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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시대의 巨匠] 한국춤의 산 증인 송범

[우리시대의 巨匠] 한국춤의 산 증인 송범

"무용은 내 신앙"

“60년 무용 평생에 공연 때마다 비 안 온 적 없었는데 이번에는 하늘이 날 도와주는가 싶어.” 제자들에게 둘러싸여 송범(76ㆍ본명 송철교)이 웃는다. 비가 올 듯 말듯 하던 날씨였지만 10월 3일 오후 5시로 잡힌 공연 시간이 가까워 오자 활짝 갠다.

“맨날 이놈 저놈 욕했는데 막상 이렇게 펼쳐 놓은 걸 보니 안심이 드네.” 제자들이 모여 만든 ‘송범, 춤 60년 회고전(부제-국립무용단 창단 40주년 기념)’의 리허설 무대를 세 시간 전부터 지켜 보던 그가 말문을 열었다.

이번 무대를 앞두고 펼쳐졌던 수많은 인터뷰와 카메라 세례보다도 후배들과 함께 일 할 수 있다는 사실이 그에겐 더 반갑다.

10월 2~3일 국립극장 해오름 극장 전체는 한국 무용 현대화의 산 증인에게 바쳐졌다. 1층에는 각계에서 보내온 기념 화환이 즐비했고 2층에는 그가 평생을 바쳤던 우리 무대에 쓰였던 장비들이 총망라됐다.

요즘 컴퓨터화된 무대 장치 기술에 비춰봤을 때 그것들은 폐기 직전의 고물이나 다름 없지만 바로 그 조명 아래서 전통춤은 가닥을 잡아갔고 새롭게 태어났다. 무용학자들의 논문과 자신의 글 등을 모아 만든 기념 문집 ‘나의 춤, 나의 길’(현대미학사 刊)도 이날을 맞춰 출간됐다.


한국무용 현대화에 바친 춤 인생

그가 있기 전 한국 무용은 승무면 승무, 살풀이면 살풀이 하는 식으로 각각 별개의 작품일 뿐이었다. 토막토막 내어져 무속이나 세시풍속 행사의 부속물로 취급 받아야 했다. 촌락 공동체의 삶이었다면 그것으로 족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방인들에게 우리 춤의 아름다움을 전달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작품으로 꿰어 내는 별도의 연출 작업이 필요했고, 그 주인공이 바로 송범이다.

우리 무용사는 그의 업적을 ‘전통춤의 서양 무대화’와 ‘전통 연희의 종합’으로 정리하고 있다. 특히 국립무용단 30년사를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한국춤=송범춤’이라는 도식이 정립되던 세월로 치환된다. 그가 배출했던 후학들 중 1980년부터 10년간 국립무용단에서 활동했던 무용인들이 결성한 ‘범무회(汎舞會)’는 현대 한국무용의 나아갈 바를 여전히 모색 중이다. 다행스럽게도 그 순간들은 우리 모두가 지켜볼 수 있었다.

1986년 서울에서 열렸던 아시안 게임의 빛나는 무대 ‘지상에서 천상으로’는 바로 그의 작품이었다. 전통이 현대와 융화되는 법을 제시했다. 우리 설화 ‘선녀와 나뭇꾼’을 단일 무용 작품으로 만들었던 이 작품은 이날 국립무용단원들의 잘 훈련된 춤사위와 국립극장 스태프들의 기술력에 힘입어 한 폭의 그림과도 같은 장면 장면을 연출, 당시의 기억을 되살려 주었다.

우리 전통의 몸짓을 그가 하나의 스토리로 꿰어 낸 왕년의 명작들이 계속 뒤를 이었다. 이밖에 화려의 극을 달리는 ‘부채춤’, 흥겨운 집단무가 인상적인 ‘강강술래’ 등이 그가 만들어뒀던 안무대로 국립국악원의 흥겨운 반주 속에서 펼쳐졌다.

1984년 LA 문화예술축전에 참가해 언론 등 현지의 환호를 이끌어냈던 ‘참회’ 역시 그의 작품이다. 거대한 불상 탱화 앞에서 세속과의 연을 끊으려 고뇌하는 수도승의 몸짓에는 1951년 피난지 대구에서 극도의 궁핍을 이겨내야 했던 고난의 시간이 투영돼 있다. 이 작품은 수정과 증보를 거쳐 반세기를 뛰어 오늘의 관객들로부터 여전히 뜨거운 박수를 받고 있다.

월간 ‘춤’ 발행인이자 춤 평론가인 조동화는 송범을 가리켜 “좋든 싫든 한국무용사 그 자체”라고 말한다. 살아남는 것만으로도 축복이었던 해방 공간과 한국전쟁기에 청년기를 보내고 한국적 무용극이라는 전인미답의 장르를 탄생시켰던 그에 대한 압축적 표현이다.

한국 무용의 전설 최승희의 무대를 1942년 중학교 2학년 때 보고 감동에 빠졌던 그는 경성제대 의학부에 원서를 제출해 놓고도 시험 당일 음악 감상실에서 결심을 다졌다. 이후 무용에만 몰두해 있던 그는 해방공간과 한국전쟁이라는 혼돈기에서 무용 활동이 자유로웠던 남쪽을 택하게 된다.

마사 그레이엄, 이사도라 덩컨 등 그 이름을 귀동냥으로만 알던 현대 무용의 대가들에게 뒤지지 않겠다는 일념에 사로잡혀 거의 맹목적으로 훈련에 몰입하던 그를 두고 1세대 춤 평가 문철민이 했던 말이 있다.

