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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덕균의 개그펀치] 심형래 대통령, 장덕균 KBS 사장

초등학교 3학년인 아들 녀석은 또래 친구들과 집에 모여 그림 그리기를 배운다. 그림을 그리고 나면 거실은 그야말로 초토화된다. 다섯 명의 스케치북이며 물감, 물통, 팔레트, 크레파스 등이 휴지 뭉치와 섞여서 거실 가득히 늘어져 있게 마련이다.

미술 선생님은 한 달에 한번씩 제비 뽑기, 사다리타기 등으로 반장을 뽑아 뒷정리를 시키는 모양이다. 이번 달에는 아들 녀석이 반장이었다. 오후에 방송국에 가려고 준비를 서두르다 아들이 반장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광경을 목격했다.

10살짜리 아들놈은 한껏 으스대며 허리에 손을 척 얹는 개폼까지 연출하면서 “너는 물감 치우고, 너는 스케치북 정리해, 너는 붓하고 물통 닦고…”라고 말하면서 역할을 분담시키고 있었다. 녀석의 말에 따라 조금 쉬운 일이 맡겨질 수도 있고, 스케치북 5개를 나르는 중노동이 맡겨질 수도 있었다.

다른 녀석들은 아들놈의 입에서 떨어지는 말대로 뒷정리를 했다. 미술 수업을 하다 아들놈과 다툰 녀석이 중노동을 맡은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선생님이 그날 “한달 다 됐지. 다음 번에 반장 뽑는다”라고 말하자 아들놈이 무척이나 아쉬운 얼굴로 “제가 또 하면 안돼요”라고 말했다가 다른 놈들의 원성에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한 달의 임기가 끝나고 선생님이 다시 반장을 뽑을 때면 우리 아들은 짧았던 권력의 힘에 아쉬움을 느끼며 다시 권력을 잡는 그날을 손꼽아 기다릴 것이다.

그날 10살 먹은 놈들이 보여준 권력에의 강한 집착을 보면서 ‘저것이 과연 인간의 본능인가’하는 씁쓸한 기분을 맛보았다. 10살짜리 녀석들도 권력이 주는 쌉쌀한 맛을 이미 체득해서는 그리도 아우성을 치는데 하물며 세상물정 다 아는 어른이라고 왜 그 맛을 모르겠는가.

대선을 앞두고 후보들간의 경쟁은 이미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지만 볼수록 참 안타까움을 넘어 비애마저 느끼게 한다.

개인은 물론이고 가족과 이웃, 친지들의 사생활이 낱낱이 밝혀지면서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고 몇 십년에 걸쳐 쌓아온 경륜이 잘근잘근 난도질을 당하는 수모를 겪으면서도 “야, 나 대통령 싫다. 더럽고 치사해서 안 한다”하면서 내던지는 후보가 한명도 없으니 역시 그 자리가 좋기는 좋은 모양이다.

내 주위에서도 뒷날을 기약하는 대권 후보가 한명 등장했다. 나와 오랜 시간 호흡을 맞춰온 개그맨 심형래. 개그맨이면서 영화감독까지 해내며 ‘신지식인1호’로 선정되는 영광까지 누린 심형래가 어느날 아주 진지한 얼굴로 내게 귀뜸 해주었다. “나 10년쯤 후에 대통령 후보로 나올 거야. 아무한테도 말하지마.”

어린시절 심형래의 바보연기에 자지러지던 아이들이 그때가 되면 다 투표권이 있어서 한번 해 볼만 하다는 계산이었다. 심형래가 대통령이 되지 말라는 법도 없는 것 아닌가. 사람의 앞일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것이다.

“내가 대통령 되면 너 KBS 사장 시켜줄게.”

“정말이지? 좋아, 각서 써줘.”

심형래는 두말없이 수첩을 찢어서 “내가 대통령이 되면 장덕균을 KBS 사장 시킨다” 라는 각서와 사인을 해주었다. 그 각서는 지금도 내 지갑 깊숙한 곳에 소중히 숨겨져 있다. 장밋빛 미래에의 약속을 받은 나는 언젠가 방송국 사람들과 가진 술자리에서 이 엄청난 비밀을 발설하고 말았다.

“형래형이 나중에 대통령 되면 나한테 방송국을 맡긴다고 약속했어.”

그러자 그 자리에 모였던 사람들이 모두 코웃음을 치는 게 아닌가.

“나한테도 약속했는데.”

“그 자리는 내 거야. 손가락 걸고 약속했어.”

“웃기지마, 그건 내 거야.”

나한테만 철석같이 한 약속이 아니어서 무지하게 김이 새긴 했지만 그래도 희망을 버리지않기로 했다. 왜냐하면 나는 여러 경쟁자를 한방에 보내버릴 수 있는 결정적인 각서를 소유하고 있으므로 나중에 기득권을 주장할 수 있지않은가.

10여년의 세월이 지나서 ‘바보 영구’로 유명한 심형래가 정말 대선에 출마한다면 지금 2002년의 대선전 보다는 덜 살벌하지 않을까.

입력시간 2002/08/16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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