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러, 강건너 불 아니다] 테러 안전지대가 없다

가까이 다가온 공포의 그림자, 국내 여행엽계에도 찬바람

“우리 여행객들이 많이 찾는 발리에서 폭탄이 터져 수백명이 죽어나가는 걸 보니 이제껏 남의 일로만 여겨졌던 테러 공포가 우리 발 밑에까지 스며들어온 기분입니다.”(ㅇ여행사 가이드)

“엊그제 발리를 갔다왔는데, 사고 소식을 듣는 순간 아찔했어요. 지금까지 우리는 북한이 사고를 안 치면 어딜 가도 큰 위험이 없다고 여겨왔잖아요? 그런데 이제는 우리와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 저지른 테러로 목숨을 잃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끔찍해요.”(회사원 ㅎ씨)

세계적인 휴양지 인도네시아 발리 섬의 외국인 전용 나이트클럽 ‘사리클럽’을 폐허로 만든 자살 폭탄 테러사건은 테러리즘이 이젠 우리에게도 강 건너 불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우리가 그 동안 TV 방송이나 영화를 통해 가졌던 테러 이미지는 주로 정정이 불안한 중동이나 러시아, 아프리카를 배경으로 한 것이거나 아웅산 폭발사건과 대한항공(KAL) 폭파사건과 같은 북한 관련 참사, 그리고 필리핀 오지 등에서 수 차례 당한 인질 사건 정도다.

그러나 사리 클럽 사건은 테러라는 괴물이 아주 먼 나라에 살고 있는 게 아니라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곳에, 또 우리 가까이에 다가와 있음을 실감하게 만들었다. 실제로 이번 사건에서 한국인 자매가 희생됐다.

발리는 우리에게 제주도에 못지 않게 친숙한 곳이다. 우리나라 젊은 여성들이 가장 가고 싶은 신혼여행지이고, 여름 휴가철이나 가을ㆍ겨울 성수기에 수십만 명의 한국인들이 발리를 찾는 다. 발리를 선호하는 이유는 시설이 좋고 안전하기 때문. ㈜교원여행의 여행사업부 여목윤씨는 “최근의 여행 코드는‘럭셔리’다.

발리는 호텔이나 풀장 등 부대시설이 최고급이기 때문에 여성고객에게 인기가 높다”면서 “인도네시아 본토와는 달리 안전한 곳이었다”고 말했다. 그런 곳에 외국인 관광객을 겨냥한 폭탄테러가 발생했다는 것은 우리 관광객들의 숙소나 휴식처, 가는 길목도 더 이상 안전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안겨준다.


얼굴없는 테러

더욱 공포스러운 것은 이번 사건은 물론 관광객들을 위협하는 상대의 얼굴도 모른다는 점이다. 얼굴 없는 테러범의 존재나 사건은 그 불확실성 때문에 심리적 압박감이 크다.

최근 미국에서 잇따라 발생한 ‘스나이퍼 테러’(저격범 총격)는 워싱턴 DC 일부 지역에서 발생하고 있지만 미국 전체가 전전긍긍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미국인들은 나라 밖의 대형테러(43%)보다 가까이에 있는 ‘얼굴 없는’ 스나이퍼에 대해 더 위협을 느끼고(47%)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사리클럽 사건도 우리에겐 ‘얼굴 없는’ 스나이퍼 테러나 다름없다. 이번 사건은 아프가니스탄을 거점으로 암약하는 테러조직 ‘알 카에다’와 인도네시아내 이슬람 과격세력의 소행으로 추정되고 있지만, 그들이 한국인들과는 아무런 원한 관계가 없다. 워싱턴에서 스나이퍼의 총격에 사망한 희생자가 스나이퍼와 별다른 인과관계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스나이퍼 희생자가 여느 때처럼 쇼핑을 마치고 나오다 총에 맞은 것처럼 그저 일상의 격무에서 잠시 벗어나 연인 또는 가족, 친구와 소중한 휴가를 보내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테러범들의 공격을 받는다면 심리적으로 위축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얼굴을 숨긴 테러리스트들이 목표물을 적대관계인 서방진영의 대사관이나 군기지 등 정치적 상징물에서 생활 주변의 장소로 바꿔 피부로 느끼는 테러공포는 더 강해졌다.


