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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시대의 巨匠] 우리 시대의 국악을 찾아, 박범훈

[우리시대의 巨匠] 우리 시대의 국악을 찾아, 박범훈

"국악은 보존의 틀이 아닌 생활 속에서 거듭나야"

“딱딱 규칙화돼 있는 서양 음악에는 스케일이라는 길(路)이 있지만, 우리 음악은 정해진 길에 익숙지 않아. 평소 많은 연습이 최고지. 자, 이번에는 ‘후에이거’를 해 봅시다. 루바토 디마이너(rubato d-minor)네.” 11월 13일 안성 중앙대 캠퍼스 국악과 연습실. 중앙 국악 관현악단 단원 앞에 선 박범훈(54ㆍ중앙대 부총장)의 말은 시원시원하고 지휘는 언제 봐도 활달하다.

춤추는 듯한 특유의 지휘 모습은 많은 사람들에게 깊이 각인된 바다. 그의 지휘법은 서양 음악의 지휘법과는 완연히 다르다. 2박자나 4박자 등 짝수 계열의 리듬이 아니라 3박자 6박자 12박자 등 세박자 계열의 박자를 공중에서 활달하게 그어 가는 손끝을 마음속으로 찬찬히 세어 가다 보면 어느 새 창작 국악의 세계로 빨려 들어 간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중국 작곡가 탕지안핑(唐建平)이 지은 신작 ‘후에이거(飛歌)’의 유장한 라 단조 선율이 초겨울 안성 벌판 위로 포근하게 내려 앉는다. 아쟁의 잔잔한 선율을 배경으로 25현 가야금이 날렵하게 뛰어 논다.

중국의 원주민 중 묘족(苗族)이 명절 때 부르던 민요의 테마를 따 온 이 곡은 창립 9주년을 헤아리는 ‘오케스트라 아시아’의 올 시즌 무대에서 선보일 작품이다.


국악에 대한 갈증 덜어줄 교육대학원

그날 오후 6시 11분 연습실에서 연구실로 돌아 와 숨을 고르고 있던 그에게 교육인적자원부에서 띄운 팩스가 날아 들었다. 유아, 초등학생, 중등학생의 국악 교육 교사 양성을 전문적으로 맡게 될 ‘중앙대학교 국악교육대학원’의 설립을 인가한다는 내용이었다. 2002년 2월 정부에 인가 신청을 해 두었던 사안이다. 국악만을 전문적으로 교육하는 대학원이 설립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서양 음악에 치여 있던 음악 교육을 이제 ‘정상화’ 시키자는 취지다. 교육 과정상 서양 음악 대 동양 음악의 비율이 6대 4에서 5대 5로 동등하게 된 만큼 교사도 그에 발맞춰 양성해 내야 한다는 자연스러운 논리에 발맞추자는 취지다.

국악 교육을 전문적으로 담당하는 기관이 없는 현실에서 이 대학원은 국악 교육을 희망하는 서양 음악 전공자나 일반인들의 갈증을 덜어 줄 전망이다. 재교육 센터 노릇을 하게 될 이 대학원의 5학기 과정을 모두 이수하면 중앙대 총장, 대학원장, 국악대학장 등의 명의로 국악 교육 자격 인정서를 수여받게 된다. 2003년 신학기에 모집 공고를 내, 그 해 여름 방학 이후 첫 수업을 가질 계획이다.

반 년 넘게 기다리던 답을 받은 그는 한숨을 크게 쉬었다. 그는 “국악 전공 학사 출신에겐 교육 대학원에의 길이 막혀 있었다”며 “이제 국악 교육의 질을 끌어 올릴 커다란 계기”라고 말했다.

앞으로 국악교육대학원은 학기중 수업, 여름ㆍ겨울 방학 때 실기 교육 등 이론과 실기를 겸비한 국악 교사들을 배출할 계획이다. 이로써 박범훈은 국악 교육 기관 3곳을 설립했다는 기록을 하나 세운 셈이다. 1999년 국악 중학교, 2001년 중앙대 산하 국악대 설립 등에 이은 세번째 거사다. 중앙대 국악대는 국내 최초의 국악 단과대라는 기록을 갖고 있다.

