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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미 핵카드 게임, 한반도 위기 오나

북·미 핵카드 게임, 한반도 위기 오나

北 핵개발 시인에 美 제네바 기본합의 파기설로 고강도 압박

북한이 핵 개발 프로그램을 가동하고 있다는 사실이 공개된 후 한반도에 위기의 먹구름이 짙어지고 있다.

핵 프로그램이 공개됐던 10월 17일 미국과 한국 정부가 평화적 해결 원칙을 밝히고, 핵 무기를 제조할 만큼 북한의 개발이 진척되지 않았다는 정보가 부각하면서 다소나마 안도의 숨을 내쉴 수 있었지만 20일 미 행정부가 1994년 제네바 기본 합의 폐기 검토 방침을 검토하는 분위기로 급작스레 전환하면서 위기의 그림자는 더욱 짙은 빛깔로 변모했다.

미국 뉴욕타임스 등 주요 외국언론은 강석주 북한 외무성 제1부상의 제네바 합의 폐기 불사 발언에 맞대응 해 미국이 1994년 북미 제네바 기본 합의를 폐기하고 핵 프로그램 폐기 시까지 진검 승부를 펼칠 것이라고 긴급 보도했다. 제네바 합의를 무효로 간주한다는 것은 미국이 북한 문제를 원점에서 재검토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로 인한 격랑의 수위는 쉽사리 가늠하기 어렵다.

미국 행정부의 한 관리는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이라크 전쟁 이외에 또 다른 위기를 원하지 않는다”면서 “하지만 미 행정부 분위기는 작은 불똥이라도 튀면 금새 불이 붙을 수 있다“고 전했다. 자칫 북미 양측이 상대방을 향해 정면 돌진했던 1993~1994년 핵 위기가 재현될 지 모른다는 우려가 나올 법 한 상황이다.


미 “양보없다” 단호한 의지

이러한 우려는 미국의 제네바 합의 파기는 현 단계에서 미국이 내놓을 수 있는 최대 카드 라는 때문이다. 제네바 기본합의를 파기로 간주할 경우 미국은 기본합의에 근거해 매년 진행해오던 중유 50만톤 대북 지원을 중단하고, 한반도 에너지 개발(KEDO)을 통한 북한 경수로 건설 사업도 멈춰 세울 것으로 예상된다. 물론 미국은 이 같은 조처에 앞서 한국과 일본, 유럽연합(EU)을 설득하는 정지 작업을 진행할 것이다.

그러나 기본 합의 파기의 가장 큰 파장은 미국이 북한과 자신을 연결하는 유일한 외교적 끈을 끊어버린다는 점이다. 기본 합의 파기이후에는 완전 고립된 북한에 무제한의 압박을 가하는 전략이 뒤따를 수 밖에 없고, 이 과정에서 완급 조절은 기대하기 어려울 듯 하다.

핵 프로그램 폐기를 평화적으로 추진하겠다던 미국이 평화적 해결이 물 건너갔을 때 사용할 것으로 보이던 제네바 합의 파기 카드를 초반에 꺼내든 것은 북한에 어떠한 양보도 할 수 없다는 단호한 경고로 해석된다.

제네바 기본 합의 파기 방침을 흘리고 있는 미 행정부가 당분간 이를 공식 천명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뉴욕타임스는 “미 행정부는 한국 일본 등 동맹국들과의 관계를 위해 기본합의 파기 입장을 공표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보도했다.

대화를 통한 해결을 주장하는 한국과 대북수교교섭 지속을 원하는 일본 정부의 입장을 감안, 미국이 어느 정도 완급을 저울질 할 것이라는 얘기이다. 뉴욕타임스 보도후 한국 정부가 “미국이 파기여부에 대한 결정을 내린 적이 없다”며 서둘러 진화 나선 데서도 이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당분간 속내를 감출 미국은 고강도 대북 압박을 시도할 것으로 예상된다. 18일부터 21일까지 중국, 한국, 일본과 1차 실무조율을 끝낸 미국은 25일 미ㆍ중 정상회담, 26일 한ㆍ미ㆍ일 3국 정상회담을 통해 북한을 더욱 옥죌 것으로 예상된다. 인도적 지원을 제외한 북한의 모든 외부 지원을 차단하는 것이 현재 미국의 단기적인 목표이기 때문이다.

폴 월포위츠 미 국방부 부장관은 “북한은 다른 나라의 도움을 필사적으로 필요로 한다”면서 “따라서 미국은 이라크에 대해서 행사할 수 없는 (전쟁 등의) 지렛대를 북한에 대해 갖고 있다”고 공언했다.


대북 경제제재 중국동참 요청

특히 미국이 중국의 협조를 얻는데 큰 공을 들이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18일 존 볼튼 미 국무 차관과 제임스 켈리 미 국무 차관보의 중국 방문을 통해 미국은 대북 경제제재에 중국이 적극 동참해줄 것을 요청한 것으로 전해졌다.

매년 원유와 식량을 북한에 무상 지원해온 중국이 압박 대열에 참여할 경우 미국의 북한 압박작전은 북한 체제를 충분히 위협할 수준으로까지 진행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못하다면 1993년 핵 위기 당시처럼 북한은 중국의 후견 하에 그럭저럭 체제를 유지하면서 벼랑 끝 전술을 펼 가능성이 높아진다.

