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예계 비리는 '뿌리깊은 나무'

로비 부추기는 방송·연예 시스템, 성상납 의혹 남긴채 수사 마무리

시계 바늘을 12년전으로 돌려보자. 한국일보 1990년 1월 26일자에는 이런 연예계 비리 수사관련 기사가 실렸다.

"방송가 비리를 수사중인 서울지검 민생특수부는 9월 25일 가수들로부터 방송출연비 명목으로 거액을 상납받은 MBC ‘올스타쇼’ 담당PD 신모씨 등 PD 6명을 배임수재혐의로 구속하고 금품수수 액수가 적은 KBS PD 정모씨 등 PD 10명을 불구속 입건하는 한편 달아난 MBC ‘싱글벙글쇼’ PD 강모씨 등 2명을 지명수배했다.

검찰은 이들에게 돈을 준 가수 이모양의 매니저 윤모씨와 양모양의 매니저 변모씨 등을 불구속 입건했다."

이번엔 현재. 10월 9일자 한국일보는 이렇게 보도했다. “서울지검 강력부는 8일 방송사 PD 등 39명을 적발해 MBC 김모PD 등 13명을 구속기소하고 12명을 불구속 기소했으며 해외로 달아난 SM 엔터테인먼트의 주주 이수만씨와 개그맨 서세원씨 등 11명을 지명수배함으로써 방송, 연예계 뿐만 아니라 일반인의 관심을 지대한 관심을 모았던 방송, 연예계 비리 수사를 사실상 마무리했다.”


보다 정교하고 은밀해진 커넥션

12년전 상황과 별반 다를 바가 거의 없다. 다른 것이 있다면 연예기획사가 방송계 인사들에게 건넨 PR비(음반 홍보비) 액수 규모와 구속기소되거나 지명수배된 사람들의 숫자가 커졌고 거래 방법이 보다 정교하고 은밀해졌다는 것뿐이다.

특히 이번 수사에서 관심을 끌었던 대종상 수상로비, 폭력조직 자금의 연예 기획사 유입, 주식로비, 성상납 등 그동안 제기됐던 4대 의혹에 대해선 검찰은 아무 것도 밝히지 못한 채 수사 결과 드러난 것이 없다는 발표로 사건을 종결했다.

이번 방송 연예계 비리에 대한 검찰의 수사는 90년, 95년에 이어 세 번째다. 일부 언론에선 검찰이 대형 연예기획사 대주주의 회사자금 횡령 등 구조적 비리를 잡아내고 방송사 PD가 돈과 향응을 제공받고 특정 기획사 소속 가수들을 자신이 연출하는 방송 프로그램에 자주 출연시켜 주는 PR비가 성행하고 있음을 확인하는 성과를 올렸다고 평가를 내렸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이전 두 차례 검찰 수사에서도 이같은 사실은 확인됐다.

만약 현재 방송, 연예계 시스템과 관행, 그리고 스타 시스템이 개선되지 않는 한 5년 뒤에 있을 지도 모를 방송, 연예계 검찰수사 역시 2002년 결과와 차이가 없을 것이다.

아니 돈을 받고 음반과 가수를 소개하는 한국판 페이올라(Payola, 1960년대 미국 방송사DJ들이 특정 음반사로부터 돈을 받고 음악을 소개한 것을 지칭하는 말)인 자판기 PD와 방송 출연이나 배역을 따내기 위해 몸까지 상납하는 한국판 캐스팅 카우치(Casting Coutch, 할리우드나 미국 방송사 주변에서 PD나 영화 감독들의 쇼파에서 성상납을 하고 배역이나 방송 출연을 하는 사람을 의미하는 말)만을 양산하고, 더욱 더 노련하고 은밀하게 PR비를 건네는 PR 매니저들의 기법만이 발달할 것이다.

90년, 95년, 2002년 방송 연예계 비리의 구조나 행태가 너무나 흡사하고 문제의 본질은 같기 때문이다.

신인 가수와 연기자들의 홍보와 상품성을 높이려는 통로가 KBS, MBC, SBS 등 지상파 방송 3사 4개 채널에 집중된 있지만 방송 출연을 하려는 사람이 너무 많다. 수많은 연예인들의 방송 출연이 성사 여부에 따라 음반 판매의 성패가 결정되고 무명에서 스타로의 비상 여부가 판가름 나는 절박한 상황이다. 이 때문에 방송 출연을 위한 경쟁은 전쟁을 방불케하는 죽기 살기식으로 전개되고 있다.


생사여탈권 쥔 방송 PD들

하지만 연예인의 생사 여탈권을 쥐고 있는 방송사 PD들의 연예인의 방송섭외 기준이나 절차, 제도 등이 투명하지 않고 지극히 자의적이다.