국악의 대중화라는 말은 그를 제대로 설명하기에 너무 두루뭉실하다. 그는 사랑방, 기방, 놀이판 안에서의 연희 양식이었던 국악을 시대적, 공간적으로 확장시킨 장본인이다. “국악이 보존해야 할 그 무엇이라면 박물관의 전시품이란 말이나 다름 없다. 판소리나 산조가 당대의 현대 음악이었듯 우리도 오늘의 전통을 만들어 가야 한다.”

그러나 원칙 없는 예술은 맹목이거나 야합이다. 새로운 국악 양식을 창조한답시고 아무렇게나 변형시키거나 이것 저것과 접합할 수 없다. 이 같은 그의 주장은 무엇보다 ‘뿌리를 잃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그의 대원칙에 뿌리 박고 있다.

“악기 조율을 평균율화해서 서양 악기와 협연하더라도, 문제는 시김새를 어느 정도로 지키느냐에 있다.” ‘시김새’란 연주 방법이나 악기 고유의 음색을 말한다. 어떤 식으로 변하더라도 그것만은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스스로가 빼어난 연주가이기도 하기에 그 말은 더욱 각별하게 다가온다. 그는 ‘박범훈류 피리 산조’의 창시자다. 그가 서울대 음대 강사로 있던 1985년, 스승 지영희의 시나위와 남도의 무속 음악을 바탕으로 ‘짠’(엮은) 산조다. 현재 모든 대학에서 피리 산조의 교본으로 쓰이고 있다.


현대적 음악으로서의 국악

“지금은 전통 음악을 대표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판소리나 산조는 성립 당대에는 엄청나게 낯선 양식이었어요. 그처럼 전통성을 바탕으로 한 현대적 음악으로 한국 음악은 거듭남을 계속해야 합니다.” 가깝게는 국악과 재즈와의 퓨전이나 ‘난타’ 등이 좋은 예라는 것이다.

“황병기의 가야금 작곡이나 사물놀이는 초연 당시 커다란 반발을 몰고 왔잖습니까? 아예 시도조차 하지 못 하게 하던 풍토가 문제죠. 그러나 지금은 모두 고전 아닙니까.”

중국과 일본은 1960년대 이미 그 같은 파고를 경험했다. 북한의 전통 음악 개량작업은 일찍이 1930년대 무용가 최승희가 새 음악을 강력 요구하는 바람에 보다 일찍이 현실화돼 한국 전쟁 직후부터 개량 악기를 선보였다.

북한의 전통 음악과 관련해 그는 각별한 경험을 갖고 있다. 1998년 11월 평양 모란봉 극장에서 열렸던 ‘윤이상 통일 음악회’ 당시 남한 사람으로는 최초로 그는 평양 국립 교향악단을 지휘했다. 북한 작곡가 최명환의 ‘아리랑’ 연주 후 그도 연주자들도 뜨거운 눈물을 흩뿌렸다.

그는 “보천보 악단이 전통 음악을 전자화해서 망쳐버리긴 했다”는 단서를 단 뒤, “북한에서 전통 음악은 보존의 차원이 아니라 생활화돼 있다”고 말했다. 국악이 아예 유행 음악화돼 있는 북한의 전통 음악 상황이 향후 어떻게 될 지, 그로서도 계속 지켜 볼 문제다.

국악과 관련한 작업이라면 그는 참으로 엄청나게 썼다. 독주, 협주, 관현악곡, 독창곡 등 갖가지 양식의 국악은 물론 마당놀이, 연극, 무용 등 타 장르 무대까지 그가 지은 음악을 타고 풍성해졌다. 그의 곡을 연주해 본 사람들 중에는 김덕수 사물놀이는 물론, 송창식 김수철 주병선 김성녀 등 인기 대중 가수까지 장르를 가리지 않는다.

