에 올랐다.

‘헐뜯기’는 지난 50년간 미국의 좌파며, 진보주의인 자유주의가 어떻게 우파인 보수주의를 헐뜯어(slander) 왔는지를 변호사답게 증거를 대가며 제시하고 있다. 256쪽짜리 책 중 35쪽은 깨알 같은 글씨로 쓰여진 각주(脚鑄)들이다. 무려 780건이나 된다.

이 각주 중 제일 많이 등장 하는 것이 뉴욕 타임스의 정치면 기사와 사설, 칼럼 등이다. 커트러는 ‘헐뜯기’가 베스트셀러가 될 것이라고 예감했던 것 같다. 미국에선 30만부 이상이 팔려야 베스트셀러 반열에 든다.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이겠지만 보수적인 책은 잘 팔리지 않는다.

그녀의 조사에 의하면 공산주의 경제이론을 비판한 프리드리히 하이예크의 ‘예종에의 길’(1944년 미국 출간)은 20만6,000부가 팔렸다. 레거노믹스의 이론적 토대가 된 밀턴 프리드먼의 ‘선택의 자유’(79년 출간)는 124만부. 놀라운 것은 1960년 나온 아리조나주 상원의원 베리 골드워터(64년 공화당 대통령 후보)의 ‘한 보수주의자의 양심’은 350만부가 팔렸다.

클린턴 대통령이 연루된 각종 스캔들이 터지면서 커트러를 비롯한 보수파들은 자유주의적인 민주당의 정체를 캐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자유주의, 진보라는 간판 아래 감춰진 그들의 정체를 파헤치기 시작한 것이다.

커트러가 낸 클린턴의 ‘공적범죄와 비행’에 관한 책은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폭스 케이블 뉴스의 오닐리의 ‘미국인 생활의 좋은점, 나쁜점, 웃기는 점’도 새 천년 베스트 셀러가 되었다. 자유주의를 표방한 댄 레더(CBS), 피터 제닝스(ABC), 톰 브로커(NBC) 같은 앵커들의 보도자세와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또한 이는 적어도 미국인의 50%대가 보수주의를 지지하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커트러는 클린턴이 1992년 대선에서 43%의 득표율로 당선되는 것을 보고 미국이 자유주의, 진보, 좌파만의 나라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는 낙태금지, 초등학교에서의 기도 올리기, 사형제도 유지, 세금 삭감, 작은 정부 구현, 차별철폐, 사회보장 축소 등을 고수하는 보수와 우파 및 공화당이 미국을 이끌어야 한다고 믿게 됐다.

커트러는 끈질긴 자유주의자에 대한 공격에도 불구하고 이책의 결론에서 “좌파는 타협 할 수 있는 매력적인 사람들이다. 협상하고 화해할 수 있다는 것이 보수주의의 강점이다”고 말했다.

시카고 선타임스의 컬럼니스트 리차드 로퍼는 커트러를 다음과 같이 평했다. “그녀는 책을 통해 보면 자유주의자다. 자유주의를 저주하는 것은 사랑하기 때문이다.”

박용배 칼럼

입력시간 2002/08/09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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