따라서 미국 텍사스 크로포드에 있는 부시 대통령 소유의 목장에서 진행될 미ㆍ중 정상회담은 대북 압박의 수위가 결정되는 1차 관문이 될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관측통들은 중국이 미측의 요청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을 공산이 클 것으로 점치고 있다.

하지만 중국의 협조보다 미국의 대북 압박에 심대한 영향을 미칠 변수는 동맹국인 한국과 일본 정부의 입장일 것이다. 한미간의 입장차이는 중국 방문을 마치고 서울에 도착한 제임스 켈리 차관보의 기자 회견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켈리 차관보는 북한이 핵 개발을 시인한 것은 타협을 위한 조처로 보는가 라는 질문을 받고 서슴없이 “동의하지 않는다”고 잘라 말했다. 핵 개발 프로그램에 대한 북한의 ‘공세적 시인’을 대화 의지로 해석하고 있는 한국 정부와는 전혀 다른 태도다.

이런 입장은 26일 멕시코 로스 카보스에서 열린 3국 정상회담에서 재연될 가능성이 높다. 대북 포용정책 지속이라는 큰 틀 속에서 대화를 지속해야 한다는 김대중 대통령의 입장은 핵 프로그램 폐기 전까지 압박을 계속해야 한다는 미국의 입장과 충돌할 가능성이 높다.

최악의 경우 김정일 국방위원장에 대해 부시 대통령이 회의감이 표출했던 지난해 3월의 한미정상회담과 같은 상황이 되풀이 될 개연성도 배제할 수 있다.

김 대통령에게 위안이 되는 점은 3국 정상회담에서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의 지원 사격을 받을 수 있다는 대목이다. 정치적 위험을 무릎 쓴 채 9월 17일 방북했던 고이즈미 총리는 북일 국교정상화 교섭 재개를 위해서라도 미국의 고강도 압박 일변도 정책에 선뜻 동의할 수 없다. 이런 맥락에서 다나카 히토시 일본 외무성 국장이 21일 서울을 급히 찾아 양국간 입장을 조율, 한일 공동작전을 예고했다.

부시 대통령의 행보를 제한할 또 다른 변수는 미국 내에도 있다. 북한 핵 프로그램이 공개되자 미국 내에서는 북한과 이라크가 무엇이 다른가 하는 논쟁이 일고 있다. 핵개발을 공개적으로 시인한 북한이 이라크 보다 더 ‘불량’ 한데도 유독 이라크에만 총구를 겨누고 있는가 하는 비판이다.

북한의 시인을 듣고도 미 의회 지도자들에게 알리지 않은 미 행정부의 처사가 이라크 전쟁에만 몰두하기 위한 정략에 기인했다는 비판이 미 의회에서 거세지고 있다. 결국 부시 대통령으로서는 우방국과의 갈등을 감수하면서까지 대북 강경 외교로 치달을 경우 자가당착적인 내우외환을 맞을 수 있는 것이다.

이 같은 배경에서 조엘 위트 미 국제 전략 문제 연구센터(CSIS) 선임연구원은 미국이 취할 가장 유력한 대북 시나리오는 대북 선제 공격을 배제한 가운데 대북지원을 중단하는 한편 대화를 진행하는 것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한미일 ‘불똥’, 외교적 조율로 분주

미국의 행보에 만만치 않은 도전이 도사리고 있는 가운데 북한의 빅딜 구상이 점차 가시화하고 있다. 일본 교도 통신은 북한이 제임스 켈리 미 특사에게 미국이 북한을 선제공격하지 않는 등의 3개 조건을 수락한다면 핵 개발 프로그램을 포기할 것임을 제의했다고 전했다.

북미 평화협정 체결, 북한 경제에 대한 제재 해제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이는 북한 경제체제 용인 등도 조건에 포함됐다. 핵 프로그램 공개 카드를 미국이 김정일 체제를 용인하는 계기로 활용하겠다는 것이 북한의 구상인 것이다.

북한은 또 핵 프로그램 폐기 문제와 함께 영변 시설 등 대한 핵 사찰, 미사일 수출 및 개발, 재래식 무기를 함께 해결하는 일괄 타결방안까지도 제시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현재로서는 미국이 제네바 기본합의 준수를 내팽개친 ‘뻔뻔스런’ 북한이 기본합의 정신을 원상회복 시키기 전에는 전혀 대꾸조차 않을 태세이지만, 향후 상황전개에 따라서는 일괄 타결의 실마리가 마련될 틈도 생길 것이다. 한국정부는 이러한 틈을 최대한 벌이는데 외교적 노력을 경주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또한 미국의 중간 선거 결과 등은 향후 부시의 대북정책에 결정적 영향을 미칠 변수로 꼽힌다.

한편 핵 위기의 재연 가능성을 상정해야 하는 한국 정부로서는 1993년부터 1년 7개월간 지속됐던 핵위기 악몽이 재연되지 않도록 해야 하는 외교적 과제를 지고 있다.

당시 클린턴 행정부는 모의전쟁 게임을 진행한 뒤 한반도 사태를 전쟁 일보 직전까지 밀고 갔지만 한국정부는 이를 까맣게 몰랐었다. 4,000만 우리 국민의 생사가 걸린 우리의 문제에서 우리 정부는 미국으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했다. 미국이 대북 압박시 동맹국인 우리의 입장이 충분히 반영하도록 주도 면밀한 외교적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목소리는 점점 높아질 것이다.

이영섭 기자 younglee@hk.co.kr

입력시간 2002/10/29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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