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호에 실려온 新북풍 어디까지?] "남북정상회담은 4억달러에 산 것"

인터뷰/ 엄호성 한나라당의원

“청와대의 4억 달러(4,900억원) 대북비밀지원 의혹은 ‘사실이 아닌 진실’로 밝혀질 수 밖에 없습니다. 한국산업은행에서 빠져나간 자금의 흐름은 현대상선의 계좌 추적이 이뤄지지 않는 한 현 정권 하에서 팩트(fact)가 밝혀지기 어려울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자금이 최종 입금된 것으로 보이는 몇몇 계좌들이 의혹 선상에 떠올라 현재 여러 루트를 동원, 이에 대한 검증작업을 간접적으로 벌이고 있습니다. 현재로선 더 이상 말씀 드리기는 곤란하군요….”

연말 대선을 앞두고 현대상선을 통한 정부의 ‘대북지원’ 의혹을 국정감사장(9월25일)에서 처음 터뜨린 엄호성 한나라당 의원은 10월 4일 “현대상선이 자금을 내부지원용으로 사용했다면 김충식 전 현대상선 사장이 엄낙용 전 한국산업은행 총재를 찾아가 ‘회사에서 사용하지 않아 이를 갚을 수 없다’고 말할 필요가 있었겠느냐”며 “4,900억원의 대출금은 김 전 사장의 동의가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이뤄진 ‘괴(怪) 대출금’”이라고 규정했다.

이번 국감에서 ‘DJ(김대중 대통령)정권을 압박하는 마지막 조타수’로 떠오른 엄 의원을 정무위 국감이 열린 국회본관 5층 소 회의실에서 만났다.

그는 현대상선이 2000년 6월5,7일 산은에 당좌대출 4,000억원을 받기 위해 제출한 대출신청서와 당좌대월약정서, 융자금 영수증 등에 김충식 전 사장의 서명이 빠져 있고 당좌대월 한도 역시 40억원으로 기재된 사실을 잇따라 폭로한 뒤여서 아직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표정이었다.

그는 ‘현대상선 대출은 한광옥 전 청와대 비서실장의 지시’라는 충격적인 발언을 국감장에서 쏟아낸 엄낙용 전 산은 총재와 같은 ‘영월 엄 씨’로 종친 모임에서 종종 만난 사이인 것으로 알려졌다. 또 경찰 정보통 출신답게 입수한 자료를 바탕으로 ‘의혹의 실체’를 논리 정연하게 제시했다.


“현 정권서 진실 밝혀지겠나”


-미국에 체류 중인 정몽헌 현대아산이사회 의장은 자금 사용처를 ‘당시 빚을 갚는데 투입했다’고 말하는데.

“당시 정몽헌 의장의 측근으로 꼽히던 김충식 전 현대상선 사장이 현대의 유동성 위기 해소나 현대의‘왕자의 난’을 대비한 정 의장의 지분 매입에 자금을 사용했다면 왜 엄낙용 산은 총재를 찾아가 ‘우리는 돈도 만져 보지 못했다. 이 돈은 정부가 갚아야 할 돈’이라며 상환에 난색을 표명했겠는가. 일반적인 상식으로 납득할 수 없는 부분이다.

특히 2000년 6월7일 4,000억원을 융자 받을 당시 당좌대월 약정서와 융자금 영수증에 김 전 사장의 자필서명도 없을 뿐 아니라 당좌대월 한도가 40억원으로 기재된 서류 등을 보면 여신규정 위반은 물론 비정상적으로 이뤄진 대출이라는 점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내부에서 사용될 자금이었다면 근거서류는 더 깔끔히 정리됐어야 하는 게 아닌가. 산은과 현대상선이 김 전사장 몰래 조작한 가짜 문서가 아닌 이상 대출 과정의 의문점은 풀리지 않는다.”


-엄 의원이 주장하는 대북지원 방법은 한나라당 김문수 의원(9월27일)과 이재오 의원(29일) 등이 제시한 내용과 달라 신뢰성이 떨어진다는 지적도 있다.

“‘대북자금 비밀 지원설’은 2000년 4월 총선 직전에 발표된 남북정상회담 합의 때부터 정가와 금융계에 회자돼왔다. 지난해 5월 한 월간지는 미국 의회조사단(CRS)자료를 인용해 대북 지원설을 보도하기도 했다. 그때 처음으로 심증을 갖게 됐다. 다만 설(說) 자체에 대한 사실규명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판단했다.