“송군이 맹목적 신체 훈련을 삼가고 예술 일반에 대한 식견을 넓혀 평단의 촉망을 배반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필자뿐 만이 아니다”(경향신문 1947년 11월 23일자 문화시평). 20대에 춤에 미친 이후 발레, 인도 춤, 승무 등 장르의 동서를 가리지 않던 그를 염려해 준 평론가의 언급이 이채롭다.


우리춤의 세계화를 꿈꾼다

그러나 그에게는 무엇보다 ‘우리 것’에 대한 동경과 열망이 있었다. 그러나 답습할 수만은 없었다. 발레 등 서양 무용의 세계를 접한 그는 우리 고유의 춤이면서도 창작성이 가미된 제3의 무용을 열망하게 된다.

1968년 멕시코 올림픽 때 한국민족예술단으로 참가했던 것이 결정적 계기가 됐다. ‘사랑가’, ‘선녀춤’, ‘화관무’ 등 한국무용에서 소재를 따온 창작 무용들은 이번 공연의 직계 조상인 셈이다. 세계인이 함께 즐길 수 있는 고유한 우리 문화를 탐색하는 여정은 그렇게 시작됐다.

이번 회고전에 나란히 선보였던 ‘가사호접’, ‘참회’ 등은 우리의 민속 무용에 극적 구조를 도입, 하나의 구조물로 이어진 송범식 무용극의 대표작이다.

‘가사호접’은 그의 창작 무용 제 1호이다. 그것이 있기 전 한국 전통 무용의 백미라 일컬어지는 승무는 기껏해야 광대나 기생이 선사하는 여흥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시인 정지용에 의해 붙여진 이 춤은 송범을 만나 여성의 춤 승무를 불교적 구도의 수준으로 격상시켰다.

승무(僧舞)는 원래 여성적인 춤이었다. 이후 그것은 1980년대 민주화 운동의 현장에서 불처럼 타올랐던 이애주 서울대 체육학과 교수(현재 인간문화재)의 승무(乘舞)와 힘찬 남성적 춤사위를 강조하는 송범류의 대승무(大僧舞)로 나뉘어 한국 무용의 주요 장르로 발전해 오고 있다.

간혹 평론가들과 마찰이 있을 때마다 “싫으면 구경하지마”라며 자기 주장을 밀고 나갔던 패기의 시절도 있었다. 그것은 자기 작품에 대한 자존심의 표현이었다. 이번의 경우, 바로 그 자존심으로 그는 공연이 있기 석달 전부터 옥수동 자택에서 국립극장으로 매일 출근하다시피 했다. 자신의 이름을 걸고 만들어지는 무대를 덥석 받아 먹을 수 만은 없다는 오기였다.

이번 공연을 위해 그는 오전 10시~오후 2시까지 국립극장에 머물며 연습을 지켜 보고 새까만 후배에게 지시를 내렸다. 내친 김에 9월에는 중앙대 국악 콩쿠르 등 학교 콩쿠르에도 심사 위원으로 참가했다.

또 매주 토요일마다 제자들이 운영하는 춤 아카데미에 나가 손녀뻘 문하생들의 춤을 봐 주는 일도 빠뜨리지 않았다.

하지만 나이는 못 속인다. 2001년 전 국립발레단장 임성남이 세상을 뜨고 지난 7월에는 한국무용의 원로 최현 등 동료와 후배가 먼저 세상을 뜨니 착잡한 심정에 빠져든다. 특히 국립무용단장 정년 퇴임 이후 1년 동안은 남산 국립극장에 발도 디디지 않던 일은 섭섭함의 또 다른 표현이었다. 세월의 흔적이 그뿐이랴.

나이 일흔이 넘으니 몸이 삐걱대기 시작해 디스크와 심장 등에 다섯 번 칼을 대야 했다. 언제나 일감이 밀려 왔던 국립극장 시절이 끝나자 그 동안 참았던 이상을 몸이 한꺼번에 호소해 온 것이다. 그는 띄엄띄엄 “11년만에 모처럼 큰 일을 맞게 되니 몰려드는 인터뷰로 피곤한 상태”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에게 꿈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다음 작품을 이야기했다. 그는 “석가모니의 일생을 무용극으로 만들고 싶다”며 “40대부터 꿈이었다”고 말했다. 보리수 아래 득도의 순간은 물론 이차돈의 순교까지 곁들여 아주 한국적인 불교 이야기가 될 것이라 한다.

인도가 배경이 되는 대목에서는 무대 전체를 인도적 분위기로, 한국 대목에서는 현대 한국 무용으로 해 전혀 다른 두 개의 분위기를 합쳐 하나의 무용극으로 만들겠다는 꿈은 언제쯤 이뤄질까.

불교적 색채가 짙은 작품들을 만들어 왔지만 그는 사실 종교가 없다. 그는 이 대목에서 “내 신앙은 무용”이라고 못박았다. 불교란 우리 민족 문화의 정수가 집약된 상징이다.

무용은 곧 그의 자존심, 똑바로 서서 날아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그는 “큰 수술을 다섯번 치러 몸이 약해졌다”고 말했다. 밖에서 포즈를 취해줄 것을 요청하는 사진 기자에게 “지금 다리에 힘을 잔뜩 주고 있다”며 빨리 촬영해 줄 것을 바랬다.

그러나 방송사 카메라 등의 촬영이 끝나자마자 그의 발걸음은 후배들이 한창 리허설중인 극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장병욱 차장 aje@hk.co.kr

입력시간 2002/10/14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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