한국연예제작자협회에 따르면 1년 동안 쏟아져 나오는 가요 음반은 1,200여장에 이르지만 방송에 소개된 것은 극소수이며 발매 즉시 세상의 햇빛조차 보지 못하고 창고로 들어가는 음반이 더 많다. 수많은 연기자들이 있지만 드라마나 프로그램에 캐스팅되는 경우 역시 매우 적은 수다.

이같은 상황은 필연적으로 뇌물, 향응 등 비공식적 거래의 가능성을 높여줄 수 밖에 없다. 또한 폭넓은 인맥과 자본, 다수의 스타를 보유한 대형 기획사의 소속 연예인의 방송 출연 독점 현상도 불을 보듯 뻔하게 일어난다.

한국연예인노조가 실시한 연예인 실태 조사에서 1년 동안 탤런트, 개그맨중 25%가 방송 출연을 한번도 못해 생존의 위협을 받는다는 절박한 결과가 나왔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한해에 한 가수가 KBS 한 방송사에만 무려 326회의 출연 기록(국회 국감자료)을 세우는 웃지 못할 풍경이 연출되고 있다.

이같은 극단적인 상황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MBC와 SBS도 마찬가지다. 방송 출연의 기준이나 투명한 제도 마련만이 현재의 거의 반복돼서 일어나는 방송, 연예계 비리의 사슬을 끊을 수 있다.

영국BBC 방송은 새로운 드라마를 제작할 때 인터넷에 드라마의 배역 오디션을 공고한 뒤 무명, 신인에서 스타에 이르기까지 오디션에 참가한 지원자를 대상으로 공정한 심사를 거쳐 캐스팅을 하고 이 결과를 인터넷에 공개한다.

캐스팅 절차와 제도를 투명하게 해 배역 캐스팅을 둘러싸고 일어날 수 있는 비리나 잡음을 미연에 방지한 것이다. 미국의 음악 케이블 방송인 MTV의 경우, TAR(Talent & Artist Relations)라는 캐스팅 전문부서를 두고 출연 가수나 횟수 등에 대한 기준을 객관화 시켜 가수들의 방송출연에 대한 공정성을 기하고 있다.

일본의 경우 새로운 음반을 발표하는 가수는 방송사 PD들 앞에서 먼저 콘서트를 한 뒤 방송 출연이 결정되는 것이 관행으로 자리 잡았다.

이같은 제도와 절차가 마련된다면 특정 연예 기획사와 방송사 PD간의 은밀하고 부적절한 연결 고리를 끊으며 연예인의 인적 자원을 풍부하게 하고 대중문화의 질도 한 단계 상승시킬 수 있을 것이다.


스타위주의 프로그램제작관행 탈피해야

또한 문제가 되는 것은 스타 출연=시청률 담보라는 맹신에 사로 잡혀 특정 스타 위주로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방송 관행이다. 현재 획일화 한 대중문화 현상과 점차 완성도가 떨어지는 방송 프로그램의 원인중의 하나가 바로 특정 스타 위주의 방송이다.

일부 스타를 기용해 시청률을 올리려는 안이한 방송 제작진의 태도와 열악한 방송 환경은 다양한 연예인 인적 자원 개발을 차단하고 특정 스타에 의존도만 높이는 악순환을 반복시킨다. 또한 스타를 다수 보유한 특정 연예사의 배만 불려주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다수의 스타를 보유한 연예 기획사는 자사 소속의 스타를 출연시키는 조건으로 신인이나 무명을 끼워팔기식으로 방송에 출연시켜 특정사의 연예인만 방송 출연할 기회를 얻기 때문이다.

이는 결과적으로 실력과 재능이 많은 연예인 지망생들은 방송사 근처에도 가보지 못하고 좌절하는 부정적 역기능으로 이어진다.

연예계에선 이번 검찰 수사를 가수나 연기자의 활동 무대와 홍보 채널이 지상파 TV에 집중된 것을 탈피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방송출연으로 대박을 기대하는 한탕주의에서 벗어나 라이브 무대나 연극 무대 등 연예인들의 활동 공간을 넓히면서 다양한 채널을 통해 대중성을 확보하고 가창력과 연기력 등 진정 연예인에게 필요한 능력을 키워야 한다.

대형 기획사의 홍보와 로비, 그리고 이미지 조작의 승리로 스타가 될 수 있지만 국어 책을 읽는 것이 차라리 좋을 연기력과 나오는 노래에 입 맞추기만을 잘 하는 붕어형 가수의 가창력으로는 한계가 있다.

이같은 투명한 절차와 제도 마련이 5년 정도의 주기로 터져 나오고 있는 방송 연예계 비리 수사가 5년 뒤인 2007년에 발생하는 것은 예방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배국남 대중문화평론가

입력시간 2002/10/18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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