이번 국감에서 나는 이 문제를 처음으로 공식 제기(9월25일)하면서 분명히 ‘한 정보통에 따르면 이들 돈이 현대아산을 거쳐 금강산 관광사업 대가로 북한에 비밀리에 전달됐다는 의혹이 있다’며 ‘이 같은 의혹을 밝혀내기 위해 현대상선에 대한 자금흐름을 조사해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부 언론은 이와 관련, 후자보다는 전자에 무게를 실어 김문수ㆍ이재오 의원 등이 제시한 구체적 대북지원 방법 등이 서로 달라 한나라당이 ‘진실’보다는 ‘의혹게임’을 벌인다는 식으로 비난했다. 계좌추적 권이 없는 입장에서 산은 대출자금의 흐름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은 당사자들을 빼고는 정확히 알 수 없는 부분이다.

대출자금이 64개의 자기앞수표로 바뀌었고 만약 수표 뒷면에 배서가 없다면 계좌추적 역시 어려울 것으로 본다. 그러나 지금도 의혹이 가는 일부 입금 계좌들에 대한 검증작업을 벌이고 있다. 계좌추적 의지가 없는 DJ 정권 하에서는 정확한 사실 규명이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한광옥 전 청와대비서실장은 이근영 당시 산은 총재(현 금감위 위원장)가 ‘한 전 실장으로부터 전화로 대출을 지시받았다’는 엄 전 총재의 주장에 대해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일축했는데.

“박지원 청와대 비서실장이 10월1일 비서실 직원 월례조회에서 언급한 내용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박 실장은 극히 이례적으로 ‘법적 근거도 없이 계좌추적이나 장부 공개는 안 되는 일’이라고 못박았다. 청와대 비서실장의 언급이나 발언 배경이 타당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을 것이다.

특히 그 발언이후 ‘계좌추적이 가능하다’고 유권 해석을 해온 정부(재정경제부)의 입장이 돌연 ‘불가능’으로 바뀌었다. 박 실장의 경고성 메시지 때문이다. 엄낙용 전 총재가 없는 일을 있었다고 말했겠는가.”


대북 밀실거래는 용납될 수 없는 일


-‘4,900억원 지원설’이 ‘병풍(兵風)’을 덮고 민주당과 청와대, MJ(정몽준 무소속 대통령 후보)를 동시에 압박하는 ‘신(新) 북풍 공작’의 전조라는 지적에 대한 생각은.

“언론들은 이를 놓고 ‘일타삼득 (一打三得)’이라는 해석까지 한다. 하지만 일부 언론사 관계자들은 대북비밀지원 과정에 대해 누구보다 더 정확히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대북사업을 해본 사람치고 북한에 돈을 갖고 가지 않고 사업이 제대로 이뤄지기 어렵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민심은 천심이고 국민은 하늘에서 내려다 보고 있다.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의 성사는 김대중 대통령 뿐만 아니라 민족적으로도 커다란 성과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과정은 투명하게 이뤄져야 한다.

북한에 자금을 지원했다면 국민에게도 이를 떳떳하게 밝혀야 한다. 밀실 정치와 물밑거래 등은 정권이 바뀌더라도 결코 용납할 수 없는 부분이다. 결국 그 자금은 어디에서 나온 것인가. 바로 국민 호주머니에서 나온 국민의 돈이다.”


-차기정권 역시 대북사업을 끌어안고 가야 할 입장인데, 우려감은 없는가.

“부산 아시안게임 개막식 전날 이회창 후보를 모시고 선수촌을 찾았다. 북한 선수들의 숙소를 방문하고 싶었지만 북측의 사정으로 이뤄지지 못한 것이 다소 아쉽다. 결코 4,900억원 설과 연관을 지을 필요는 없다고 본다.

북측의 입장에서도 자금을 지원받는다면 더 떳떳하게 돈을 받는 것을 원할 것이라고 생각이 든다. 북측 역시 특정 정권을 봐주기 위해 뒷돈을 받는 행위는 싫을 것이다.”

장학만 기자

입력시간 2002/10/11 14:55


장학만 local@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