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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의 눈] 성혜림의 북한

[데스크의 눈] 성혜림의 북한

사람은 죽는다. 누구도 죽음을 피해 갈 수는 없다. 하지만 죽을 때의 모습은 사람마다 크게 다르다. 최근 폐암으로 사망한 코미디언 이주일씨의 경우 죽음의 그림자가 시시각각으로 닥쳐오는 상황에서도 자신의 삶을 한국일보에 남기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었으나 ‘영원한(?) 대통령’인 존 F 케네디는 한 정신병자의 총탄에 힘없이 쓰러졌다.

유신 독재자 박정희 전 대통령은 최측근의 총탄에 비명횡사했다. 지켜보는 사람들의 관심도도 서로 달라 케네디는 만인의 가슴속에, 박정희는 일부 사람에게 지워지지 않은 옹근 흔적을 남겼고, 이주일은 임종까지 숱한 화제를 낳았다.

요즘 같은 세상에 TV 화면으로든, 사진으로든 얼굴 한번 제대로 보지 못한 사람의 죽음에 관심을 갖는다는 건 윤똑똑이나 하는 짓이지만, 성혜림의 경우는 좀 특별하다. 그녀는 김정일 북한국방위원장의 전처이고, 북한 ‘로열 패밀리’의 핵이자 후계자로 지목되고 있는 김정남(31)의 생모다.

우리에겐 얼굴 한번 제대로 알려진 바 없는 그녀가 지난 7월께 모스크바 한 아파트에서 쓸쓸히 눈을 감았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북한으로부터 버림받고 제3국에서 병마에 시달리다 끝내 생을 마감했다는 것은 어쩐지 예감이 좋지 않다.

‘아들 김정남이 권력을 승계하면’이라는 전제가 허방을 짚는 일인지 모르지만 조선조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가 생각나기도 한다.

폐비 윤씨는 성종때 궁녀로 들어왔다가 뛰어난 미모로 중전 자리에 올랐고 첫 왕자 융(나중에 연산군)을 낳았으나 끝내 궁궐에서 쫓겨났다. 성혜림은 1960년대 후반 결혼 2년 만에 남편과 헤어지고 김정일과 살다가 첫 아들 정남을 낳았으나 80년대에 북한에서 쫓겨났다.

유럽으로 망명한 언니 혜랑씨는 2년 전에 낸 자서전 ‘등나무집’에서 김정일과 성혜림의 관계에 대해 “김 위원장에게 친구 형수인 혜림의 인상은 모성의 향수 같은 것을 불러 일으켰을지 모른다. 혜림은 엄마없이 자란 그(김정일)의 어린 시절과 아버지의 세도 밑에서도 고독하게 헤매던 그의 청춘을 이해해 주었다”고 썼다.

그러나 아들 김정남도 권력의 그늘 속에서 엄마 없이 사춘기를 보내야 했다.

성혜림이 우리의 관심을 끈 것은 96년 2월 언니 혜랑씨 일행과 함께 서방으로 망명했다는 미확인 보도가 나오면서부터다.

당시 모스크바 특파원이었던 기자는 성혜림의 행방을 쫓아 그녀의 아파트, 심장전문병원, 주북한대사관 등을 헤맸으나 ‘살고 있었다’는 흔적만 어슴프레 찾았을 뿐이다. 지금에야 하는 소리지만 모스크바의 길거리에서 그녀를 만난들 “내가 성혜림”이라고 말하지 않는 한 무슨 수로 그녀를 알아보겠는가? 그럼에도 한달 가까이 찾아 다녔으니 딱하기도 했다.

그녀의 당시 행적은 여태껏 베일에 싸여 있었는데, 본인이 죽었으니 또 하나의 미스터리로 남을 수 밖에 없다. 다행히 혜랑씨는 프랑스에 정착했고, 조카 이남옥씨는 다른 유럽국가로 가 서방언론과 인터뷰도 하고 자서전을 쓰기도 했다.

성혜림 미스터리는 결국 북한 로열 패밀리의 미스터리이기도 하다. 김정일이 북한을 방문한 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의 숙소에 어느날 밤 불쑥 나타나는 것이나, 김정남이 갑자기 일본에서 ‘제3의 인물’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나 모두 다 미스터리한 행적이다.

그 뿐인가. 10월14일 끝난 부산아시안게임에 어여쁜 북한 여성들이 그 유명한 만경봉호를 타고 남녘으로 내려와 한반도에 ‘북녀(北女) 신드롬’을 일으키더니 그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북핵 쇼크’를 안겨주었다.

그 동안 핵개발 자체를 부인했던 북한이 미국의 대북 특사 제임스 켈리 국무부 차관보와 만난 자리에서 ‘핵개발 계획’ 자체를 시인했다는 소식은 우리를 헷갈리게 하기에 충분하다. 처마 밑에 붙은 반공방첩(反共防諜) 표어를 보고 자란 세대는 더욱 그러하다.

그들은 DJ(김대중)의 대북 햇볕정책에 조마조마해 하다 2000년 6월 김정일과 손을 잡는 장면에 이르러서는 심리적 혼돈 상태에 빠졌다. 그리고 서해교전과 화해 분위기가 갈마드는 가운데 DJ 정권 막바지에 화려하게 찾아온 부산발(發) 해빙무드에 마음을 턱 놓고 있다가 ‘핵폭탄(?)’으로 뒤통수를 맞은 격이 됐다.

북한 핵문제에 대한 진실은 있다고 믿는다. 미국이나 북한이나 자국 이익을 위해 행동하는 것은 당연하다. 문제는 그 진실을 전하는 우리의 태도에 있지 않나 싶다. 94년, 98년에 이어 또다시 찾아온 북한 핵문제에 대해 모두가 ‘뭐가 뭔지 모르겠다’고 한다. 핵문제는 얼굴도 모르는 성혜림의 행적과는 다르다. 북한 핵이 미스터리로 남을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다.

이진희 부장 jinhlee@hk.co.kr

입력시간 2002/10/29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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