여행 취소 및 변경 잇따라

테러가 이제 강건너 불이 아니라는 명제는 여행 취소와 변경이라는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대한항공 전세기로 여행객을 발리로 실어 날랐던 하나투어의 김석헌 동남아사업부 마케팀장은 “발리 사건 후 14일 하루 접수된 예약 취소건수만도 1,000여건에 이른다”며 “11월 17일까지 예약된 발리행 고객 2,000여명 중 70%는 취소했다”고 밝혔다.

㈜교원여행의 여목윤씨도 “12월까지 예약 받은 발리 여행 고객의 90%가 취소하고 있다”며 “100% 취소할 것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대한항공도 사태의 추이를 지켜본 후, 12월 경에야 이 지역 전세기 직항운항을 재개할 계획이다.

심리적으로 테러위협을 느끼는 여행객들은 여행 목적지를 국내로 바꾸고 있다. 11월 3일 결혼식을 올린 뒤 발리로 신혼여행을 떠나기로 했던 백현주(28세ㆍ학원강사ㆍ서울 노원구 상계동)씨는 “이국적인 정취를 물씬 풍기는 발리나 다른 동남아 지역을 가고 싶었지만, 폭탄테러 소식으로 주변 어른들이 걱정하기 때문에 가장 안전한 제주도로 바꿨다”고 말했다.

현재로서는 가장 우려되는 것이 역시 추가테러다. 동남아 일대 휴양지에서 제2의 사리 클럽 사건이 발생할 경우 우리가 느끼는 테러공포는 기하급수적으로 더욱 커질 것이다.

발리 사건을 통해 ‘테러와의 전쟁’이 결코 미국만의 문제가 아님이 분명해졌다. 현대문명 속에 병균처럼 스며든 국제 테러리즘이 계속 존재하는 한 어느 누구도 테러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전직 미 연방수사국(FBI) 요원 매튜 레빗은 “발리 사건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음주와 춤과 같은 신성 모독적인 형이하학적 문화에 대한 공격”이라며 “테러 조직은 과거에 가졌던 민족해방과 같은 정치적 의도보다 사회문화적 기반 파괴와 공포감 조성에 더욱 흥미를 갖고 있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테러범들이 상대적으로 경비가 허술한 서방의 문화, 종교, 혹은 권력을 상징하는 장소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는 징후는 이미 여러 차례 감지됐으며, 이스라엘에서는 이미 일반 주택, 결혼식장, 식당, 커피숍 등을 가리지 않고 테러가 발생하고 있다.


한국인 희생 적은 것은 그나마 다행

이번 사건에서 그나마 한국인의 희생이 적은 것은 특유의 패키지 여행 덕분이라고 한다. 사건이 난 사리클럽이 위치한 굿타 해변가엔 싼 배낭여행을 즐기는 서방 여행객들이 주로 찾고 패키지 관광을 즐기는 한국인, 일본인 등은 호화 시설을 갖춘 누사 두아 해변에 몰리기 때문이다.

테러 사건 전날 비행기를 타려다 만 회사원 한모씨는 “아마 비행기를 탔으면 사건 당시에 현장 부근에 있었을 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굿타 해변가에 있는 ‘하드락 카페’는 하드록 을 좋아하는 록매니아들이 몰리는 곳이어서 그날 밤 그 곳에 갈 계획을 갖고 있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하드락 카페는 사건이 난 사리클럽과 겨우 50m 가량 떨어져 있다. 한씨는 “미국인들이 많이 가는 하드락 카페는 견고하게 지어진 건물이라 상대적으로 허술한 사리클럽을 범행대상으로 택한 것 같다”며 “하드락 클럽이나 사리클럽이나 그게 그것”이라고 가슴을 쓸어 내렸다.

그는 “해외로 자주 나가는 사람들에겐 이젠 테러가 바로 눈앞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을 갖게 된다”고 말했다.

배현정 기자

입력시간 2002/10/29 17:33


배현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