86 아시안 게임, 88 올림픽, 2002 한일 월드컵 등 최근 3대 체육 행사 개막식에서의 작곡은 물론 지휘까지, 모두 그의 몫이었다. 10월 14일 막을 내린 2002 제 14회 부산 아시안 게임에서는 개회식은 물론 폐회식까지 그의 음악으로 장식됐다. 김대중 대통령의 취임식장에서는 국악 관현악단의 지휘까지 맡았다.


보전에 앞서 생활화가 우선돼야

“흔히들 말하는 전통 음악이란 따지고 보면 조선 시대의 음악일 뿐이죠. 판소리나 산조는 모두 당대의 현대 음악이었을 뿐이죠.” 우리가 우리 시대의 전통 음악에 대해 고민하고 새 길을 찾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지론이다.

김성녀와 윤문식을 스타의 반열에 오르게 했던 ‘방자전’, ‘배비장전’, ‘이춘풍전’, ‘뺑파전’ 등 마당놀이의 역사는 곧 그의 흥겨운 창작 국악이 없었던들 꿈도 못 꿀 바였다.

1985년 ‘MBC 마당놀이’측의 위촉을 받은 이후 그 무대에서 펼쳐져 온 그의 작곡력은 국악은 결국 생활속의 음악이라는 진실을 생생하게 증거해 왔다. “전통 음악은 보존에 앞서 생활화돼야 하니까요.”

일본 무사시노 음대 대학원을 졸업한 이듬해인 1984년 그가 활동했던 악서고회(樂書孤會)는 그에게 음악은 곧 사상과 철학이라는 사실을 깊이 각인시킨 계기였다. 당시 양심선언을 하고 대학 강단을 뛰쳐 나와 새길을 모색하고 있던 김용옥과 그는 쌍계사 국사암에 가서 각자 관심 분야를 파고 들었다.

범패를 최초로 체계화한 신라고승 진감선사의 자취가 깊이 각인돼 있던 절이다. 도올과의 인연은 1987년 도올이 작사하고 그가 작곡한 국악 가요 ‘이 땅에 살자꾸나’로 이어졌다.

거기서 불교 음악을 깊이 알게 된 그는 새로운 국악의 가능성을 탐색해 갔다. 동국대 철학과 입학 후 1992년 교성곡 ‘보현원행송’, 법회곡 ‘일연 큰스님’ 등 음악에 철학의 깊이를 더해 간 그의 작품에는 한 차례의 신명으로만 끝날 수 없는 깊이가 있다. 1곡당 연주 시간이 2시간은 족히 되는 칸타타 찬불가를 8곡 지었다.

타 장르를 만나도 자연스레 자기 것으로 끌어들이는 그의 독특한 내력은 중앙대 음대에서 서양 음악을 공부한 내력과 관련이 있다. 당시 아르바이트로 오아시스 레코드사에서 했던 가요 편곡 작업은 이후 국악 가요는 물론 드라마 음악 등의 작곡과 편곡 작업에 밑거름이 됐다.

이제 그는 국악대학원을 궤도에 올려 놓고 나면 임기가 끝나는 2003년 2월 중앙대 부총장직을 그만 두고 자기 본령으로 돌아 가려 한다.

그는 “이제는 진짜 남을 작품을 쓸 생각”이라며 “국악의 생활화에 기여할 수 있다면 연주곡 성악곡을 가리지 않고 쓰겠다”고 다짐한다. 딸 셋을 둔 그는 큰 스승이기도 하다. 큰딸 혜리나(22ㆍ중앙대 국악대3ㆍ가야금), 둘째 두리나(20ㆍ˝ 1ㆍ해금), 셋째 세리나(13ㆍ중앙대 부속초등5ㆍ한국무용)는 자연스레 아버지의 길을 걷게 됐다.

장병욱 차장 aje@hk.co.kr

입력시간 2002/11/22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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